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청소년 대표로 농구계에 이름을 알린 이대성. 꿈에 그리던 중앙대에 진학하게 되지만 다니는 동안 대학선수로서의 생활이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대학팀과의 합이 잘 맞지 않았던 것. 3학년 때 학교를 휴학하고 미국 진출을 결심한다. 그리고는 NBA 하부리그인 D리그 진입을 위해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른다. 한국선수가 NBA에 진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 농구판에서 뛰어본 선수라곤 NBA 하승진 선수, D리그에 방성윤 선수 단 둘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도전했다. D리그 진입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다시 도전했다. 새로운 대학으로 말이다. 최고의 농구선수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이대성. 그의 23년 농구 인생이 궁금해졌다.
 

 

 


자유로이 농구하며 인정받는 것이 내겐 더 큰 의미

중앙대를 꿈꾸던 소년

중앙대를 나오기까지

-농구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당시 농구부가 처음 생겼어요. 제가 또래보다 키가 크고 운동신경이 있던 터라 코치님께 차출됐죠. 농구에 대해 진지하게 마주하게 된 시기는 고등학교 때였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같이 농구를 했던 친구에게 고등학생이 되서는 계속 지더라고요. 그 친구를 이기고 싶다는 생각에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농구에 재능이 있다고 느꼈을 때는 언제였는가.
“제가 점프력이 정말 안 좋았어요. 전국에서 제일 못한다고 할 정도로(웃음). 점프만 될때까지 계속 연습했어요. 노력하다보니 남들보다 점프력이 높아졌어요. 그때 재능을 발견했죠. 하지만 점프를 너무 많이 해서 지금은 무릎이 닳은 것 같아요(웃음).”
대체로 농구 선수들은 하나의 포지션을 선택해 지속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대성은 달랐다. 190cm라는 큰 키 때문에 중앙대에 올 때까지는 파워포워드로 활약했다. 하지만 포지션을 바꾸기 시작했고 현재는 포인트 가드로 포지션을 정했다.
-포지션을 바꾸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제가 만약에 농구를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면 저에게 딱 맞는 포지션을 찾아서 계속 갔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님이 시키는 포지션을 했어요. 나중에 가서 원하는 포지션이 생겼죠.”
-그럼 진심으로 농구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건가.
“코치님께, 부모님께 혼나기 싫어서 농구를 했으니까요. 그러다가 고3때 NBA 캠프에 가게 됐어요. 학교 농구부에 있을 때는 포지션이나 게임 방식을 정해주는데 그곳에서는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제 방식대로 맘껏 표출했어요. 그 때 딱 한 번 농구가 재밌다고 느꼈어요.”
그는 고등학교 시절 화려한 플레이로 농구 코트를 휘어잡았다. 청소년 대표는 물론 각종 대회에서 득점왕 자리에 올랐다. 그러던 중 중앙대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중앙대를 선택한 이유가 뭔가.
“제가 고3일 당시에 중앙대 농구부는 52연승을 하고 있었어요. 중앙대는 농구하는 학생들에게 꿈의 학교였죠. 중앙대에 갈 실력이면 모든 대학교에서 스카웃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중앙대는 거의 유일하게 머리를 기를 수 있게 해줬어요. 시합 때도 왁스를 바를 수 있었고요. 고등학생 때 중앙대 형들과 시합을 하면 대기실에서 헤어 스프레이 냄새가 났어요. 그 냄새가 너무 좋더라고요(웃음). 고등학생 때는 다 머리를 밀어야 했으니까 더욱 더 중앙대를 가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아요.”
-마침내 중앙대에 입학했다. 어땠나?
“중앙대에 들어가는 것이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에 스카웃 제의를 받았을 때는 가슴이 벅차고 정말 좋았어요. 하지만 운동을 시작하자마자 벽에 부딪혔죠.”
중앙대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 이대성은 농구코트보단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전국에 날고 기는 선수들이 모이는 중앙대에서 그가 출전할 기회는 없었다.
-왜 경기에 뛰지 못했다고 생각하나.
“고등학교 시절 중앙대 선배님들과 게임을 뛰면 선배님들이 그러셨어요. “너 잘한다.” 하지만 막상 들어와보니 팀에서 요구하는 플레이와 제 플레이가 맞지 않았어요. 팀에서는 포지션에 맞는 플레이를 요구했지만 저는 포지션의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플레이를 원했어요.”
-팀에 자신을 맞추면 되는 일 아닌가.
“제가 원하는 포지션에 늦게 눈을 뜬 만큼 다양한 것들을 시도해봐야 했어요. 시합에 잠깐 나가는 경우가 있더라도 안정적으로 하기보다는 화끈하고 새로운 플레이를 시도했고요. 그러다보니 팀에 해가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감독님이나 선배들한테도 많이 혼났어요. 하지만 저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 그렇게 2년 반이 지속되자 결국 여기서 농구를 계속 하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휴학 결심을 하게 된 건가.
“중앙대에서 시합을 많이 못 뛰다 보니 조바심만 더 난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계속 있을 바에는 휴학을 하고 미국으로 갈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2학년 때 김상준 감독님이 떠나시고 새로 오신 감독님께 제 꿈을 말씀드렸더니 휴학을 허락해주셨어요.”

부푼 꿈을 안고 NBA로

 

-대부분의 농구 선수들은 한국에서 프로진출을 하는 게 목표 아닌가? 미국으로 진출하고 싶어 하는 선수는 없는 것 같은데.
“누구나 꿈은 꿔요. 어렸을 때부터 NBA가 목표라고 말은 하지만 커가면서 한국 선수가 NBA로 가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을 알기 때문에 속에만 담아두죠. 저 역시 잠시 미국 진출을 묻어두고 한국 프로 선수가 되는 생각도 했었어요.”
-NBA로 가는 것이 어려운 줄 알면서도 가고 싶어 한 건가.
“고등학교 때 KBL/NBA 캠프에 참가했어요. NBA의 유명 선수들과 코치들이 방한해서 차세대 NBA선수를 육성하는 캠프였는데 거기서 MVP를 탔어요. 코치님이 저를 보고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농구를 하는 것도 행복했는데 그런 말까지 들으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죠. 제 가능성을 확인했던 곳이 NBA였기 때문에 저는 그곳에서 농구를 해야만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능성을 확인해준 곳은 오히려 중앙대가 아닌가.
“중앙대가 감사하게도 제 능력을 인정해 준 부분(스카웃)은 있지만 한국에서 하는 농구는 즐겁지 않았어요. 개인 플레이보다는 팀 위주의 전술을 더 많이 선보이길 원하니까요. 자유로운 농구를 하면서 인정받는다는 것이 제겐 더 큰 의미였던 것 같아요.” 
-미국 진출을 결심하고 바로 고향으로 내려간 건가.
“고향으로 내려가서 고민을 했어요. 대학교 3학년 정도의 나이가 되면 진출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요. 마침 예전에 제 가능성을 알아봐주셨던 NBA 아시아 직원 분이 생각났어요. 어떻게 하면 NBA에서 농구를 할 수 있는지 물어봤죠. 그분께서 D리그를 가볼 생각이 없냐며 제안해주셨어요.”
D리그는 대학교를 졸업한 선수만이 트라이아웃(예선경기)에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대성은 NBA 아시아 직원의 도움으로 참여가 가능해졌다. 이대성은 D리그 선수 후보로 미국에 갈 기회를 얻었다.
-막상 미국에 가보니 어떻던가.
“후보는 50명이었는데 2명만이 D리그 드래프트에 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자신 있었어요. 몸 컨디션이 좋았거든요. 하지만 문제가 많았어요.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어요.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고 감독이 어떤 포지션을 원하는지조차 알아듣지 못했어요. 다른 후보들과 호흡을 맞추려고 해도 말이 안 통하니 제대로 할 수 없었죠. 같이 뛰었던 선수들도 관계자들의 눈에 띄어야 하니까 패스를 잘 안주더라고요. 결국 2명 안에는 들지 못했어요(웃음).”
-충격이 컸을 것 같다.
“탈락한 것에 아쉬움이 있었지만 많은 것을 배웠어요. 후보 선수들과 게임을 뛰는데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제가 6개월 동안 연습한 것을 단 며칠 만에 다 배울 수 있었어요. 좌절했다기보다는 더 농구를 배우고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 제 목표는 청소년 대표, 중앙대 입학, 미국 진출 등이었어요. 그런데 D리그에 도전한 후엔 ‘농구를 잘하고 싶다’는 것으로 바뀌었어요. 진정으로 농구를 잘하고 싶었어요.”
한국으로 돌아와 트라이아웃 때 배웠던 것들을 상기하며 농구 연습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 D리그를 도와줬던 NBA 아시아 직원으로부터 미국 대학 진학을 제안 받았다. 그는 많은 학교 중에 하와이에 있는 브리검 영 대학교(BYU)를 선택했다.
-BYU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듀크 대학이나 하버드 대학 같은 전력이 강한 명문 대학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학점을 유지하면서 시합을 뛰기가 현실적으로 힘들어요. BYU는 디비전1(NBA 동부, 서부에서 분할한 지구)인 대학보다 하위인 디비전2 대학이에요. 제가 뛸 기회가 많죠. 미국 농구를 배우기 위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학교 이름을 고민할 이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테스트를 받으러 갔죠.”
그는 지난 1월 23일 하와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BYU에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테스트를 본 BYU 농구부 감독은 이대성을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감독이 왜 마음에 들어한 것 같은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 물 먹는 시간 1초도 아깝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연습하고 가르쳐달라고 했어요. 저의 근성을 만족해 하셨던 것 같아요.”
-대학교에는 최종합격이 된 건가.
“최종합격 되려면 토플 점수가 60점 이상이어야 해요. 그래서 2달 동안 하루에 8시간씩 공부하고 있어요. 요즘은 농구를 정말 하고 싶은데 공부하느라 못하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어요. 중앙대에서 힘들게 운동한 것조차 그리워요. 살면서 지금이 최고의 슬럼프인 것 같아요(웃음).”
- 이 진로에 대해서 후회하지는 않는가.
“후회하지 않아요. 지금 미국 대학을 가야 NBA에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아지죠. 미국 진출 제의까지 받았고 가서는 배울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요. 물론 미국 진출이 무모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어요.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나오건 제가 노력하고 도전한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결과는 도전하고 난 뒤에 다가오는 문제지 꿈도 못 이루고 포기하는 건 싫어요.”
-이대성의 최종 꿈은 무엇인가.
“돈을 많이 벌고 싶다거나 유명한 농구선수가 되거나 남들한테 인정받고 싶은 그런 욕심은 없어요. 단지 이대성이라는 선수가 농구로 완벽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가 하고 싶은 즐기고 싶은 농구를 하고 싶어요.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NBA드래프트를 지원해 볼 거예요. 실패하면 또 하부리그에 도전할 거예요. 농구를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면 길거리 코트라도 상관없어요.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이런 저를 보면서 즐거워하고 감동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럼 제게도 많은 힘이 될 것 같아요.”

 

 

 

NBA에 도전한 한국 선수들

전 세계 농구선수들의 꿈의 무대인 NBA(National Basketball Associa tion). 하지만 한국인이 NBA에 도전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국내 선수들은 대부분 KBL(Korean Basketball League)을 꿈꾸기 때문이다. 농구전문미디어 점프볼 정지욱 기자는 “국내 선수들은 NBA에 도전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며 “국내 선수들의 입장에선 성공도 보장되어 있지 않고 대우도 훨씬 안 좋은 NBA에 도전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NBA에 도전한 국내 선수로는 하승진 선수와 방성윤 선수 단 두 명뿐이다.
하승진 선수(전주 KCC)는 공식적인 NBA 무대를 밟은 유일한 한국인 선수다. 2004년 NBA의 마이너리그 격인 ABA (American Bankers Association)에 머물던 하승진 선수는 NBA 드래프트에서 46위로 포틀랜드에 지명됐다. 미국으로 건너간 지 1년, 입단 6개월 만에 일궈낸 성과였다. 하지만 별다른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하고 4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하승진 선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실전 경험이 부족했다”며 “국내 리그로 복귀하는 것은 힘든 결정이었다”고 복귀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D리그(NBA Development League)는 15개의 팀을 보유한 NBA 공식 하부리그다. 많은 젊은 선수들이 NBA 진출을 위해 1,2년간 머무는 곳이다. D리그에 도전한 한국인 선수로는 연세대 출신의 방성윤 전 농구선수가 있다. 2002년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병역을 면제받은 방성윤 선수는 2008년 D리그에 도전했다. 드래프트 3라운드 10순위로 리노 빅혼스에 입단한 방성윤 선수는 식스맨으로 괜찮은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4경기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음식, 언어, 문화의 벽을 넘지 못한 탓이었다. 결국 2010년 SK와 재계약에 성공했지만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2011년 전격 은퇴선언을 했다.

 


이대성(23)= 김해 가야고 농구부에서 선수활동을 하다 삼일상고의 스카웃 제의를 받아 수원으로 전학했다. 빼어난 외모 덕분에 남들보다 인기가 많았다. 여고생 팬들의 선물공세가 끊이지 않았다. 같은 청소년 대표였던 유병훈, 장재석, 임동섭, 김현수와 함께 중앙대 사회체육학과 09학번으로 입학했다. 청소년 대표 5인이 한꺼번에 중앙대에 스카웃되기는 드문 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못다 이룬 꿈을 위해 3학년이었던 2011년 중앙대를 휴학하게 되고 NBA 공식 하부리그인 D리그에 도전했다. 비록 D리그 드래프트 명단에 이름을 올리진 못했지만 미국 프로리그에서 뛰는 그날까지 계속 도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대성은 그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에게 “지금은 나만 행복하지만 곧 같이 행복해질 수 있는 시기가 올 것이다”라고 말한다. 도전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대성 선수. 그의 도전이 기대된다.

 

 


오대세우스, 그가 즐겨 읽는 책은?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는다던데.
“자기계발서는 거의 매일 읽어요. 농구부 후배들에게 추천할 수 있을 정도에요. 너무 많이 읽어서 자기계발남이 됐어요(웃음).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책의 내용이 신선해서 시키는 대로 잘 따라했죠.”
-언제부터 읽기 시작했나.
“고등학교 때부터 읽기 시작했어요. 유명한 스포츠스타가 쓴 책부터 시작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두루 섭렵했어요. 하지만 읽다보니 그 내용이 그 내용이더라고요. 항상 같은 맥락이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답은 내 안에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어요. 이제야 나를 보게 된거죠.”
-답이 자신 안에 있다니?
“중앙대 휴학, D-리그 도전, BYU 편입을 하기까지 수천, 수만가지 고민을 했어요. 그 답을 책에서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답은 내 안에 있더라고요. 내 안의 나의 이름도 지었어요.”
-이름이 뭔가.
“오대세우스에요. 오딧세우스인데 제 이름이 이대성이니 오대세우스로 정했어요. 매일 아침 오대세우스와 대화를 해요. 대화 주제는 그 날의 힘든 일이나 고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것이에요. 휴대폰 메모장에 대화내용을 써놓기도 해요. 오대세우스가 써주는 것처럼 내 고민을 내가 해결하다보면 정말 해결이 되요. 웃기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진짜에요.”
-제일 감명 깊게 읽었던 자기계발서는 뭔가.
“자기계발서보다는 소설 『연금술사』가 제 인생을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연금술사에서 보면 주인공이 자기 자신을 찾으러 길을 떠나요. 자기가 갖고 있는 생계수단과 욕심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부분을 읽고 나서 중앙대에 미련두지 않고 NBA에 도전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근데 책에서 보면 결국 보물은 떠나기 전 그 자리에 있었어요(웃음). 결말이 좀 찝찝하긴 하지만 제 스스로 책의 결말을 지웠어요. 나머지 결말은 제가 새로 쓸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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