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연속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권성준씨. 하루에 500여명이 그의 블로그를 방문한다. 그는 정치나 사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저 끄적일 뿐이라 했다. 그러나 파워블로거에서 선정 됐다는 것은 사회에 대한 그의 비판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어간다는 증거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방문자 수에 그의 사명감도 높아진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한들 그의 희망은 변치 않는다.>

참여의 미학, ‘왜’로 설명하다


 실패는 죄악이며 용서는 사치이고 인간은 자본의 하위개념이 되어 버린 비정한 사회를 비판하는 권성준씨(독어독문학과 4). 그에게 사회는 도전의 대상이다. 그는 정의가 구현되는 사회를 꿈꾸며 ‘자유로운 골리앗의 즐거운 상상제작소’를 운영한다.

 그는 유달리 강조하는 것이 있다. 바로‘왜’다. 우리사회는 ‘왜’이런 것인가. 우리는 ‘왜’ 사회의 요구에 수긍해야만 하는가. 우리의 청춘은 ‘왜’ 자유롭지 않은 것일까. ‘왜?’라는 물음을 던지는 일. 이것이 바로 그의 청춘이다.

 

참여를 모르던 평범한 대학생
 안성캠 외대 독어학과 05학번 권성준. 하지만 1년 후, 과가 없어졌다. 서울캠의 독어독문학과에 흡수돼 버린 것이다. 서울로 통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안성캠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았다. 교수님도, 같은 학과 학생이 된 동기들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그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가 서울캠에서 처음으로 소속감을 느낀 곳은 중앙동아리 문학동인회였다. 동아리 사람들은 그를 차별하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세상이 변한다’는 모토아래 그들은 뭉쳤다. 선배와 동기와 후배가 함께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는 방법을 배웠다. 정치에 관심이 생겨 정치외교학과를 부전공으로 택했다. 그러나 아직은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들은 것 그대로 글과 말로 표현하기에도 벅찼다. 생각의 기준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행동의 확신 역시 서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회참여에 소극적인 학생이었다. 그 시절 그는 탁상공론을 좋아하는 학생일 뿐이었다. 탁상공론을 좋아하던 학생에게도 어김없이 영장은 날아왔다. 그는 2년 간의 학교생활을 접어두고 군대로 떠났다.

 

군대가 이끈 사회운동의 길
 그가 군대에서 복무하던 시절, 역사에 길이 남을 촛불집회가 시작됐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 그리고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촛불시위라는 새로운 시위문화를 통해 표출된 것이다.

 각 가정의 식탁에는 미국산 쇠고기가 종적을 감췄다. 소비시장에서 미국산 쇠고기가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대의 식탁에는 쇠고기 천국이었다. 아침엔 소고기국, 점심엔 갈비찜, 저녁엔 불고기가 나왔다. 조류독감이 유행할 때는 삼시세끼 닭이, 돼지콜레라가 유행할 때는 돼지고기가 식탁을 장악했다. 그들은 언제나 ‘위험한’ 식품을 강요당했다.

 황당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군대에 온 우리에게 이런 음식을 먹이다니.’ 신성하다는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는 사람들에게 민간이 거부한 음식을 강요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마침 휴가를 맞았다. 집에 도착한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블로그에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일. 그러나 정치 중립을 지켜야 할 군인의 신분인 그에게 표현의 자유란 없었다. 최대한 ‘쇠고기’와 ‘정부’, ‘정치’에 대한 얘기는 자제했다. 오로지 군대 안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먹어야만 하는 자신의 ‘건강’에 대한 걱정을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복귀하자마자 연행됐다. 죄목은 ‘국가원수모독죄’, ‘정치적 중립 위반’, 그리고 ‘사상죄’였다. 그는 헌병에서 군 검찰로 넘겨졌다. 그들은 그 모든 죄목을 인정하는 문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군검찰과 그의 대치 상태는 3일간 이어졌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 문서가 문서인지, 그냥 백지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는 정신이 희미해진 채 그 문서에 도장을 찍었다.

 한 달 동안 영창에 갇혀 있었다. 영창은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이 때 사색하던 시간은 훗날 그가 성숙해지는 밑거름이 됐다. 영창에서 풀려난 뒤, 5개월 남은 군 복무를 마쳤다.

 

자유로운 골리앗의 즐거운 상상제작소
 군 제대 후, 쉬고 싶은 마음에 터키로 여행을 떠났다. 휴식을 취하던 고요한 아침을 깨운 사건이 있었다. 바로 용산 참사사건이었다. 친구가 보여준 것은 시위하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하는 영상이었다. 국가의 폭력이 국민을 향하고 있었다. 정부의 보호를 받아야 할 이들이 정부에 의해 테러범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화두를 던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냐고, 어떻게 일어난 사건이냐고.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토론의 장이 펼쳐졌다. 그는 사회적 약자를 비정하게 몰아붙이는 정부의 태도에 분노했다. 자본의 논리 이전에 지켜져야 할 인간의 존엄이 짓밟힌 현장은 야만 그 자체였다.

 용산참사를 시작으로 사회에 대한 그의 생각을 하나 둘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그 곳은 사회 쟁점의 아고라가 되었다. 그리고 삼년 연속 파워블로그라는 훈장을 달았다. 그는 말했다. “제가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이 알아서 토론의 장을 만드는 거죠.”

 자유를 원하는 덩치 큰 남자의 희망이 있는 공간. ‘자유로운 골리앗의 즐거운 상상제작소’ 한 번은 이 공간에 침입자가 있었다. 기업 마케팅 표적이 된 것이다. “좋은 책 나왔는데, 서평 한 번 써주시죠.” 광고 요청은 두가지 이유로 거부했다. 우선, 자유가 침해된다는 것. 그리고 기업의 논리에 동조한다면 자신이 이 사회의 희망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그의 공간은 정의가 구현되는 사회를 위해, 그리고 우리 청춘이 누려야 할 자유를 위해 존재해야 했다.

 

‘변화’라는 소소하면서도 대단한 꿈
 그는 지금의 새내기를 볼 때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전공공부에 만족하지 못하고 토익공부와 스터디에 벌써 몸 담그고 있기 때문이다. 20대는 사회의 요구에 그대로 순응하고 있었다.

 문제는 알지만 행동 하지 못하는 20대의 현실. 그는 ‘참여’가 해답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왜’에 대해 관심을 가지길 바란다. 우리가 지금 왜 이런 현실에 도달하게 됐는지, 우리는 왜 이런 환경에서 살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블로그에 대선과 관련한 글을 올릴 계획이다. 우리의 무관심이 어떤 결과를 야기했는지,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주목하고 있다. 이후, 우리가 참여를 통해 직접 만들어낸 결과로 다시 한번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자 한다. 행복한 소식을 전하는 글, 그것이 그의 꿈이다.

 

송은지 기자 ilnrv@cauon.net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