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있다.

파시즘, 제3의 길, 맑스주의, 근대언어, 신지식인, 사이버, 진보정당.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독자들은 앞의 단어들을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바로 대답해 보시라.

위에서 보듯이 올 가을 계간지들은 ‘각론’이 무성하다. 이른바 ‘각론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겠다. 쏟아지는 담론들이 각기 제 목소리를 내며 올 가을 논의의 지점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 봄과 여름 계간지들이 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근대성의 기원’을 찾거나 ‘제도권 학문으로서 반성’, 그리고 ‘밀레니엄을 앞둔 회고조의 논의’로 한 목소리를 냈던 것에 비교해 볼 때 큰 변화다. 이제 거대담론을 접고 현실과의 접점을 모색하기 위한 시도인가.

그러한 점에서 ‘당대비평’이 소개한 ‘우리 안의 파시즘: 내면화된 권력, 혹은 자발적 복종에 대하여’라는 특집은 주목을 끄는 기획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임지현 한양대 교수가 집필한 ‘일상적 파시즘의 코드 읽기’와 권혁범 대전대 교수가 쓴 ‘반공주의의 회로판 읽기’라는 두 글은 다양한 사례연구와 날카로운 현실 분석으로 글 읽는 ‘맛’을 전해주고 있다.

임교수의 글은 학교 교육과 가부장제도를 통해 생산되는 통제 메커니즘의 재생산적 구조와 역사를 파헤쳤다. 근대화를 시도한 권력이 강제한 조국과 민족의 이데올로기가 일상사에서 얼마나 소름끼치게 적용이 되었는가에 대한 분석이 눈길을 끈다. 학교교육은 권력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고 가부장주의나 부계 혈통주의가 가족주의적 연계에 의해 우리 사회가 파시즘에 일상화되었다는 분석은 뒤의 글 ‘반공주의의 회로판 읽기’와 어울려 적절한 조응을 하고 있다. 이에 권교수는 우리나라 제도교육에 만연한 반공주의 구호와 교과서내 북한 관련 사례를 들며 ‘레드 콤플렉스’의 비논리성을 지적하고 제도교육상 문제를 꼬집었다.
몇 달 전부터 좌파 학계로부터 구좌파와 신좌파가 연합해 창간한 ‘진보평론’은 창간호부터 주제를 ‘맑스주의’로 잡았다. ‘맑시즘의 오늘과 내일’이라는 특집을 마련한 ‘진보평론’은 이미 결성단계부터 차별성을 두고 조직한 ‘좌파 연합’.

이번 창간호에서는 그러한 좌파 연합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려는 시도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최갑수 서울대 교수의 처음 글 ‘공산당 선언의 현재적 의미’는 선언 150여년이 지금 한국사와 관련 지어 과연 선언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 분석한 글로 서양사에 대한 분석적 고찰을 한국의 노동현실에 접목시켜 사뭇 새롭게 다가온다. 이진경의 ‘노동의 인간학과 맑스주의’는 이전 맑스주의 철학에서 논의되던 ‘노동의 인간학’의 헛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맑스주의 변경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맑스주의 철학의 논의를 확대시켰다.

‘창작과 비평’에서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언어’에서 극복의 키워드를 찾는다. 특집글 ‘근대극복의 언어를 찾아서’ 중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를 다룬 백낙청 서울대 교수의 글은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문제를 두고 한반도 현실과 연관지어 분단체제라는 개념을 서구중심주의 시각에서 탈피해 우리의 현실에 비춰볼 것을 충고했다. “분단됐던 민족의 발전을 요구에 특별히 맞춘 새로운 형태의 복합국가와 더불어 진리에 대한 근본적인 제고와 진리를 향한 우리의 태도의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백 교수의 지적은 근대성 문제와 관련지어 분단문제는 우리와 떼어 놓을 수 없는 문제임을 환기시키고 있다.

9월에 창간된 월간 ‘이머지 새천년’은 ‘제3의 길’에 중점을 두었다. 진보와 보수 누구로부터도 대접을 받지 못하고 공격받는 ‘제3의 길’에 대한 문제제기가 볼만하다. ‘The Economist’의 자유주의에 대한 고찰은 제3의 길을 생각하기 앞서 먼저 ‘자유주의’와 ‘제3의 길’에 대한 명백한 구분점을 시사해 준다. 특히 ‘제3의 길은 우리의 길이 아니다’라는 신중섭 강원대 교수의 글은 ‘우리에게 제3의 길보다 필요한 것은 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정치(正治)’라고 말한 대목에서 현 정권의 통치철학과 연관지어 제3의 길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조차 ‘폐기처분’될 위기에 놓인 이 ‘어정쩡한’ 사상에 대한 논의는 이미 낡은 사상의 재탕 삼탕에 불과하고, 비판적으로 보면 기만에 불과한 ‘제3의 길’의 방향을 볼 때 우리의 정치방향에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이상에서 보여지는 99년 가을 계간지들의 접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각 계간지들이 현실극복의 ‘언어’를 찾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각자 무엇이든 간에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은 환영할 일이 아닌가 한다. 둘째는 이전의 논의들이 과거지향인데 비해 미래지향적 논의들이 분분하다는 점이다. 과거를 반성했으면 미래를 짊어질 수밖에 없다는 당위에서 나온 방안인가. 다만 이번 가을 계간지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이렇게 ‘각개 전투’식 활동들이 전체로서 또 근원적으로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깨우쳐 주는 종합적인 시각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는 밀레니엄을 앞두고 분산된 우리의 주의력을 보여주는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오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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