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에 온 지 4년 하고도 7개월이 지났다. 94년 가을부터 강의를 시작했으니까 대학의 강단에 선 지는 어느새 20년이 다 되어 간다. 인문학 분야가 대개 그렇지만 대학에 정규직으로 자리 잡기까지 시간강사 신분으로 여러 대학을 전전하며 참 많은 과목을 가르치며 살았다. 열심히 강의하고 논문 쓰고, 짬짬이 문학평론이라는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막막한 현실이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위로받으며 나름대로 즐겁게 살았다.
 

  중앙대에 와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시와 시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쓰면서, 이렇게 나이 먹는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겠구나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점점 선생이라는 직업이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혼자만 꿈꾸어도 고립되기 쉬울 것이고, 그렇다고 학생에게만 기준을 맞춘다면 그것은 타협이지 교육이 아닐 것이다. 나날이 변화하는 학생들과의 소통에 대해 고민하되,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타협해서는 안 되는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지킬 줄 아는 선생.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선생의 모습이다. 요즘은 해마다 달라지는 학생들의 분위기와 그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강의실의 공기와 온도를 느끼며 나는 언제까지 학생들과 소통하되 타협하지 않는 선생의 모습을 지키며 살 수 있을까 가끔 생각한다.
 

  ‘상아탑’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요즘의 대학은 발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과거의 대학에 비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되어 가는 면도 있지만, 과거의 대학이 가지고 있었던 미덕을 경쟁과 실용이라는 가치 아래 내던지고 몸 바꾸기에 급급한 것도 사실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많은 분야가 쓸모라는 가치 기준에 의해 움직이고 있고 그 여파는 인문학에도 미치고 있다. 인간에 대해 고민하고 인간을 다루는 학문인 인문학조차 쓸모에 의해 가치를 평가받고 쓸모가 없으면 폐기처분하는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는 아니다. 한 사회의 건강성을 측정할 수 있는 척도 중 하나는 다른 가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유연함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배적인 가치의 바깥을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경직된 사회이다. 점점 딱딱한 몸이 되어가고 있는 사회 속에서 우리들 자신의 몸도 딱딱하게 병들어 가고 있다.
 

  쓸모가 가치 기준이 될 수 없는 시를 공부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나는 요즘 종종 한다. 쓸모와는 상관없이 고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세계, 하나의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 세계, 딱딱해진 몸을 유연한 몸으로 바꿔 줄 수 있는 세계. 나는 내 강의실이 그런 세계를 열어주는 통로가 되기를 바란다. 길들여진 감각으로는 좀처럼 인지하기 힘들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다른 세계와 다른 가치를 인정하고 대면할 줄 아는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와 빛나는 눈을 가진 청춘들을 만나고 싶다. ‘사막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경수 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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