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부문 당선 : 양소연(서울대 2학년)
  • 중대신문
  • 승인 2011.11.2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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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사십오 분

열차 안에서의 시간은 일상의 시간의 흐름과는 별개로 진행된다.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고,
다른 교통수단처럼 그것이 바뀌는 변수도 생기지 않는다.

열차 안에서의 시간은 일상의 시간의 흐름과는 별개로 진행된다.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고,
다른 교통수단처럼 그것이 바뀌는 변수도 생기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처럼 맞춘 커플링을 이별하는
누구나처럼 손가락에서 뺄 것이다. 누구나처럼 이런 저런 기억들을
주섬주섬 꺼내보기도 할 것이고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해 보기도 할 것이다.

 

  사람을 떠나보내는 데에는 몇 가지 방법과 기술이 있다. 첫째는 현실 부정.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당장 다음 순간에라도 다시 덥석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는 것. 해리 포터에서는 9와 4분의 3번이라는 보이지 않는 승강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눈을 감고 충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나의 평소 신조이기도 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눈을 뜨고 충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나는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 내가 폭사한다면 허공에 흩어지는 나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지켜보고 싶다. 기차가 나를 향해 돌진한다면 최후의 순간까지 기관사의 눈을 응시할 것이다. 자기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면 총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너는 말했었다. 총알의 속도가 음속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몹시도 애석한 일이다. 나는 곧잘 종이의 여백에 낙서하듯 적어 넣곤 했다. 그 모든 순간 앞에 눈을 감지 않겠다고. 그래서 우리는 첫 번째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두 번째. 나를 못 잊어 힘들어하지 않도록, 상대에 대한 나름의 배려로서 최대한 모질게 대하기. 세상에 이 정도로 바보 같은 짓은 또 찾기 어려울 것이다. 과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더 쉽게 잊을 수 있을까? 나는 항상 너에게 말해왔다. 네가 나에게 어떻게 하느냐보다 네가 어떤 사람이냐가 더 중요하다고. 너의 불변의 본질을 좋아하는 것이니까 네가 잘해준다고 더 좋아지고 내게 소홀하다고 미워하게 되지는 않는다고. 그것은 우리가 칼날 같은 사람들이라 아무래도 서로에게 차가울 수밖에 없음에 괴로워하던 너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기도 했고, 내가 천신만고 끝에 얻어낸 해답이기도 했다. 그리고 진실. 기만하지 않으려고, 나 자신도, 너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덜 기만하려고 나는 몹시도 노력했다. 그런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진실이다. 그러니 모질게 대한다고 뭐가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며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기만이기에 이는 최악의 선택이다. 그래서 두 번째 대안도 폐기.
 

  세 번째… 매달리기? 잠깐, 이것은 우리의 경우에는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항목이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버려져야 상대가 매달릴 기회라도 가져볼 수 있는 것 아닌가. 글쎄, 얼마쯤은 무의식적으로 내가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너도, 나도 너무나 선명하게 잘 알고 있다. 자존심 어쩌고 하지만, 사실 매달릴 수 있다면, 그냥 가지 말라고 애원 따위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도대체가 아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저 사탕을 빼앗긴 아이처럼, 신을 부르짖는 광신도처럼, 내게 내가 원하는 것을 내놓으라고 더없이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요구를 하고, 때로는 내가 대신 이것을 포기하겠다, 짐짓 조건까지 내걸어 거래처럼 보이게 포장한 구걸을 한다면, 결국 결정은 상대가 내리는 것이니 나는 무력할 것이다. 그렇게 무력하고 결정권이 없는 편이 훨씬 마음이 가벼울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최근에서야 깨달은 사실이다. 더없이 주체적이고 싶었지만, 어차피 그 또한 나 자신의 틀과 스스로 형성한 규범에 갇히게 된다는 점에서는 종속되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끊임없이 내 몸을 감싸고 소용돌이치는 그 모든 가능성, 가능성, 가능성들을 계산해내느라 신경이 타버린 필라멘트처럼 툭툭 끊어져나가는 것 같았다. 대중은 소름끼치도록 한심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들이 채택하고 있는 삶의 방식 중에는 꽤나 현명하게 환경에 적응하고 최선의 상태로 진화해온 흔적들이 있다. 대부분이 타율적으로 살아가는 것도 어쩌면 그런 편리한 진화의 결과, 즉 최적의 선택이리라.
 

  그러나 나는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한다. 언제나처럼 조금 거리를 두고 너를 본다. 이지적이고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되뇐다. 일상에서 발음하기에 조금 버거운 이지적이라는 단어는 네가 좋아하는 단어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벌써부터 너에 대해 과거형을 쓰는 연습을 해본다. 너에게는 지금 내 모습이 이지 따위와는 매우 거리가 멀게 보인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최소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계속 생각은 하고 있다. 연인들의 언어는 어차피 다 너무도 유치하다. 결코 이지적일 수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제 막 이십대에 접어든 자들의 어설픈 연애라면 말할 것도 없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자신을 당대 최고 지식인의 반열에 들기 직전에 있는 사람쯤으로 여기는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언어로 말을 걸 수 없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모조리 환각, 장난, 피상적인 것, 허위 등으로 규정했다. 죽어도 결혼은 하지 않는다와 출산은 하지 않는다가 각자의 신념이었으며 연인들이 영원을 말하는 것은 연인이라는 관계는 다른 어떤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끝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섬뜩한 특성을 지녔기에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려고 자기기만을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자기야 사랑해, 따위의 말을 주고받는 젊은 연인 중 과연 몇 퍼센트가 그 말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을 해보고 내뱉는 것인지 그 수치에 대해 별로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서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런 말을 건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조차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도 모른다. 너의 사고 과정을 내가 조금이라도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나와 달리 너는 간혹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한 번도 믿지 않았다. 어디선가 사랑한다는 말에 대해서, “한숨을 소리로 하면 그런 말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하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아마 네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에서였을 것이다. 꼭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니 믿는다는 개념에는 생각이 미치지도 않았다. 너는 말했고, 나는 그저 그 자리에서 너의 눈을 보며, 듣고 있었다. 너무나도 복잡한 이유에서 비롯된 끔찍한 애잔함을 느끼며.

 

  그래서 결국 우리가 택한 방법은 무엇인가. 이도저도 아닌 것이라 부르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아니면 셋 다 아니라하면서 사실 셋을 조금씩 섞어 모두 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약간은 매달리는 듯한 태도를, 너는 약간은 무신경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약간은 연극을 하듯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기도 하다. 플랫폼은 낯설다. 기차에 처음 오르는 사람처럼, 어느 발부터 떼어야할지 모르겠다.
 

“잠깐만.”
 

  나도 모르게 너의 왼쪽 팔을 붙잡고 멈춰 선다. 제발 멈춰라, 시간아. 속삭인다. 우리는 참 많은 것을 시간의 탓으로 돌리고 그를 원망한다. 저주를 퍼붓는다. 그것은 더없이 편리하다. 왜 멈춰주지 않느냐고, 왜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은 쓸어가 버리고 털어버리고 싶은 것들은 물결 뒤에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냐고. 그렇게 마음껏 소리를 지른다. 편리하다. 문득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가 내 머리를 가득 채운다. 쏴아. 지나간 자리에는 무엇이 남았는가. 결국 시간은 무고한 희생자일 뿐 모든 게 나의 문제임을 직시한다. 이런 말은 너무도 상투적이어서 나는 소름이 끼쳐 몸을 떤다. 시간의 주관성이라니, 이런 주제는 일곱 살 무렵에 ‘아, 왜 놀이공원에 있을 때는 하루가 짧은 것일까’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다음 단계로 나아갔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왜 네가 관련되면 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세상에 지금 막 태어난 사람처럼 미숙해지는 것인가. 어째서 신호등이 붉게 바뀌어버린 낯선 도시의 대로 한복판에서 동서남북도 분간하지 못한 채, 내 옆으로 물을 잔뜩 튀기며 지나가는 회색빛 자동차들의 거친 엔진소리를 들으면서 퍼붓는 빗속에 어쩔 줄을 모르고 서있는 것만 같이 되는가. 연애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치기어린 짓이다. 지난 일 년 간 수천 번도 넘게 홀로 중얼거린 이 생각이 다시 한 번 반복재생된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정말 마지막이리라.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기다린다. 어제 우리는 마지막 통화를 했고, 너는 물었다.
“나 내일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어땠으면 좋겠어?”
나는 대답했다.
“가장 강현석 같은 모습. 가장 너다운 모습으로 있어.”
“정말?”
 

  네가 확인하듯 물었다. 가장 강현석다운 모습이 그리 바람직한 상은 아니라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정말이었다. 보통은 연인을 잃고 나면 그 사람 자체가 사라진 것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늦은 밤 전화를 걸어주고, 언제나 함께 길을 걷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 사라져 갑자기 자정이 넘도록 다정한 문자 한 통 오지 않고 주말에 할 일이 하나도 없어졌을 때 오는 그런 단순한 허전함 때문에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의 존재보다도, 차갑고 불편하고 날카로운 너, 너란 사람 자체를 더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나는 이 두 가지를  놓고 항상 고민해왔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를 좋아해주는, 심지어는, 나를 좋아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곁에 있어주는 누군가의 존재를 좋아하는 것이면 그것은 너무나 큰 범죄가 아니겠는가. 너는 그 둘을 분리할 수는 없는 것이라 말했었다. 그러나 너도 나도 서로의 견해에 설득된 적은 별로 없다. 이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까지도 고민한다. 그러니 제발 내가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 너 자체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그제야 너에게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너의 동공이 텅 비어있는 것만 같다. 너의 시선은 허공을 떠돈다. 결국 나는 아무런 다른 동작도 취하지 못한 채 그저 숨을 한 번 들이쉬고 그대로 기차에 오른다. 9호차 13 C와 D. 영원히 이 기호들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너보다 앞에 서서 9호차의 문을 연다. 은색 손잡이는 마치 목이 꺾이듯 옆으로 비틀리고, 쉬익, 공기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문은 옆으로 비켜난다. 다시 한 번 멈춰서고 싶다. 아무도 없다면, 이 문이 저절로 다시 닫혀버릴 때까지 문에서 한 걸음쯤 떨어져 선 채로, 망연히, 기다리고 싶다. 그러나 줄지어 몰려드는 사람들에 떠밀려 나는 지체 없이 9호차 속으로 흡입된다. 이 문턱을 넘는 순간, 여기서부터는 하나의 독립된 세계가 존재할 것이다. 희곡으로 치자면 제 3막 정도, 음악이라면 최종악장쯤 되는 그런 독립되고 단절된 세계. 우리는 이미 몇 달 전부터 ‘지금부터는 에필로그’라고 규정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에필로그라는 단어를 쓴 것은 나였고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튼 그때부터 에필로그였다면, 지금 이 새로운, 진정한 최후인 이 장면은 무엇이라 불러야 한단 말인가. 
 

       

  너는 내게서 조금 떨어져서 뒤따라 들어온다. 에필로그가 시작되기 전 내가 ‘내 안의 네가 죽어버렸다’ 라고 선언했을 때, 그 상태로 나란히 길을 걸어야했을 때, 너는 내 눈을 볼 수도 없었고 가까이 올 수도 없었고 아무 말도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고 했다. 지금도 그럴까. 아니,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것 같다. 아침에 나를 보자마자 너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적인 얘기들을 늘어놓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거리낌 없는 말투로 날씨에 대해서, 지나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장 너다운 모습으로 있겠다는 어제의 약속을 따르려는 어리석은 노력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너 혼자만의 이유, 지금 이 기차가 너를 데려다 놓으려는 그곳, 네가 잠시 후 마주해야할 그 무목적성의 시간들에 대한 공포나 혐오에서 비롯된 조바심을 숨기려는 것이었을까. 어느 쪽이건 혹은 제 3의 이유이건 너의 그런 태도는 상당히 부자연스러웠다. 뭔가 불평할 것이 눈에 띄지 않으면 너는 지금처럼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껏 경험해본 것 중 가장 큰 것일지도 모를 공허함을 떠안고 텅 빈 시선으로 아무런 의지 없이 침묵하는 것이 이 순간 너의 진짜 모습일 터였다. 그런 와중에 강현석답게 있으려는 너의 노력은, 그러한 침묵과 고요의 흐름을 끊고 간헐적으로 불쑥 튀어나왔는데, 그것은 전체적으로 전혀 균형을 이루지 못해 무척이나 우스꽝스러웠다.  
 

     
 

  그럴수록 나는 네가 너무 애처롭다. 너는 내가 너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었다. 맞다. 너는 너무 애처로운 사람이다. 그렇게 별 의미도 없는 일에까지 힘들게 애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약속 따위 지키지 말라고. 내가, 뭐랄까, 그래, 나 같은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은 그 정도는 감싸줄 수 있지 않겠니. 최소한 그 정도로는 너에게 따뜻할 수 있지 않겠니. 그렇게 너에게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나도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다. 일상적이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은 오늘, 금지되어 있는 것일까. 나는 오늘의 규칙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우리가 어떤 국면에 와 있는 것인지. 존속인지 종결인지. 경계선의 이쪽인지 저쪽인지. 무엇이, 어디까지 허용되어 있는 것인지. 너의 문은 몇 도의 각도만큼 열려 있는 것인지. 혹은 이미 내가 그 문에 손을 대는 순간 경보기가 울리게 되어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나는 다른 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만일 그럴 수 있다 해도, 특별한 의미나 간절함이나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 작은 음절 하나라도 발음할라치면, 울음이 잘못 삼킨 폴로 사탕처럼 목에 걸려 있다가 갑작스레 치밀어 오르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시도도 할 수 없다. 제발, 빌어먹을, 마지막 순간에는 의연하자고 수도 없이 다짐했었다. 더 이상 우스워지는 것도, 유치해지는 것도 싫으니, 이성적으로 담담하게 -사실 내가 더 적합하다 생각하는 표현에 따르자면, 품위 있게- 보내자고. 가능하기만 하다면야 꽤 좋은 이론이었다. 그러나 실현가능성의 측면에서는 그만한 헛소리도 없었다. 현실 속의 나는 마냥 계속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하염없이 울고만 싶지 않은가. 너는 일상, 친구, 나, 자유의지, 시간, …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 같다 말했다. 분명 내 것보다 클 너의 그 상실감을 들어주고 다독여줘야 하는데 나는 지금 나의 세계가 부서져 내리는 것을 보는 사람 마냥 그렇게, 그렇게 하나하나의 파편들을 움켜쥐며 울고만 싶다. 가끔은 사람들이 내게 강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일까. 간혹 수긍하게 될 때도 있기는 했다. 나는 분명 원하는 것을 악착같이 추구했고 치열하게 살지 않는 것은 생의 모든 저열함 중에서도 가장 저열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을 원칙이라 불렀고 내 나름대로는 그 원칙을 꽤나 잘 지키고 있다 믿었다. 너 역시 생 앞에 열렬한 사람이었다. 너는 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을 대하는 태도가 진정으로 열렬한 것과 그저 행동이 분주한 것에 구별을 두었다. 나는 너를 만나고 나서 내가 혹시 너의 분류 중에서 후자에 속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의 기준에서는 열렬하였고, 신념과 원칙을 위해서라면 누구보다 강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의 나의 태도는 뭐라 설명해야 할까. 원칙도, 의무도, 이성도, 컵 속에 떨어진 각설탕처럼 서서히 그 모서리를 뭉뚱그리며 녹아내리고 있다. 각성은 간 데 없고 시야가 흐린 것은 그저 시간이 일러 잠이 덜 깬 탓만은 아니다.

 

  너는 아직도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고 보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네가 기차에서 내리는 것을 우리의 마지막으로 만들 계획이다. 그 뒤에 너는 혼자 플랫폼에 내려서고, 어쩌면 나는 창문으로 네가 역사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익숙한 너의 걸음걸이를 지켜볼 수도 있을 것이다. 너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안다. 너는 역사를 빠져나가 혼자 머리를 자르러 가고, 인간이 자유의지를 어디까지 억누를 수 있는지 그 극한을 시험하며 훈련소 입구로 혼자서 터덜터덜 걸어갈 것이다. 그야말로 빈손으로, 학교도 휴학하고 자취방도 정리하고 휴대전화도 정지하고 인간관계도 정리하고 네 말대로 머릿속의 가장 사소한 번뇌까지도 전부 정리하고 너를 구성하던 모든 것을 비워버린 채로. 아무 것도 없이. 나는 그런 너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뒤에는, 너의 마지막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뒤에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동작을 취하며 어떤 자세로 이 자리에 앉아있을 것인가. 어떤 종류의 감정을 느낄 것인가. 무엇을 다시 할 수 있을 것인가. 전혀 상상할 수가 없다. 그 이후에도 내가 존재하기는 할까? 느닷없이 아인슈타인을 떠올린다. 중력이 엄청나게 뭉쳐있는 부분이 있으면 시공간은 그 주위로 구덩이를 만들며 휘어진다. 너의 부재는 내게 너무도 큰 영향력을 발휘해 시공간이 왜곡되고 나는, 이를 테면, 초끈의 반대쪽 끝에 있는 우주로 빨려 들어가 버리고 선로는 휘어져 기차가 청룡열차처럼 공중회전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은 나를 점점 더 비이성적인 공상 속으로 밀어 넣는다. 다른 세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 모든 것이, 기차 창문에 달린 커튼의 묵직한 감촉도 내가 좋아하던 열차 내의 헤이즐넛 커피의 온도도 그 커피를 사면 따라 나오는 잎사귀 모양의 과자의 질감도 플랫폼 가장자리에 동글동글 튀어나온 노란색 안전판의 색깔도 선로 위에 닿는 바퀴의 진동도 종착역에 도착하면 나오는 익숙한 노래도.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어진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벌써부터 시공간은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다. 13번 자리 앞에 닿는다. 나는 14번 자리 쪽으로 비켜서면서 너를 창 쪽으로 들어가 앉게 한다.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너는 짧은 순간, 허망한 시선을 들어 내 눈을 한 번 쳐다본 다음 자리에 천천히 앉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왠지 모르게 ‘무너져 내린다’라는 표현을 떠올린다. 자꾸만 내 감정을 너에게 투영하지 말자. 고개를 젓는다.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서로 말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드물다. 창밖으로는 민트색의 옅은 대기가 흐르고, 새벽의 냉기가 채 가시지 않아 늦여름치고는 조금 낮은 기온 탓인지 열차 옆에 서있던 젊은 역무원이 몸을 조금 움츠린다. 객실 안은 렘수면으로 조각난 잠이 발목에 감겨 붙는 것을 억지로 떼어내고 무거운 발을 여행가방 마냥 끌고 집을 나온 사람들의 피로가 복도 바닥에 조금 깔려 있고, 그 위로 명료한 고요가 자리하며, 좌석의 머리 부분 쯤에는 누군가가 열차에 오르기 직전 역에서 샀을 도넛의 달콤한 냄새가 희미하게 스친다. 앞자리의 남자가 신문을 펼치는 소리가 유난히 강하게 귀에 꽂혔으나 곧 객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에 뒤섞여 카페모카에 뿌린 시나몬파우더처럼 분간할 수 없는 맛으로 잔 안에 작은 소용돌이만을 남기고 자취를 감춘다. 너는 창밖을 바라볼지, 내 쪽을 바라볼지, 아니면 앞을 볼 지 결정하지 못한 사람처럼 애매하게 앉아있다. 앞좌석의 그물망 속에 들어있는 코레일 잡지의 번들거리는 표지를 노려보는 듯도 하다. 나는 체한 것처럼 속이 불편해짐을 느낀다. 인쇄한 좌석표의 여백을 찢어 작게 접기 시작한다. 반, 반의 반, 반의 반의 반…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또각또각 굽 소리를 울리며 통로를 지나간다. 우리가 사귀기로 했던 날,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내 앞에 놓인 젓가락 포장지를 집어 들고 작게 접기 시작했다. 평소에 나는 강박증이 있으면 있었지 절대 물건을 가지고 반복적인 행위를 하면서 그런 것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네 앞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예외였다. 너는 나를 보고 “왜 그래, 초조해 보인다”라고 했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그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 포장지를 내려놓고 말했었다.
“내 인생이 원래 초조해.”

 

  어두운 붉은색의 큰 가방을 든 중년의 여자가 신문을 보던 남자 쪽으로 걸어온다. 복도 쪽 좌석에 앉아 있던 남자는 문득 눈을 들어 여자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자는 가방을 선반 위에 올리려고 한다. 남자는 신문을 자리에 구겨 놓고 손을 뻗는다. 여자가 “아니에요, 괜찮아요”라고 말한다. 여자가 발을 조금 돋우고 가방을 올려놓는다. 남자의 머쓱해진 손길은 허공 어딘가를 휘젓다가 커다란 붉은 가방의 모서리에 살짝 닿기만 한다. 저것은 호의일까, 나는 생각한다. “감사합니다” 여자는 말한다. 저것은 대화일까, 나는 생각한다. 남자는 통로로 비켜서고 여자가 창가 쪽 자리로 들어선다. 여자의 갈색 긴 치맛자락에 작게 그려진 문양이 왠지 모르게 각인되는 것을 느낀다. 거기에는 아직도 바깥에서 묻어온 차갑고 날것인 공기가 조금 서려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맙소사.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는다. 출발해버렸다. 지난 몇 달 간 우리는 앞으로 남은 날이 며칠인지, 몇 번을 더 만날 수 있는지, 몇 분의 통화를 하고 몇 통의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는지 계산하곤 했다. 이제 남은 것은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그 순간들뿐이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곳은 열리지 않는 타원의 긴 창문으로 단절된 새로운 공간이 아니던가. 그러나 열차는 출발해버렸다. 아주 서서히, 전혀 호들갑스럽지 않게, 움직이는 듯 마는 듯 조용히 미끄러지면서. 플랫폼의 모습이 걸레로 닦아내버린 듯 뒤로 밀려나며 사라진다. 나는 문득 모래시계가 뒤집어지고 가늘고 고운 푸른색 모래가 눈물처럼 천천히 흘러내리는 장면을 떠올린다. 두꺼운 초록색 커튼을 당겨 바깥의 모습을 가리고 싶다. 움직임을 덜 느낀다면 시간의 흐름도 부정할 수 있다는 듯이. 그러나 나는 왠지 네 쪽으로 손을 내밀 수가 없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곧이어 노랫소리와 함께 출발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그 모든 음절들을 하나도 분간할 수 없다.
 

  나는 너를 곁눈질한다. 체한 것이라기에는 조금 넓은 범위에 통증이 느껴진다. 심리적인 통증. 가상의 통증. 너는 이것을 환각이라 하려나. 말을 해야겠다. 무슨 말을 할까. 기념비적인 명대사라도 던져야 하나.
“나 지금도 초조해 보여?”
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아니.”
“왜 아니야, 나 지금 초조한데.”
“지금은 다른 것들, 초조함보다 더 중요한 것들에 가려져버렸어.”
 

 

  더 중요한 것들. 이것은 의미 있는 말이다. 네가 아무리 공허한 시선을 하고 있어도 나를 보고 있다는 말이다. 오늘 네가 처음으로 날씨나 타인에 관한 것이 아닌 뭔가 내용이 들어있는 말을 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그러나 너는 한 손을 들어 모자를 더 깊게 눌러 쓰더니 13D의 그 초록색 좌석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듯이 더 깊숙이 앉는다. 그야말로 가라앉는 것 같다. 나는 침몰하는 상선을 바라보듯 안타깝게 너를 지켜본다. 이것은 흔한 일이리라. 군입대도 이별도, 대중가요 가사에 흔하게 등장하는 그런 아주 일상적이고 뻔한 일이다. 너에게는 사람을 마리오네트로 만들어버리는 엄청나게 낯선 종류의 저주이자 갑자기 모든 것과의 연결을 끊어버리고 오직 너 하나만을 말 그대로 전쟁터에 던져 넣는 재난일지 모르겠지만 결국 이것은 그 유명한 노래가사에 등장하는 ‘집 떠나 기차 타고 훈련소에 가는 날’에 지나지 않는다. 너의 동아리 선배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건강이 최고라고,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다. 특별할 것은 없었다. 다시 돌아오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 것 같다는 공포도, 너뿐만이 아니라 너의 동기들 모두가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정말 참을 수 없게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떠난다는 것. 너와 나의 많은 시간들을 여기에서 끝내버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벌써 이 말 자체에서 상투적이고 대중적인 번잡함이 묻어나지 않는가. ‘너와 나의 많은 시간들’ 따위의 구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아무리 너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너의 상실을 큰 의미로 느낀다한들, 조금도 독창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고, 별 일 아니라고 위로하려는 의도로 하는 말이 아니다. 사실 나는 그렇기에 더 비참하다. 이렇게 혼란스럽고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심지어는 이 모든 것이 전혀 특별할 것도 없는,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가장 흔한 일에 불과하다니. 평범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부르짖던 너와 나에게 이 사실은 너무나도 모욕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는 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열차 안에서의 시간은 일상의 시간의 흐름과는 별개로 진행된다.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고, 다른 교통수단처럼 그것이 바뀌는 변수도 생기지 않는다. 바깥의 공간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반면 정작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은 더없이 정적이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꼼짝 않고 한 자리에 붙박여있다. 평소처럼 무언가를 하기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여백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하려 한다. 혼자 있으면서도 혼자 있지 않은 절반만 사적인 시간이다. 어차피 그다지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분주한 자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자유의 시간인 지도 모른다.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 플랫폼을 지나 역사 안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은 다시 점점 빨라지고, 사람들은 역을 나서 다시 생활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리라. 그러나 이 희귀한 시공간에 놓여있는 동안에는, 그저 멍하니 온갖 상념에 잠기는 것이 허락되는 것이다. 나 또한 소용돌이치는 나만의 생각들에 매몰된 채로 간혹 창문에 시선을 던진다. 기차의 속도는 시간만큼이나 빠르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이제 걸레로 닦아내는 것이 아니라 빗자루로 순식간에 쓸어버리듯 휙휙 지나가고 있다.
 

  시계를 본다.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 십여 분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지구 자전이 멈추기를 기도했으나 신이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나는 망연자실해진다. 고개를 푹 숙인다. 달리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체한 것 같은 느낌이 머리로 점점 올라와 뇌가 증발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내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너를 곁눈질한다. 모든 신경이 너를 향해 곤두서있다. 안테나가 있다면 과열되어 섬광을 번쩍이며 폭발해 버렸을 것이다. 나는 너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아니, 잡고 싶다. 네가 아닌 나를 위해서. 내가 지금 너무 초조하고 불안하고 슬프고 허탈하고 이 모든 조잡한 단어들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절벽에 내몰린 기이한 기분이라서. 네가 이런 나를 위로하려는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서. 그러나 무언가가 나를 막는다. 이런 주저함은 익숙한 것이다. 나는 벽을 쌓는 사람이다.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나는 언제나 한 걸음 물러서 있다. 사회성과 관련해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얻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남들과 있을 때 에너지를 소모하고 혼자 있을 때 재충전을 하는 부류다. 나는 전형적인 후자의 경우이다. 나는 그 누구의 간섭도 관심도 받지 않고 철저히 홀로 있을 수 있는 영역이 절실히 필요하다. 벽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경계 안으로 넘어오거나, 내게 충분히 혼자 있을 시간을 주지 않으면 나는 내 사고체계가 서서히 그 명료함을 잃어가며 마침내 가장 견고하지 못한 부분에서부터 하나씩 무너져 내리거나 뒤틀려버리는 것을 느낀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무슨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점차 불가능해진다. 그 상태로 좀 더 오랫동안 방치된다면 결국 내가 나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행위가 아닌 사고, 그것도 관계에서 파생되거나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것이 아닌, 타인에 대한 예의나 사회적인 의무에 대한 지각이 아닌, 철저히 나에 관한, 나로부터 비롯된, 어찌 보면 고립되고 독단적인 사고. 긍정적으로 들리게 표현해보자면 자기 고유의 본연적이고 순수한 사유 영역. 나는 그것에 대한 존중이 유난히도 절실한 사람이다. 관계는 말을 포함하는 행위로 구성되고 혼자 있는 시간은 사고로 이루어진다. 너는 사고를 무의미하다 하고 행위로 구체화된 것만이 실질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했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아마 이 부분이 우리 둘의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이리라. 행위는 부차적인 것이다. 사고가 선행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장되기 쉽다. 우리는 짧은 순간에도 수없이 생각과 다른 말을 하고 다른 행동을 한다. 이것이 악의적인 거짓이든 사회화의 결과이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혼자만의 사유 영역에서도 자기기만이 언제든 존재할 수 있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 빈도는 행위에서 가장과 기만이 차지하는 비중에는 한참 못 미칠 것이라 확신한다. 그렇게 나는 사고가 존중되고 포장되지 않은 순수한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이른바 고독의 영역을 필요로 한다. 생각보다 아주 많이.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도 나의 이런 필요는 보편적인 생활의 영위와 자주 충돌을 빚는다. 간혹 나는 사회적 관계 형성에 완전히 실패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문제가 되는 지점은 따로 있었다. 누군가와 연인관계를 형성하려 했을 때, 다른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가깝고 친밀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일 때. 그것은 내 능력 밖의 일임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네가 나와 같은 재료로 만들어지고 같은 공기를 숨 쉬는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 생각했기에 너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게 너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너였기에 더욱, 나는 벽을 허물고 다가가지 못했다. 이런 것이 나의 차가움의 근원인가? 미안해야 하는가? 모르겠다. 그렇게 분명한 사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함께 있는 내내 계속 모종의 죄책감 같은 것이 유령처럼 따라다녔고 그것의 일부는 분명 이 부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너를 더욱 불편하게 느끼게 해서 상황을 더 악화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가 아니라면 나는 지금처럼 고개를 돌려 자꾸만 너를 보고 너의 기분을 헤아리려하고 너를 이해하고 네가 나를 이해하기를 바라고 마지막 순간까지 곁에 있으려고 애쓰는 일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것, 보편적인 기준에서 보면 너무나도 부족한 이것이, 나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이끌림이었음을 너는 믿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남은 시간을 확인한다. 삼십팔 분.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느낌 탓인지 생수를 세 병째 비웠다. 자꾸만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기다릴게, 한 마디면 될 것을. 그러면 이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을 텐데. 더 이상 너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이 년의 시간을 혼자 보내기 싫어 다른 사람을 찾으려는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다. 둘 중에 누가 이런 말을 먼저 꺼냈는지 분간하기도 힘들다. 우리는 이것을 소리 내어 말하기 전부터 너무나 자명한 명제처럼 그냥 알고 있었다. 네가 멀리 가버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각자의 시간을 넘어, 이야기를 다시 이어간다는 것은 어딘가 잘못된 일이었다. 지금도 서로 먼저 마음을 열지 못하고,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내가 네게 의지하면 너는 절대 버틸 수 없을 것이라 단언하며 거리를 두는 우리다. 서로가 서로에게 말한다. “너는 세상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인간이다, 나 같은 사람은 너에게는 최악의 선택이다”라고. 그래서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임을 깨닫고 더 큰 자기혐오에 빠질 뿐이다. 그러면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내 안의 너는 죽어버렸다는 따위의 말을 한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네가 너무나 소중하다고, 너의 영혼을 이해하고 동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초월적인 이해나 동경에서 비롯된 애착 말고, 연인들 사이의 평범한 일들을 하고 평범한 말을 건넬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감정이 부족함을 느낀다. 결국 나는 미안해진다. 네가 따뜻한 사람을 찾고 평범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너도 그런 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내가 아니라면 조금은 더 나을 것이다. 이것은 무슨 희생정신 같은 것이 아니다. 그저 최소한 서로가 아니어야할 것만 같다는, 어쩌면 이것은 심지어는 상호파괴적인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아니, 좀 더 가볍게는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너와 나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그것은 여기까지로 충분하다는, 이성적인 판단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부터 몇 번이고 서로를 놓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 상실감, 그 공허를 감당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절대 놓아버리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을 믿지 않고 설사 그것이 가능할지라도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지금 놓아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놓을 수 없을 지도,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후에, 모든 것이 소모되고 가장 너저분한 감정들만이 남게 되었을 때, 가장 초췌한 모습으로 반사적으로 놓아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너는 아름다움을 궁극의 가치로 추구하는 사람이라 했다. 네가 말하는 아름다움에는 언제나 비극의 기운이 서려있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나는 아주 처음의 어느 날 일기장에 아름다웠으면 좋겠다고, 그렇지 못하다면 최소한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아름다울 수 있다. 아직은 그럴 수 있다. 내 안에 가장 찬란한 시간으로 그렇게 남아라. 심장이 터지든 사지가 찢겨 나가는 것 같든 이성이 우선해야한다. 그게 나의 원칙이다. 나는 너를 놓을 것이다. 이야기를 끝낼 것이다.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을 반드시 오늘 써내려갈 것이고 단호히 뒤표지를 덮을 것이다. 겉으로 내가 자꾸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닦아내고 있건 남은 시간이 줄어드는 것에 조바심이 나서 세상의 시간을 모두 다 삼켜버리려 들건 그것은 행위에 불과하다.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그렇다. 분명.

 

  앞자리의 남자가 보던 신문을 덮고 잠들어 있다가 부스럭대며 일어난다. 어느새 또 다른 역에 정차하려 하고 있었던가. 남자는 허겁지겁 서류가방의 지퍼를 잠그더니 한 손에 신문을 구겨 쥐고 문으로 향한다. 9호차에 탄 이들 중 이 역에서 내리는 것은 그 남자뿐이다. 갈색치마의 여자는 그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네지 않는다. 다음 역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이십 분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턴가 번갈아가며 서로를 거의 관찰하듯 쳐다보고 있다. 네가 미동도 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겨우 시선을 거두면 내가 고개를 돌려 너의 얼굴을 본다. 마치 억지로 더 선명히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기라도 한 듯이. 기차가 다시 출발하자 역무원이 과자와 마른 오징어, 음료수가 가득 담긴 카트를 밀고 지나간다. 그는 벌써 세 번째 이 통로를 오가고 있다. 11B에 앉은 남자가 옆에 있는 보이지 않는 일행에게 속삭이듯 묻는다.
“채린이 초코칩 쿠키 먹을래?”
한없이 여린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뒤따라 들린다.
“응, 아빠. 채린이 초코칩 쿠키 좋아.”
 

  어떻게 지금까지 그렇게 조용하게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의 목소리는 대여섯 살 정도밖에 안 된 것처럼 들린다. 남자가 과자 한 상자를 집어 들고 값을 치른다. 남자의 나이를 가늠해본다. 삼십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그는 아이와 더불어 너무나 편안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그가 과자의 포장지를 뜯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그들은 다시 조용해진다.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모두가 조용한 날이다. 아주 나중에라도 결코 출산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늘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너와 나의 아이를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아이는 분명 태생적으로 총명하고 우울할 것이다. 그러나 너와 내가 함께 그 아이를 키운다면 후천적인 환경에 의해 아이가 얼마나 더 관념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랄 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다. 역시 그런 생각의 끝에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런 생각을 다시금 떠올리는 이 극도로 모순적인 짓 자체에 대해서도 나는 고개를 젓는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다음 역까지 십 분. 그 후에는 좀먹은 영화필름처럼 검은 영상만이 남을 것이다.
 

  너는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혹은 하지 못한다. 그저 보고 있다. 이제는 나도 너를 마주 본다. 손목시계의 초침 소리가 온 세상을 뒤흔드는 듯하다. 나는 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시계를 풀어 한손으로 가방에 쑤셔 넣는다. 현석아, 현석아, 현석아. 네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하고 싶다. 끝없이. 생각해보면 나는 늘 누군가를 부르고 있다. 내 일기장에는 늘 ‘너‘라는 대상이 등장하고 나는 늘 ‘너‘가 나를 위로해주고 지켜주고 이해해 줄 것을 바랐다. ‘너‘라는 대상이 내게 일종의 구원을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언제나 나를 숨 막히게 하는 나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관념 같은 것이었지만 너를 만난 후 그것은 너를 의미하게 되었다. 너는 나에게 구원인가. 그런 말은 물론 한 번도 너에게 한 적이 없다. 구원이라는 단어 역시 너무나도 견딜 수 없게 흔하고 치기어리지 않은가. 나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구원일 수 있다는 따위의 믿음을 지닌 종류의 사람은 분명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너는 나에게 ‘너‘가 되었다. 지금 너를 보고 있다. 부르고 있다. 시간의 가장 가는 결 하나하나에도 너를 새겨 넣을 것이다.
 

“손 좀 잡아도 돼?”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침이기 때문인지 울음을 참고 있었기 때문인지 내 목소리는 나에게조차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도착역을 알리는 음악소리에 더욱 묻혀버린다. 눈동자가 흔들린다. 너는 내게로 몸을 조금 기울인다. 안내방송은 어느새 한국어 문장을 마치고 일본어로 역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하고 있다.
“손 좀 잡아도 돼?”
나는 한 음절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반복한다.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조용한 기차 안에서 울어버리고 싶지 않다. 네가 갑자기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한다. 너는 서러울 때만 운다고 했다. 네가 모자로 눈을 가린 채로 한 손을 잡는다.
“그런 걸 왜 물어보는 거야.”
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갈라진다.
“지금 어디쯤인지, 잘 모르겠어서. 아직 그래도 되는 건지…”
 

  기차가 멈춰 선다. 너는 내리고, 나는 남을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나는 눈을 감는다. 너는 누구나처럼 일상을 일시정지 시켜 놓고 군대에 들어가 누구나처럼 타의에 의해 움직일 것이다. 훈련소에서의 첫날 밤 열 시에 자리에 누우면서 누구나처럼 남은 이 년여에 대한 막막함을 느낄 것이다. 누구나처럼 시간이 가기를 기도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처럼 맞춘 커플링을 이별하는 누구나처럼 손가락에서 뺄 것이다. 누구나처럼 이런 저런 기억들을 주섬주섬 꺼내보기도 할 것이고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해 보기도 할 것이다. 거리에서 들리는 이별 노래 가사에 누구나처럼 공감하며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일반화된 심리학의 애착 이론에 철저히 따라 거부, 침잠의 과정을 거쳐 결국 망각에 이를 것이다. 누구나처럼 다음 사람을 만날 지도 모른다. 누구나처럼 후회할 것이다. 누구나처럼 그냥 쉽게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한다고, 쉽게 믿고 쉽게 의지했었어야 한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다만 현실부정, 기만, 애원. 그 어떤 흔한 방법도 우리는 택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최소한, 이지적이고 독창적일 것이다. 사람들이 출구 앞에 줄지어 선다. 우리는 손을 잡은 채로 문으로 향한다. 이 역은 종착역이 아니다. 나는 내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것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아름다운 것들을 찢어버릴 수 있다’, 이것은 네가 가장 좋아하는 아일랜드 출신 가수의 노래 가사다. 일 년 전 너는 내 공책 귀퉁이에 이것을 불쑥 적어 넣고 말했었다. “해석 좀 해봐.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 거야?”, 너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말이 된다. 이제 안녕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 역시 끔찍하게 평범한 단어다.

  다음 순간, 나는 플랫폼에 서있다. 등 뒤로 기차의 모습이 눈물을 닦듯 사라진다. 나는 처음으로 네게 기대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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