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의 논리를 갖춘 상대를 만났을 때 그 논리를 반박한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당한 시간과 장고를 거듭한 끝에 자신만의 논리를 확립하기 때문입니다. 토론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화려한 언변을 가진 논객이 아닌 이상, 상대가 논리를 세우기 위해 들였던 시간과 노력 이상을 쏟아 부어야 겨우 대등한 위치에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가끔 몇차례 설전이 오간 끝에 금새 밑천을 드러내는 논객들을 보며 “저 양반 아직 준비가 덜 됐구만”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섭니다.
 
 이는 취재를 할 때 마다 뼈저리게 느끼는 냉혹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후배 기자들을 가만히 지켜보면 본부나 학생회의 정책에 관련해 비판적 시선을 가지고 자신만만하게 걸어나가다가도 얼마 되지 않아 풀이 죽은 모습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편집국에서 취재방향을 설명할 때 보여준 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취재원에게 설득당해서 돌아오는 기자들을 보는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언뜻 보기엔 문제점이 명확해 보이는 사안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잘잘못을 지적하기 어려워집니다. 해당 사안에 대해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제반 요건들을 고려해가며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든 나름의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전문 영역도 아니고 그다지 오랜 시간을 쏟아부은 것도 아닌 기자들에겐 뚫기 어려운 벽입니다. 취재를 마친 후 많은 기자들이 “그렇대요”라며 취재원의 입장에 완전히 동화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기자들에겐 두가지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일단 문제점과 취재원의 입장을 단순 나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기자 개인의 안녕을 생각한다면 가장 훌륭한 선택지입니다.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데 어쩔 수 있겠습니까. 다른 선택지는 조금 험난한 길입니다. 계속해서 사안을 들여다보며 대안을 찾고 한번 더 치고 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입장을 가진 취재원도 찾아봐야하고 괜시리 한번 찾아갔던 사람을 몇 번이고 귀찮게 해야 합니다.
 
 지난 호 중대신문 소통면엔 안성캠 유창우 전 부총학생회장의 글이 실렸습니다. 그중 일부분을 독자 여러분께 다시금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관련 부서에 가보면 언제나 수긍할 수 있을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수긍할 수 있을만한’ 것일 뿐, 무조건적인 이유나 정답이 될 수는 없다. 어떤 학생회는 이런 상황을 수긍하고 지켜볼 것이고 어떤 학생회는 이에 대해 부당함을 주장하며 싸울 것이다. 당연히 결과 또한 다를 것이다”. 
 
 굳이 지난 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금 끄집어내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건 “중대신문사 기자들은 앞으로 이렇게 할 것이다”라는 다짐을 보여드리기 위한게 아닙니다. 인용한 부분을 읽어줬으면 하는 사람들은 얼마 전 새로 선출된 학생대표자들입니다. 
 
 최근 ‘한걸음 더 나아가는’ 학생대표자를 본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 같습니다. 학생들의 불편함을 주장하는데 가장 앞장서야 하는 이들은 당연히 학생대표자들입니다. 과격한 방법을 사용해가며 떼를 써달라는게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발걸음을 돌리는 험난한 길 앞에서 학생대표자들만큼은 그저 한걸음만 더 나아가주길,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써 바라는 것 뿐입니다. 자꾸 걷다 보면 언젠가 끝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물론 저희도 계속 걷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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