언젠가부터 어떤 경우에나 예우를 지키는 것이 불필요하고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명분상의 예우는 불필요하다고 느꼈다. 초등학교부터 늘 학교에서 예우범절을 교육받은 우리가 예우에 대한 무언의 압박을 크게 받아 명분상의 예우를 ‘굳이’ 차리는 경우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말로 ‘예우’가 필요한 때는 따로 있다.
 
  지난 2일 서울캠 교양학관 앞에서 진행된 구조조정 공동대책위원회(공동대책위)의 구조조정 관련 기자회견 때였다. 그 때 나는 현장을 취재수첩에 기록 중이었는데 우연히 현장을 지나가던 다른 학과의 친구와 마주쳤다. 마주친 친구의 반응은 내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친구는 내게 고생을 사서 한다며, 취재는 왜 하고 있냐며 “어차피 구조조정 대상 전공은 가정교육과처럼 없어질 거고 학교에서 학생들이 원하는 학과로 잘 보내줄 것 아니냐”고 말했다. 순간 그 친구의 말을 듣고 힘이 쫙 빠졌다. 그 친구는 구조조정 이해 당사자들의 외침을 한순간에 무기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 지난 9일 인문사회계열 전체교수회의에서였다. 이번엔 처음으로 계열 교수님들이 한 번에 모이는 자리이니 활발한 상호 토론이 이뤄지겠지 하며, 나름 생산적인 자리가 만들어질 것을 기대하고 취재에 임했다. 하지만 인문사회계열이 마련한 전체교수회의 과정에선 도시계획·부동산학과의 캠퍼스 재배치에 관한 발표가 준비돼 있었다. 도시계획·부동산학과의 교수가 학과 성과 및 대외경쟁력을 발표하고, 서울캠퍼스로의 이전을 발표하는 상황이었다. 교수협의회가 ‘인문사회계열 내 교수들의 목소리를 들어달라’는 차원에서 특별히 김호섭 부총장에게 부탁한 회의가, ‘인문사회계열 학문단위 재조정’이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 예상과는 다르게 진행되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학문단위의 발전 전망과 학문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도시계획·부동산학과의 마음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인문사회계열은 폐과 대상 전공 소속 교수와 다른 학문단위의 교수들의 구조조정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듣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이러한 절차를 마련한 것에 신중했어야 한다. 설명을 듣고 있는 내내 ‘도대체 왜 하필 이 시점에, 여기서?’라는 반문이 계속됐다. 취재차 방문했던 기자보다 당장 구조조정 당사자들인 폐과 대상 전공의 교수님들의 안타까운 마음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앞서 친구가 말했던 부분과 인문사회계열이 마련한 도시계획·부동산학과의 발표는 ‘대화를 진행해봤자 어차피 구조조정은 진행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생각에 내내 불편했다. 구조조정 당사자들이 결코 대학본부의 추진력을 모른 채 무작정 반발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노력을 단순히 ‘해봤자 소용없을 것’이라고만 치부한다면 구조조정 당사자들이 대학본부에 맞설 이유와 명분은 없어질 것이다.
 
  모든 절차적 과정엔 상호 간 용인할 수 있는 ‘예우’가 필요하다. 인문사회계열은 구조조정 당사자들이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에 대한 예우가 부족했다. 우연히 마주친 친구도 당시 현장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던 구조조정 당사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예우가 부족했다. 무조건적인 격식을 차리는 행위는 일의 진행과정에 있어 소모적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예우가 없는 과정의 끝엔 깊은 상처만이 남을 뿐이다. 
 
  그날 인문사회계열 전체교수회의가 끝나고 교수들이 빠져나가는 자리에서 학과의 비전을 설명했던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다른 교수들에게 일일이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우리 학과를 잘 부탁한다’는 명목상의 예의를 차린 것이었을까. 어쩌면 불난 집에 부채질해서 미안했다는 뜻일 수도 있었겠다. 그날 차려야 할 예의를 차리지 못한 것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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