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 서양화과 73학번. 부모님의 반대가 심해 1년 동안 중앙대 진학사실을 숨기고 지내다 어렵게 허락을 받아 미술계에 입문한다. 1학년 때 만난 음대 여학생과 캠퍼스 커플이 됐고 군복무 중이었던 24살에 결혼을 하게 된다. 졸업을 하고 가장이라는 배역에 충실해야 했기에 농화학회사에 다니다 결국 10년 만에 회사를 뛰쳐나온다. 갤러리를 열어 4년 여간 다양한 작품을 접한 뒤 10년 동안 작업실에서 진정으로 그리고 싶던 그림을 그리며 독수공방한다.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하듯 현재 그의 작품은 글로벌 관문이라 불리는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될 만큼 세계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지난 2일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서 강형구 화가를 만났다.  
글 강나라 기자 jiangnala@cauon.net 김누리 기자 kkokko@cauon.net
사진 강나라 기자

 

2010년 11월 홍콩 컨벤션센터.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회사 크리스티(Christie’s)의 홍콩 경매가 열리는 날이었다.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이 모인 이곳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작품은 단연 강형구의 ‘Warhol in Astonishment’. 앤디 워홀의 치켜뜬 눈을 통해 워홀의 내면세계를 표현한 이 작품은 당시 104만 홍콩달러(약 1억 5천만원)에 낙찰됐다.
-당시 경매에서 작품이 고가에 낙찰됐다. 예상했었나.
“이순신 장군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화가였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팔려고 하면 안 팔릴 것이고 안 팔려고 하면 팔릴 것이다’. 전혀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을 꾸준히 하다보니 내공이 쌓이고 그 역량을 외국인들이 알아준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게 외국인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니까 그제야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날 인정해주더라. 아무래도 사람들은 금액으로 환산된 실적이 나와야 인정해주는 면이 있다. 씁쓸했다.”
-사람들의 반응이 부담스럽진 않았나.
“금액으로 쳤을 때는 한국 최고의 작가가 됐다고들 말하지만 부끄럽다. 그동안 역사적인 한국의 대선배님들에겐 부끄럽고, 또 젊은 후배들에겐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 창작품을 많이 그려야겠단 생각을 한다.”
-수익금은 어디에 썼나.
“낙찰이 됐다고 수익금이 다 나에게 오는 건 아니다. 당시 내가 소속되어 있는 화랑으로 절반 정도가 갔고 일부는 손기정기념재단에, 나머지는 내게 왔다. 부모님이 걱정하신 대로 ‘쟤가 돈이나 벌까’ 이런 걱정은 덜어드려서 좋다.(웃음)”
-예술로 돈을 버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도 많다.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그린 작품이 작업실 안에만 있으면 뭐하나. 의미가 없다. 나는 그림을 딸이라고 표현한다. 딸에겐 딸의 인생이 있다. 내게도 내 인생이 있듯이. 더 넓은 세계로 가는 것이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즐거운 일이다. 숙제를 마치는 시원함도 있고.”
-그림을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되도록 후자에게는 그림을 팔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 중에는 내 그림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내 그림을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시설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팔길 원한다. 미술관 쪽에서 소장을 해준다면 기쁘다. 꼭 미술관이 아니더라도 공립단체에 그림을 대여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좋은 콜렉터들을 만나면 참 좋다.”
강형구의 작품은 초상화가 주를 이룬다. 자화상도 전체 작품의 1/4을 차지할 만큼 비중 있게 그린다. 강형구만의 독특한 점은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대형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초상화를 주로 그린다. 이유가 있나.
“난 역사의 표정을 그린다. 고흐를 생각하면 늘 비장함이 느껴진다. 역사의 표정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거다. 사람의 얼굴로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것. 또 상당히 개성 있는 골격을 가진 사람을 많이 그린다. 감정과는 상관없지만 독특한 얼굴, 예를 들면 에이브러햄 링컨을 보면 코가 크고 눈이 쑥 들어갔다. 독특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을 보면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2~3m나 되는 캔버스에 그림을 크게 그리는 이유는 뭔가.
“확대되었단 것은 감상자가 상상해볼 수 있는 면적마저도 커지는 것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내게 사실주의 작가라고들 많이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사실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작품의 디테일적인 부분에서 꼼꼼하게 그리니까 그런 것이고 확대해서 그리니 모든 것이 비현실이고 거짓이다.”
-처음부터 사람들이 좋아한 것은 아닌데.
“내 그림은 우리나라 주거 문화에는 안 맞다. 높이가 3m나 되는 대형 캔버스를 집 안에 들여놓기는 쉽지 않다. 또 얼굴이라는 생소한 소재에 확대해서 그리니까 징그럽기까지 하다.(웃음) 그래서 내 별명이 ‘팔포’였다.”
-팔포라니?
“팔기를 포기했다.(웃음) 젊었을 때부터 고집 있게 안 팔리는 그림만 그려대니 그런 별명이 붙었다. 그런데 ‘팔기를 포기했다’라는 말은 팔 거라는 의지가 있어야 어울리는 별명이지 않나. 나는 팔아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뿐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스타일이 정착된 건가.
“대학시절부터 그랬던 것 같다. 나는 화가라는 직업을 버려야 진정한 화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화가니까 이런 작품을 그려야 해’라고 생각해버리면 오히려 작품이 안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학시절부터 작품화될 수 있는 정물화, 풍경화를 그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나이가 되도록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다.(웃음)”
-학부 때는 괴짜같은 행동을 많이 했다고.
“밀레의 이삭줍기를 변형해서 세 아낙네가 이삭 대신 돈을 줍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통조림 깡통에 사람 눈동자를 만들어서 넣기도 했다. 뭔가 사회 문제를 그림으로 표현하며 그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괴짜같은 짓을 많이 했으니 교수님의 눈 밖에 나는 것은 당연했다.”
-교수님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나.
“많이 싸웠다. 학점도 늘 D학점 선이었다. 내 실력대로라면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는데 말을 안 들으니 늘 성적은 그모양이었다.(웃음)”
-그런데 약 30년 뒤 중앙대 겸임교수가 됐다.
“이건 꼭 말하고 싶었던 건데 난 겸임교수가 아니다. 포털 사이트에 ‘강형구’를 검색하면 꼭 중앙대 서양화학과 겸임교수라고 나오더라. 10여 년 전 즈음에 잠깐 강의를 나갔을 뿐인데. 나는 교수라는 직업이 안 맞는 사람이다.”
-교수와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뭔가.
“평생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맘껏 그리며 살고 싶다. 예술에서는 권위나 제도권의 폐단이 작업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가끔 미대 교수들 중에는 학생들을 자기 조수처럼 쓰고, 교수라는 직함 아래 작품이 팔리길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작가보다는 교수가 되고 싶어 하는 학생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학생에겐 이렇게 말한다. (교수가 되어 자신의)학생 수가 늘길 바라지 말고 작품 수가 늘길 바라라고. 가끔 외국에 나가면 다른 화가 겸 교수들이 영어 스펠링을 써가면서 이탈리아의 무슨 학교, 미국의 무슨 학교를 나왔다고 말한다. 그럼 한마디 한다. 나는 한국의 black stone avenue의 central university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고. 석사학위, 박사학위 딴사람 부럽지 않다.(웃음)”
-학부 때도 화가가 되길 원했나.
“그렇다. 대학 진학을 결정할 때 부모님께서는 육군사관학교를 가길 원하셨다. 나는 미대를 가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육사도 가고 싶었다.”
-군인이 꿈이었다니. 지금의 직업과는 정반대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결정이 뭐냐고 물으면 대학 진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웃음) 실제로 부모님 뜻에 따라 육사 시험도 봤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육사 입학시험 날이 나를 화가로 만든 날이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내가 육사를 간다고 하니 미술부 선생님이 나를 불러 기합을 주고 때리더라. 화가가 될 놈이 육사는 무슨 육사냐며. 담임도 아닌데 집에 직접 방문해서 아버지를 설득하시기까지 했다. 친형 같기도 하고 깡패 같기도 한 선생님이셨다. 입학시험 날, 시험장에 도착하니 선생님이 먼저 와서 날 기다리고 계셨다. 그래서 내가 한 마디 했다. ‘제가 낙방하기 좋게끔 답안을 쓰고 나오겠습니다.’ 하지만 1,2교시를 실력껏 열심히 쳤다. 점심시간이 돼서 운동장에 산책을 나왔는데 선생님과 미술부 선배들이 닫힌 정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더라. 그때 생각했다. ‘그래, 미대가자.’ 그래서 3,4,5교시는 떨어지기 좋게 시험을 봤다. 육사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 ‘너는 네 실력으로 봤어도 떨어졌을 거다’하고.(웃음)”
-미대 진학 결정에 부모님의 만류는 없었나.
“반대가 너무 완강하셔서 중앙대 합격사실조차 말씀드리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나간 공모전에서 수상경력이 있어서 다행히 한 학기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다. 부모님께는 재수한다고 말하고 재수학원 등록금을 받아 생활하니 오히려 돈이 남았다.(웃음)”
-재료비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1학년 때는 재료비가 많이 안 든다. 목탄 데생을 주로 했기 때문에 목탄과 연필만 있으면 됐었다. 3,4학년이 돼야 물감이나 캔버스 같은 재료들이 많이 필요하다. 아마 사진학과에 진학했으면 카메라 값 때문에 골치 아팠을 거다.(웃음)”
-부모님은 미대생이 됐다는 사실은 언제 아셨나.
“2학년 때 말씀드렸다. 내게 큰 실망을 하셨지만 어쩔 수 있나. 허락하셨다.”
군복무 중이던 1976년. 그는 같은 중대생이었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된다. 제대할 무렵에는 슬하에 아들도 한 명 두었다. 아버지라는 배역에 충실하기 위해 그는 화가의 꿈을 포기하고 직장에 취업한다.
-그림을 포기하고 일반 회사에 다녔다고.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양쪽 집안에서 결혼 허락을 해줄 테니 그림은 취미로 하고 밥벌이를 하라는 압력이 들어왔다. 식솔이 있는데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순 없지 않나. 먹여 살려야지. 그래서 일반 회사에서 10년 정도 근무를 했다.”
-굉장히 답답했을 것 같다.
“늘 그런 마음은 떠나질 않았다. 월요일에 출근하기가 참 싫었다. 그럴 때면 내가 요일에 관계없이 그림 그리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그림을 그린 적은 없었나.
“없었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려면 긴 시간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직장은 하나의 사회다. 그 사회에 속해있는 한 그곳의 룰을 지켜야했기에 그림을 그릴 순 없었다.”
-언제 다시 미술계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나.
“어느 날 문득 불안감을 느꼈다.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느냐, 소속된 사회에 끌려 다니며 살아야 하느냐. 이런 고민을 하면서 더 늙기 전에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화가가 되길 결정했을 때 그의 나이는 30대 후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남들이 모두 예술인으로 자리를 잡아갈 시점에 새내기 강형구는 미술계에 입문하게 된다.
-회사를 그만두고 화랑을 차렸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직장생활을 10년 정도 하다보니 그나마 있던 미술계의 끈도 없어져 버렸다. 내 의욕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남의 작품을 많이 접해야했다. 화랑을 차리면 많은 화가들도 만날 거고 자연스럽게 작업을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퇴직금으로 대학로에 조그만 화랑을 차렸다.”
-하지만 생각보다 운영이 잘 안됐다고.
“예나 지금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변함없었다. 그래서 돈벌이와는 관련 없지만 내가 걸고 싶은 작품을 전시했다. 그러다보니 적자를 면할 수 없었다. 4년 만에 문을 닫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당시는 경제적인 부분에서 부모님께 많이 의존했었다.”
-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면 작업실도 넓어야 할 텐데 문제는 없었나.
“넓을 필요는 없지만 높을 필요는 있었다. 세워두고 그려야 하니까. 건물의 지하공간을 썼었는데 습기도 차고 더구나 나는 에어브러시(air-brush)를 뿌리는데 환기가 안 돼서 힘들었다. 그래도 그 곳에서 10년 동안 먹고 자고 그림만 그렸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많은 작품을 단시간에 그려야 했다. 그래야 표현하고 싶은 작품을 다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도 강형구는 10개의 작품을 동시에 작업하기로 유명하다.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그린다.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10개 정도를 동시에 그려야 속도도 나고 그리고 싶은 양도 채울 수 있다. 1년에 어느 정도 양의 그림을 그려야만 전시회를 할 수 있으니까.”
-동시에 하면 집중력이 분산되지 않나.
“역으로 생각하면 된다. 한 그림이 막히면 다른 그림으로 스트레스와 난이도를 풀어나갈 수 있다. 그러다가 해법이 생겨날 수도 있고. 그림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나리오가 없다.”
-한 번 작업하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나.
“3~4달 정도 걸리는 것 같다. 대신 그 만큼의 작품 양을 소화하려면 집에 들어가는 건 포기해야 한다.(웃음)”
-초상화는 사진을 보고 그리나.
“참고가 된다. 하지만 그림이 완성되어 갈수록 사진의 개념은 없어진다. 결과적으로는 사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이 완성된다. 표정을 더 강화시키기도 하고, 집중력을 위해 변조도 한다.”
-초상화 전문 화가가 됐으니 주문도 많이 들어올 것 같다.
“지금까지 주문 회화는 3장을 그려봤다. 하나는 어머니의 주문으로 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렸다. ‘너는 다른 존경하는 사람은 많이 그리면서 아버지 얼굴은 안 그리냐’라는 말을 듣고 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것으로 전시도 했고. 나머지 두 명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싱가폴의 아름다운 독재자라 불리는 리콴유 수상이었다. 두 분 다 순서상 뒤로 밀렸을 뿐이지 평소에 그려보고 싶었던 분들이었다. 무턱대고 모든 주문을 다 받지는 않는다. 주문을 한 번 받기 시작하면 그리고 싶지 않아도 그려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 수를 다 그렸다가는 그림자가 없는 작가가 돼버릴 것 같더라. 돈을 벌 수는 있을 거다. 하지만 작가는 창작을 해야 한다.”
-돈도 많이 벌었고 하고 싶은 작업도 할 수 있는 환경이 됐다. 또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화가가 되고 싶다. 어렸을 적 꿈도 화가였지만 지금도 늘 화가를 꿈꾸고 있다.”
-언제쯤 화가가 될 것 같은가.
“영원히 못될 것 같다.(웃음)”

▲ Marilyn Monroe in the night sky, 2010, oil on aluminum, 240x240cm

▲ Hepburn in red hat, 2010, oil on canvas, 520x194cm

▲ Vincent van Gogh in blue, 2007, Oil on canvas, 259.1x387.8cm

손기정을 그리다

강형구 화가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마라톤 왕 고(故)손기정 선수의 기념재단 설립자인 동시에 이사장이기도 하다. 국가의 고마움을 알리기 위해 기념재단을 설립했다는 그는 애국정신이 투철한 화가기도 하다. 심지어 그의 통화연결음은 애국가였다.

-어떻게 기념재단을 설립할 생각을 했나.
“나는 영웅이 사회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에게 시대의 아이콘을 알리고 싶었다.”
-하필 왜 손기정 선수였나.
“손기정 선수는 국호가 없는 가운데 일본 선수로 출전해 금메달을 땄다. 그리고 일본에 헌납했다. 열악한 조건에서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 선수를 존경했다. 사람들은 빈센트 반 고흐나 에이브러햄 링컨같이 열악함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나. 손기정 선수가 내겐 그런 사람이었다.”
-손기정 선수와는 생전에 친분이 있었나.
“그렇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손기정 마니아였다. 심지어는 내가 수집한 자료들과 직접 그린 초상화를 모아 전시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친분이 쌓이게 됐다.”
-재단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나.
“현재 손기정을 알릴만한 기념관이 없다. 그래서 지금 기념관을 짓고 있다. 손기정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일반인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기념관 외에 마라톤 대회나 예술 발표회(음악회, 전시회) 등을 하기도 한다. 단순히 체육의 문제를 떠나 많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재단의 목표다.”
손기정기념재단은 강형구 화가 외에도 공동 이사장이 2명 더 있다. 김성태 국회의원과 나경원 국회의원이 바로 그들이다.
-김성태, 나경원 의원과 어떤 관계인가.
“재단을 만들 당시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기념관을 세운다거나 마라톤 대회를 개최할 때 각종 협찬과 후원을 받아야 했지만 나 혼자서는 한계가 있었다. 손기정 선수가 양정고등학교 출신인데 당시 양정고는 중구에 있었다. 그래서 중구 국회의원이었던 두 분께 부탁을 드리게 됐다.”
-손기정기념재단이 강형구 화가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가 있나.
“물론 있다. 나는 시대의 표정을 그리는 화가다. 손기정 선수는 일제 강점기 당시에 평화를 상징하는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내게 많은 영감을 줬고 내 예술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손기정 선수의 얼굴. 참 많이도 그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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