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만 고민했는가? 이제 ‘사회적인 것’이 대세다. ‘사회적인 것’은 뒤르켐에 의해 처음 제시됐고 많은 사상가들의 관심을 받았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자유주의의 등장은 ‘사회적인 것’을 위기에 직면케 했다. 하지만 최근 사회의 보호와 재구축 운동이 속속 관찰되고 있다. 이 역시 자본에 의한 포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양태라는 점은 ‘사회적인 것’의 부활을 어렵게 한다. 2010년 현재 ‘사회적인 것’의 위치와 가능성을 알아본다.

 

1부 사회적인 것의 개념과 필요성

- 왜 ‘사회적인 것’인가?

2부 사회적인 것의 위기와 종언

 - 포스트모던 징후, 그리고 사회적인 것의 위기

 - 신자유주의, 혹은 사회적인 것의 파괴

3부 사회적인 것의 재구축과 자본의 포섭, 돌파구는 없는가?

 - 제국주의의 첨병, 사회 자본론

 - 위기관리 전략, 사회책임투자

 - 사회적 소통의 퇴행과 대안, SNS

 - 착하지 않은 유통과 거래, 착한소비

4부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 사회적인 것의 가능성과 정치를 위한 조건들

 

 

어떻게 새로움을 볼 것인가?

사회와 문화의 급격한 변동은 기존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에 심각한 위기로 받아들여진다. 과거에 안정적이던 사회질서와 사고유형이 무너지게 되면, 사회가 파편화되고 혼돈과 무질서에 직면하게 된다는 인식이 팽배해진다. 이에 대한 반응은 때로는 비관론과 과정된 담론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명백한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의 새로운 단계, 새로운 기술의 발전, 새로운 양식의 출현, 사회문화적 변동은 이전의 사회와의 단절을 나타낸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근대의 사회조직이 무너짐으로써 야기된 일련의 위기와 새로운 탈근대 지형의 도래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오늘날 탈근대론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의는 이미 진행될 만큼은 다 진행되어서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관심을 끌 수 없는 논제로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가 여전히 어떤 의미를 지닌다면, ‘새로움’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논의가 아니라 ‘새로움’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은 새로운 기술, 새로운 지식, 사회경제체계에서의 새로운 변화가 포스트모던 사회를 창출한다고 주장한다. 보드리야르와 료타르는 새로운 형태의 정보·지식·기술이라는 관점에서 포스트모던적 전개 양상을 해석하는 반면, 제임슨이나 하비는 포스트모던을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의 단계로 해석한다. 어쨌든 포스트모던(탈근대)은 모던(근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하고 비판을 수행하면서 미래를 선취하는 시도로 존재한다. 포스트모던은 미래적 돌출과 시대전환적 모험에 대한 이름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새로운 것의 도래를 가정하며, 이러한 새로움, 이러한 새로운 사회문화적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역사적 전망과 사회문화적 실천전략을 성찰하는 요구를 전제한다.

 

사회적인 것은 대중 안에서 내파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큰 별’로 불리는 보드리야르는 『침묵하는 다수의 곁에서 혹은 사회적인 것의 종언』과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인간 경험의 새로운 영역, 역사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포스트모던 사회를 묘사하면서 사회적인 것·사회관계·계급에 대한 이전의 이론들을 문제시 삼는다. 사회적인 것·사회관계·계급의 개념들이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내파(implosion)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극도로 세분화되고 혼잡하며 과도하게 통제되고 있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사회적인 것·사회관계·계급이 내부로부터 또 내부에서 폭발하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대중은 오로지 스펙터클에만 관심을 갖는다. 스펙터클의 세계에 갇혀 조작의 대상이 되어버린 대중은 사회와 사회현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냉담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즉 대중은 모든 의미·정보·의사소통·메시지를 흡수하고 그것들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든다. 이런 대중의 성격은 ‘무기력’·‘침묵’·‘내파의 형태’로, 그리고 사회적인 것을 삼켜버리는 ‘블랙홀’로 묘사된다.

따라서 보드리야르의 관점에서 사회적인 것은 인간 상호작용·의사소통의 모든 이상적인 반향과 함께 대중 안에서 내파된다. 그러면 보드리야르에게 내파란 무엇인가? 그에게 내파는 모든 것이 흡수되어 응축되는 현상으로, 사회와 관련해서는 사회적인 것의 포화에 대한 격렬한 반응 또는 수축작용이다. 대중은 사회적인 것이 내파하러 오는 촘촘한 영역이다. 대중의 침묵과 무관심과 함께 “사회적인 것의 시대는 끝났다”고 보드리야르는 선언한다. 사회적인 것의 강한 힘은 전도되고, 그것의 특수성은 상실되기 때문이다. 이제 대중은 시뮬라시옹의 질서에 속하며, 시뮬라시옹에 의한 사회적인 것은 대중을 보다 냉담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대중을 침묵하는 냉담한 다수로 만드는 주요한 힘은 정보와 미디어의 증식인 듯하다. 특히 “정보는 의사소통과 사회적인 것을 삼켜버린다”고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정보의 홍수가 의사소통과 사회적 연대의 가능성을 떠내려 보내는 것은 정보에 의한 시뮬라시옹 때문이다. 즉 정보는 의미의 소통과 전달을 연출한다. 그러나 이 연출은 진정한 소통과 전달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가짜의 의사소통을 만들어낸다.

가령 인터뷰·청취자의 전화·시청자의 투표 같은 수법을 적절히 배합하여 의사소통을 감쪽같이 흉내 내고, 그러한 시뮬라시옹이 현실감을 줄수록 실제의 의사소통은 무대 뒤로 사라져버린다. 시뮬라시옹의 연출에 의해 사회적 연대의 가능성이 정보의 홍수 속에 함몰해 버린다. 사회적 연대란 구성원들 간의 의사소통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바로 이 의사소통이 중단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보를 쏟아내는 대중매체는 사회적 요소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다. “대중매체는 사회화의 수행자가 아니라, 그와 반대로 대중 안에서 사회적인 것을 내파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본질적인 문제는 대중매체와 정보의 비이성적 폭력에 의한 사회적인 것의 분열이다. 오늘날 ‘사회적인 것’은 사회관계와 맞부딪치기보다는 오히려 개인들을 관계짓고 조직하는 대중매체 속에서 선택된다. 따라서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정보와 미디어의 증식은 대중을 중화시키고 사회적인 것을 파괴한다. 그래서 대중매체를 대중을 조종하는 것으로, 정보를 대중을 사회화하는 것으로 여기는 매체정보이론들은 문제시된다.

어떻게 보면 정보와 미디어는 두 방향에서 작용한다. 그것들은 외관상으로는 더 많은 사회적인 것을 생산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회관계와 사회적인 것 자체를 중화시킨다. 그러나 사회적인 것이 그것을 생산하는 것(정보·미디어)에 의해 파괴되는 동시에 그것이 생산하는 것(대중)에 의해 흡수된다면, 사회적인 것의 정의는 무가치하게 되며, 이 용어는 더 이상 아무것도 분석하지 못하게 되고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게 된다.

 

침묵하는 다수는 의미에 저항한다

그러면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보드리야르는 사회적인 것이 위기에 처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는 포스트모던 사회는 진짜 사회적인 것을 제거하고 그것을 시뮬라시옹화된 사회적인 것으로 대체한다고 말한다. 그의 견해로는 사회적인 것은 대중 안에서 내파되어 실재의 영역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보드리야르의 가장 흥미로운 주장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의 증식을 통해 사회적인 것들을 되살아나게 하려는 시도들에 대해 대중들이 불만과 무관심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과도한 메시지·광고·이데올로기적 담론·기호·의미는 결국 대중들에게 조작을 의심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대중들이 미디어 같은 사회화하는 힘보다 더 강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정한다. 그리고 그는 대중을 압도하고 흡수하는 미디어보다는 오히려 대중이 미디어를 둘러싸고 흡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정한다. 그는 “대중이 바로 메시지이다”라고 말한다.

더욱이 미디어에 의한 시뮬라시옹에 냉소적이고 냉담한 대중은 모든 의미·정보·의사소통·메시지를 흡수하고 그것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미디어 안에서 의미의 내파’를 강조한다. 그는 대중의 침묵과 냉담이 ‘의미에 대한 거부이자 세계에 대한 거부’인 전략적 저항으로 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우리는 대중의 침묵과 냉담이 새로운 의미를 위한 공간을 창조하고, 새로운 의미체계와 새로운 사회의 생산에 도달하는 급진적 문화정치학의 개입을 위한 공간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대안적 의사소통 수단을 생산하려는 노력을 통해 ‘침묵하는 다수’가 저항하는 의미의 재생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사유의 길을 향하여

어쨌든 앞서 언급된 대중 안에서 사회적인 것의 내파, 미디어 안에서 의미의 내파는 포스트모던 징후이다. 이 징후를 제대로 인식하는 문제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중매체와 사회현상을 어떻게 사유하느냐에 달려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사회적인 것·정치적인 것·의미·진리 등의 모더니즘의 거대한 준거체를 무너뜨리면서 새로운 유형의 사유방식이 필요함을 촉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사유의 바른 길과 옆길을 통해 새로운 사유의 길을 늘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배영달

경성대  프랑스어학과 교수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