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 빽빽한 시간표
대장정이 시작됐다. 백은영씨(연극학과 3)의 시간표는 빽빽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4시간짜리 수업 두 개가 연달아 있었다. 그녀는 시놉시스 발표 준비를 해야 한다며 인파를 뚫고 아트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17:00 수업 끝, 다시 시작
수업을 마치고 아트센터에서 나온 그녀는 기진맥진한 상태. 이때까지 그녀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특별한 일정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18:00 진짜 하루는 지금부터
혜화역 2번 출구 앞, 사람들의 들뜬 표정과 달리 은영씨의 표정은 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가 발걸음을 재촉한 곳은 혜화동중앙대학교 연극예술원.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계단을 내려오며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음향기기 앞. 검은 칸막이로 가려져 있어 관객들 눈길은 한 번도 못 받아봤을 법한 자리였다. 스위치 온. 은영씨가 그 공간에 숨을 불어넣었다. 이제 은영씨의 진짜 하루가 시작됐다.


 18:20 기계 이상 무
조연출인 그녀의 손을 거쳐야 할 기계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녀는 연극에 필요한 모든 기계를 다뤘다. 무대를 한 바퀴 돌며 음향기기, 에어컨, 스피커, 배우 동선 램프에 불을 켜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밤사이 기계에 이상이 없었는지 체크하기 위해 노래를 틀었다. 경쾌한 소리가 차가운 무대의 정적을 깼다. 음악 이상 무.
다음 확인 대상은 무전기였다. 무전기로 말소리가 제대로 들리는지 체크했다.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 그녀는 무전기 사용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들립니다” 소리가 무전기에서 들렸다. 무전기 이상 무.


 19:00 대본은 내 머리 속에
배우들이 하나 둘 무대로 모였다. 강아지 역을 맡은 배우가 갑자기 네 발로 걸으며 왈왈 소리를 냈다. 옆에 있던 한 배우도 허공에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도 모자라 덤블링을 넘더니 갑자기 무대를 뛰어다녔다. 배우들은 천진난만한 시골아이들을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유난히 몸동작이 커 미리 몸을 풀어야 했다. 슬슬 무대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개새끼!” 배우들 옆에서 무대를 정리하던 은영씨가 갑자기 말을 내뱉었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대사야. 대사~(웃음)” 가만 보니 은영씨는 아까부터 배우들이 하는 대사를 똑같이 따라하고 있었다. 어떻게 대사를 다 외웠느냐는 질문에 “배우들은 남의 대사는 잘 몰라. 그런데 난 대사를 다 알아야 해. 게다가 많이 보다 보니 저절로 외워지기도 했고”라고 말했다.

 
 19:20 최고로 모십니다
“관객입장 몇 분 전이에요?” “관객입장 20분 전입니다.” 카운트가 시작됐다. 이미 무대 밖은 관객들을 위한 준비가 모두 끝난 상태였다. 바닥은 윤이 나게 닦여 있었고 벌써 연극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의자에 앉아있었다.
은영씨도 바빠졌다. 무대 앞뒤를 오가며 소품을 준비했다. 편지지를 만들고 배우가 마실 물을 준비했다. 디테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은영씨는 편지지에 대사를 자세히 적었고 물통에 ‘김이 나게 뜨겁지만 마실 수 있는’ 물을 떠놓았다. 누구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부분이지만 관객들이 극에 몰입하게 하기 위해 빠트릴 수 없는 부분이었다.


 19:45 실수는 안돼
“관객입장 5분 전입니다” 은영씨의 말에 공연장은 분주해졌다. 배우들도 분장실로 들어가고 은영씨도 이어폰을 끼고 음향기기 앞에 앉았다.
무전기에서 “관객입장 시작하겠습니다”란 말이 들리는데 “은영아! 은영아!”하며 누군가 어디선가 다급하게 은영씨를 찾았다. “여기 문 안 막혔어!” 급하게 무전기로 “관객입장 미뤄주세요!”라는 말과 동시에 은영씨가 검은 테이프를 들고 관객석 위를 날랐다. 무대 오른쪽에 위치한 문의 빈틈 사이로 바깥 불빛이 새어들어 오고 있었던 것. 테이프로 막지 않으면 불빛 때문에 관객들의 관람을 망칠 수도 있었다. 관객석과 무대를 불과 몇 초 사이 다녀온 은영씨의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다. 작은 실수였지만 관객의 집중도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은영씨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무전기를 다시 입에 댔다. “관객 입장 시작할게요.”

 

 20:00 막이 오르고
만석이다. 다행이었다. 연극은 관객으로부터 피드백이 바로 이뤄지기 때문에 극의 흐름을 크게 좌우한다. 관객의 수가 많아 웃음소리가 크게 날수록 배우들은 더욱 신이 나고 극의 호흡도 탄력적으로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객석이 드문드문한 날에는 전체적인 흐름이 쳐져 긴장감이 떨어지곤 한다. 그럴때면 뒤에서 지켜보는 조연출의 마음은 안타깝기만 하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걱정은 덜었다며 만족스런 미소를 띠었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은영씨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조금 전의 실수로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귀에 꽂은 이어폰 소리에 집중하며 개막을 기다렸다. 무대 암전. 배우의 기침소리로 공연의 막이 올랐다.


 20:30 무대 뒤 이야기
가만히 무대를 보는 관객과 달리 은영씨의 손은 바빴다. 버튼을 누르고 볼륨을 조절하고 영상을 틀었다. 음향실수는 관객 누구나 금방 알아차리기 때문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했다. 집중력을 요하는 시간이었다. 음악이 배우의 대사 중간에 들어가야 하는지 끝에 들어가야 하는지 등 세세한 부분을 신경써야 했다. 무대와 기기를 번갈아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처음으로 마음을 여는 장면에서 화사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볼륨을 높이자 공연장의 분위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때 관객석 뒤로 빼꼼히 문이 열렸다. 무대 뒤 배우들은 숨을 죽여 조용히 걸어 자신이 나가야 할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목을 축이고 옷 매무새를 다듬고 있었다. 편안히 공연을 감상하는 관객과 달리 연출가와 배우들은 초긴장 상태였다.


 21:15 나만 아는 실수
조명이 켜지고 관객들의 박수가 터져나온다. 은영씨가 이어폰을 빼며 이제야 시원하게 웃었다. 관객들이 나가고 한 배우에게실수를 털어놓는다. 연극 시작 부분에 비춰야 할 영상을 깜빡하고 보내지 않았던 것. 은영씨는 조마조마해 하며 말했지만 배우는 “나는 몰랐지. 내 뒤에 영상이 있었으니까”하고 웃는다. 조마조마해 하던 은영씨는 “말하지 말걸!”하고 웃는다. 작은 실수였지만 자신의 실수가 배우들의 노력에 누가 될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었다.


 21:25 스위치 오프
“집에 갑시다~” 흥얼거리며 전원을 켠  순서대로 장비를 다시 껐다. 관객들의 온기가 가시지 않은 무대에 은영씨 혼자 남았다. 일주일 중 6일을 이곳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 그녀에겐 연극은 일상이고 현실이었다. 하지만 관객에겐 한 순간의 특별한 기억이 될 터. 오늘도 90명의 사람들에게 추억 하나를 만들었다는 마음에 기쁜 마음으로 공연장 조명을 껐다. 스위치 오프.
 

백은영(연극학과 3)
 학교에선 평범한 문학소녀지만 매일 저녁 그녀는 조연출로 변신한다. 작년 5월부터 연극 ‘소라별 이야기’의 조연출로 지내왔다. 그녀를 대신할 사람이 없어 아파도 극장에 와야 한다는 그녀.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만 공연 전 ‘실수하지 말자’를 되새긴다. 그녀의 실수 하나는 관객과 배우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녀는 늘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자 그녀는 ‘거의 다’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 그녀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녀는 공연 중 음악과 영상을 틀고 각종 기계를 관리한다. 큰 소품부터 작은 소품까지 준비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다. 극단에서 기획자와 스텝간의 연결을 돕고 각종 문서 작업도 도맡아 한다.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관객이다. 학업와 조연출을 병행하느라 늘 바쁘지만 관객들의 박수소리에 매일 힘을 얻는다. 오늘도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공연장에 간다.


 
  연극 ‘소라별 이야기’는 학교 제작 공연 중 하나로 제작됐다. 외부 극단의 손을 거쳐 2월부터 다시 공연이 재개됐다. ‘소라별 이야기’는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가면극이다. 바보 같지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 6명과 늘상 욕을 하지만 인정많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공연은 평일 8시, 주말 4시에 시작하고 월요일은 없다. 관람료는 일반 2만원, 학생 1만원이며 10인 이상은 8천원이다. 공연은 4월 7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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