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로 지은 무덤

- 헤르타 뮐러 『저지대』비평

이은지 일반대학원 독어독문학과 석사 1차

 

삶과 죽음의 친연성을 생각해본다. 인간을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로 규정한 하이데거의 진중한 명제와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중세시대의 서늘한 경고문을 상기해보는 것만으로도 그 관계의 끈끈함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하리라. 또한 인간이란 본디 이웃의 주검을 앞에 놓고 질펀한 축제를 벌이며 생과 사를 한데 아우르는 존재임을 떠올려 봐도 좋을 것이다.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헤르타 뮐러의 『저지대』를 지배하는 음울함은 삶과 죽음의 친연성에 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벌어지는 죽음과의 조우는 어떠한 카니발적 환희도, 혹은 삶의 허약한 소진을 마주하는 숙연함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저지대』를 관통하는 죽음은 삶을 짓누르는 비만한 죽음, 그리하여 마침내 삶을 송두리째 압살하려는 ‘독재적’이고 폭력적인 죽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루마니아 독재 정권의 혹독한 검열을 피해 문장을 송두리째 들어내고 원정 출판도 불사해야만 했던 작가의 실제적 고통까지 결산되면서, ‘일상’의 얇은 외피로 아슬아슬하게 포장되어 있는 이야기들은 그 포장을 벗기자마자 하나같이 육중한 비극성의 지독한 향기를 뿜어내게 된다.

  슈바벤은 죽음이 낮은 포복으로 기어 다니는 공간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아무도 이를 의식하지 않는 한편, 아이들은 “누구 하나가 없어도 찾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넘쳐난다. 송아지와 오리가 죽어나가는 동안 아이들은 “옥수수 속대 아이들을 낳고, […] 인형 아이들을 낳는다.” 관은 침대처럼 집안에 덩그러니 들어앉아 있고 여자들은 매일같이 검은 두건을 뒤집어쓰는 죽음의 풍경 앞에서, 생은 서서히 죽음에 굴복하고 잠식당한다. 사람들은 시신을 너무 오랫동안 집 안에 누인다.

  죽음의 냄새는 너무 강렬해서 온 집 안에 진동하는 이스트 냄새처럼 마을 전체에 사무치게 뒤덮인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이 냄새에 취해 “여기 파리들이 왱왱거리는 말똥 더미 옆에서 죽어갈 것”을 고대하고 죽음이 찾아오길 숨죽여 기다린다. 수프 속의 닭고기가 시체조각처럼 둥둥 떠다니고, 어제 아버지의 손에 도살당한 송아지 가죽이 오늘은 침대 옆에 떡하니 양탄자로 깔리는 이 혼란한 살풍경들을 보라. 그러나 집안일을 하거나 혹은 술 냄새를 풍기며, 아무렇지 않은 척 죽음의 유령을 덮어버리려는 어른들의 폭력적인 몸짓 하나 하나에 어린 화자 ‘나’의 눈은 경멸과 공포가 섞인 시선을 던진다. 즉 “어머니들은 […] 자신에게서 벗어나 나무와 수건과 양철의 집 안 살림 속으로 도피”하고, “남자들은 […] 독한 술을 목구멍에 들이붓고는” 냄새 나는 오줌을 누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이다.

  슈바벤을 지배하는 이 죽음의 냄새는 산 사람의 어깨까지 기어 올라와 폭군 행세를 한다. 화자의 어머니의 목은 “자글자글 주름살”이 잡혀 있고, 축 처진 젖가슴과 늘어진 뱃살, 성치 않은 다리로 ‘나’를 낳은 죽음에의 값을 미리 치르신다. 그러다가 “완전히 늙으면 남자들과 비슷해지고 결국 죽을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슈바벤의 음습한 죽음의 독재는 남자보다는 여자들의 목을 더 많이 노린다. 남자들이 선술집에 틀어박혀 현실을 외면하는 동안 여자들은 죽음을 어르고 달래며 점점 쇠약해진다. 어린 딸들도 이미 “뇌는 슈바벤 옷을 입고 있다.” 딸들도 곧 어머니를 따라 검은색의 슈바벤 옷을 차려입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게 될지니.

  동굴처럼 깊은 두터운 치마폭 아래 탐욕스럽게 자리 잡은 여자의 배는 죽음에 바치는 헌화(獻花)이다. 그것은 “어른들의 커다란 비밀”처럼 들어앉아서 어린 ‘나’를 또 한 번 전율케 한다. 아버지와 이모가 신음하는 비밀스러운 소리와, 할머니가 요강에 오줌 누는 청량한 소리, 난로에 기대어 대성통곡하는 어머니의 울음소리는 죽음에 미리 바쳐지는 레퀴엠(requiem)이 된다. 검은 슈바벤 앞치마 뒤로 가려진 여자들의 불행과 슬픔들을 ‘나’는 퍼즐을 맞추듯이 하나하나 그러모으며 외로운 장례식을 치른다. 퍼즐 조각들이 수북이 쌓여 퍼석하고 생기 없는 무덤의 봉우리를 만들어낼 때까지. 생에 잠복해 있는 죽음의 위령을 속속들이 들이마시며 지쳐 죽어가는 여자들. 그렇게도 “마을에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집이 있는 곳, 어머니들과 아버지들과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과 아이들과 가축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나 늘 두려움이 따라 다닌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화자에게도 죽음은 곧 일상으로 스며든다. 일례로 ‘나’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식탁에서 물 한 모금 마실 겨를도 없이 공포와 침묵에 무겁게 절은 뻑뻑한 식사를 한다. 식사는 장례식처럼 죽음을 앞에 두고 치러지는 엄숙한 의식에 다름 아니게 된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 간에 침묵이 오고가듯이, 어른들은 ‘나’ 앞에서 하나같이 죽은 사람 행세를 하며 함구하고 있다. “감자를 잘 썰려면 얼마만한 두께로, 얼마만한 길이로 잘라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다. 어머니는 걸핏하면 따귀를 때리고, 아버지는 이유 없이 손찌검을 한다. 죽음의 폭력에 고통 받는 피학적 대상으로서의 ‘나’는 존재하지만,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나’는 부재한다. ‘나’는 어른들처럼 자기만의 소유물을 가질 수도 없는데,

  집 안의 물건마다 임자가 있고, 그 신발의 임자는 아버지였다. 특히 옷과 신발, 침대는 모두 임자가 각기 따로 있었다. 침대나 방의 임자가 바뀌는 일은 단 하룻밤도 없었다. 점심 식탁의 자리 또한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고, 아침에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옷 또한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오직 나만, 어머니가 일할 때, 가끔 낡은 펠트 슬리퍼나 아버지의 기름 묻은 구두를 신고 나프탈렌 냄새 나는 할머니의 숄을 어깨에 두른 채 집 안을 돌아다녔다.

  어머니에게 입술이 터지고 바닥에 나가떨어질 정도로 거세게 뺨을 맞으며, “어째서 이 사람들과 한솥밥을 먹고 이 사람들의 습관을 따라야 하는지” ‘나’는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막 아름다운 생의 꽃으로 피어나기 시작하는 어린 화자는 죽음을 닮은 마을의 음산한 풍경 앞에서 어떤 이물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디로 걸음을 내디뎌도 나와 사물들 사이를 유리가 가로막고” 있는 듯이, ‘나’는 살을 부비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소통과 교감을 체험할 수가 없다.

  심지어 고인 빗물에 발가벗고 홀로 온몸을 씻으며 생으로 살쪄 오르는 어린아이의 아름다운 몸은 슈바벤에서는 공포의 대상이다. “젖소가 나를 돌아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황새풀 덤불조차 부르르 몸을” 떨며 ‘나’의 전라에 전율한다. 유리처럼 투명하고 팽팽한 ‘나’의 몸은 죽음 앞에 곧 힘없이 스러질, 찰나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그러나 찰나에 그칠지언정 죽음의 독재 한복판에서 생동하는 어린 화자의 몸이야말로 저항을 담지한 메시아 그 자체이다. 때문에 ‘나’는 슈바벤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그곳으로부터 번뜩 돌출하여, 독재의 뒤통수를 꿰뚫고 그것의 슬픈 희극성을 기록하는 특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화자는 어린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나이에 합당한 천진함을 잃고 건조하고 성숙한 시선으로 일상에 시적인 생경함, 희극적인 낯섦을 부여한다.

  눈앞을 흐리는 현실의 현란한 악몽들을 품은 채로 ‘나’는 잠이 든다. 잠은 죽음을 가장하여 ‘나’를 찾아와 괴롭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잠은 화자가 현실로부터 얻은 생채기를 언어라는 새로운 흉터로 아물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깨어난 뒤에 악몽을 상기하는 과정은 끔찍하지만, 슈바벤을 통째로 삼켜버린 죽음의 괴물 앞에 이방인과 같던 화자에게는 잠이야말로 죽음과 스스럼없이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잠은 용감무쌍하게 ‘나’의 머리 뚜껑을 열고 들어와 언어의 마술을 허락하는 매혹적인 메피스토펠레스이다. ‘나’는 잠 속에서 커다란 잉크병에 빠져 한 줌의 단어가 되어 허우적거린다.

  이제 잠이 찾아왔다. 나는 커다란 잉크병에 빠진다. 그 안은 울창한 숲속처럼 어두웠다.

  “마을의 진짜 끝은 묘지”이고, 이제 우리는 그곳에서 천천히 솟아오르는 하나의 무덤을 숨죽여 지켜본다. 독자가 읽는 것은 작가가 언어로 지은 자신의 무덤이고, 우리는 모두 그의 무덤 앞에서 독재와 폭력의 역사를 조문한다. “스타일이 곧 영혼”이라는 콕토의 말처럼, 깊고 컴컴한 이 무덤의 서늘한 질감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강력한 정치적 저항의 메시지이다. 환몽 속의 동화와도 같은 헤르타 뮐러의 모호한 시적인 문장들은 기실 그 모호함 속에 당대의 모순과 삶의 고통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것이다.

  숨 막히도록 잔인한 슈바벤의 풍경 속에서 필자는 문득 익숙한 냄새를 맡는다. 그것은 한국의 땅 곳곳에도 여전히 아롱져 있는 ‘두려움’이라는 불편한 냄새이다. 가부장적인 관습과 군부독재의 역사가 동침해 폭력과 체벌로 얼룩진 기형아를 출산하던 80년대의 비릿한 한국 땅을 기억한다. 그 냄새는 내 어린 시절 내내 치마폭에 끈덕지게 매달려 있었고, 어른의 권위와 아이의 순종이라는 연합만큼 그 냄새와 잘 어우러지는 것도 없었다. 먹기 싫어도 억지로 먹지 않으면 안 되는 반찬을 앞에 놓고 나는 숱한 형벌을 살았고, 그런 류의 공포가 반복되며 이 사회가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것 같은 어둡고 음침한 낌새를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헤르타 뮐러의 잘 짜여진 언어의 직물은 어깨에 걸치는 순간 가슴팍을 파고들어 나의 역사와 엮이며 마침내는 내 몸에 딱 맞는 옷이 되고 마는, 책과의 신비로운 공명을 체험하게 해준다. 삶과 죽음의 연결고리만큼 찐득한 삶과 문학, 삶과 언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내는 뮐러의 옷감이 주목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아름답고 독특한 문장들을 저작하는 동안 검고 쓴 독이 비집고 나와, 루마니아 변방에 묻힐 뻔한 독재와 공포의 역사를 슬그머니 내 몸에 각인시킨다. 이 한 권의 무덤으로부터 익숙한 음파가 울려 퍼지는데, 그것은 문학적인 것이 여전히 정치적일 수 있음을 타진하는 울림이다. 가장 서정적인 언어로 가장 정치적인 목소리를 주조하며, 잊혀진 줄 알았던 그 소중한 울림을 되살리는 『저지대』의 언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혁명적인 언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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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자 이은지 인터뷰

“미리 글 봐준 친구들한테 한턱!”

- 우선 당선 축하드립니다. 수상 소감 한 마디 부탁드려요.
발표 날짜가 지나서 반신반의 하고 있었는데, 전화 받고 정말 기뻤어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  헤르타 뮐러의『저지대』를 선정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혹 지난 여름, 국제비교문학대회에서 헤르타 뮐러의 강연을 들으셨나요?
아니요. 참가비가 비싸서….(웃음) 아쉽긴 하지만 작가를 대면하는 게 꼭 중요한건 아니잖아요. 전 사실 불문학과 출신이에요. 독문학은 복수전공이였죠. 독문학 수업을 듣다가 헤르타 뮐러를 처음 알았어요. 노벨상 수상작가로 알고 있었지만 관심은 없었거든요. 수업시간에 읽다가 독특한 문체에 매료되었죠.

- 『저지대』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저지대』는 작가 헤르타 뮐러가 루마니아에서 겪었던 독재정권의 폭력을 다뤘어요. 뚜렷한 줄거리는 없지만 루마니아의 실상을 전혀 모르더라도 그 느낌을 알 수 있는 책이에요. 헤르타 뮐러 소설 중에 『저지대』도 유명 하지만 『숨그네』라는 단편집도 추천하고 싶네요. 시간날 때 한편씩 골라 읽기 좋아요.

- 상금은 어디에 쓰고 싶으신가요
당선될 줄 몰라서 생각은 안해봤는데, 미리 글 읽고 코멘트해준 친구들한테 우선 한턱 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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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심사평

비평문이 지녀야 할 세 가지 장점을 다 갖추다

예술대 문예창작학과 이승하 교수

 

   투고된 3편의 글은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해도 좋을 만큼 막상막하의 수준을 보여주었다.

  김언의 시집 『소설을 쓰자』를 분석한 「이제, 시인도 소설을 쓸 것」은 시인이 왜 이런 도발적인 제목을 붙였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고서 그 의문을 풀어나가는 식으로 전개된다. 김수영의 말 인용도 적절하고, 수동형 문장에 대한 집착도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그런데 비평문 또한 하나의 작품임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글이 다섯 개 단락으로 되어 있고, ‘추론’의 형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또한 운문과 산문, 혹은 묘사와 설명 사이에서 시인이 한 고민을 좀 더 심도 있게 추적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성태의 단편소설 『늑대』를 꼼꼼히 읽고 면밀히 분석해본 「검은 늑대를 좇아 달리다」는 학부 4학년 학생의 글인데 뜻밖에 아주 원숙하다. 작가의 몽골 체류기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의 의미를 제대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의욕이 느껴진다. 그런데 기계적인 작품 인용과 그에 따른 설명은 구성의 결함이 될 수 있다. 대학 졸업반인 자신의 처지와 대비시키며 풀어나간 글 솜씨는 칭찬을 아끼고 싶지 않은데, 작품 전체를 조망하는 종합 의지가 필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언어로 지은 무덤」은 세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문장이 일단 안정되어 있고, 작품에 대한 해석력이 뛰어나며, 하나의 비평문으로서 구성이 치밀하다. 뮐러의 소설 『저지대』를 쓴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가치를 잘 파악하여 분석해나가는데, 그 문장이 정확하면서도 시적이다. 작품의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까지도 살펴보았더라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아무튼 비평문의 문장이 허술하면 아무리 좋은 감식안을 갖고 있어도 그 글을 읽어주기가 힘든데, 이 학생은 뛰어난 문장력을 갖고 있어 앞날이 크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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