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직 학문적으로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도 없고, 또 옆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학문에 정진해야 할 학도에 불과하지만, 지난 20 여년 동안 대학 언저리에서 살면서 제가 겪고 느낀 몇 가지 사실들이 21세기를 살아 갈 여러분에게 조그마한 도움이 될까 하여 몇 마디 적습니다.

저는 지난 89년부터 지금까지 10여년 동안 ‘역사비평’편집위원을 역임해 왔고, 90년에서 91년 사이 2년 동안, 그리고 97년부터 지금까지 ‘경제와 사회’편집책임자를 맡아왔습니다. 연구자이자 동시에 편집자로서 제가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어떤 영역이나 분야에도 전문가라고 지칭할 수 있는 연구자가 드물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한국 현대사, 현대 한국사회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나 쟁점에 대해서 관련 연구자를 거의 구할 수 없었다는 점을 언제나 안타깝게 생각해 왔습니다. 제가 전공하는 사회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제가 떠오르고 그것에 대한 학계의 대응이 절실하게 요청된다고 느낀 경우에도, 그 분야를 몇 년 동안 깊이 있게 연구한 사람을 찾을 수 없어서 늘 고심하였습니다. 최근에는 ‘경제와 사회’에서 ‘한국의 대학’에 관한 특집을 구성하기 위해 몇 번의 편집회의를 했는데, 아직 우리의 편집방향에 부합하여 글을 써 줄 수 있는 적절한 필자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추상적으로 몇 마디 하는 필자는 구할 수 있지만, 사실에 기초하여 전체의 상을 잡아나가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일반론 또는 주장을 내세우는 논문이나 에세이는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자료나 사실의 근거를 들이대면서 자신의 입론(立論)을 펴는 글은 거의 찾기 어렵습니다. 제가 미국이나 유럽, 일본 연구자들의 업적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제가 본 범위에서 생각해보면 그들이 제기하는 추상적인 이론과 주장 속에도 자신의 문화와 역사가 녹아있었습니다. 제가 분명히 확인한 것은 그들의 추상적인 이론이라는 것도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출발했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나라에 소개될 때는 아주 건조한 뼈대만 남게 되고, 살은 생략되어 버리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뼈대를 무기로 하여, 이러쿵저러쿵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 사회과학계의 모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분석의 방법들이 한국사회를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준 것도 부인할 수는 없겠으나, 그러한 관성을 반복하다보면 언제나 우리는 2류,3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을 갖게됩니다.

저는 수년전 동아시아 경제 및 한국경제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암스덴(Amsden)이 ‘동아일보’의 칼럼에서 대기업이 가장 전형적으로 발전한 한국에서 한국의 대기업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경제학자가 없다는 점을 비웃는 글을 쓴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바로 대기업을 주제로 하는 국제학회에서 한국인 학자들이 거의 참여하지 않는 현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녀의 말대로 한국의 독특한 재벌 기업에 주목을 하면서 그것을 비교 경제사적인 측면에서나 순수 거시경제적 측면에서 그 효과와 한계를 정리한 경제(사)학자가 있었다면, 그는 경제학적인 인식지평을 여는데 기여했을 것이고 동시에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보다 과학적인 인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지적하는 것처럼 재벌이라는 한국사회의 독특한 현상에 대해 한국의 학자들이 이토록 무관심한 것은 놀라울 지경입니다. 만약 한국의 학자들이 재벌 문제를 제대로 천착한다면, 경영학, 경제학, 사회학 분야에서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미쳐 보지 못한 새로운 이론적 발견을 성취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우리나라 대다수의 학자들은 그러한 도전을 감행하려하기보다는 미국과 유럽의 학자들이 제기하는 쟁점과 과제에 편승하는 모습을 보여온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우리자신의 것을 연구 과제로 삼지 않는 경향, 그리고 사실분석 보다는 추상론이 넘쳐나는 현상을 문화적, 지적 식민지 현상의 표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론에서의 식민성은 정서와 문화에서의 식민성이 그러하듯이 이론에서 대세를 추종한다는 점, 자신의 눈과 관찰을 중시하기 보다는 대국(大國)의 학자들이 무엇을 중요시하는가를 일차적으로 고려한다는 점, 원칙보다는 표피적 현실에 지나치게 좌우된다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 5, 6년 동안의 한국 사회과학계를 돌아보면 우리는 이러한 특징을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실제의 현상과 사실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추상론의 과잉은 한국의 지식사회가 안고 있는 큰 병폐인데, 이는 이론의 식민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는 문제의 출발점이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므로 오로지 “누가 무슨 말을 했다”, “요즘 서구에서는 무엇이 중요하다”라는 논의가 가장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그리고 소수의 성실한 연구자들이 외롭게 제기하는 논제들은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사라져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논문을 읽다보면 어떤 학자들은 한국 연구자들의 연구논문을 전혀 인용하지 않거나, 설사 인용하더라도 자신의 과거 논문만 열거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연구자는 영어논문만 인용하고,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연구자는 독일어 논문만을, 프랑스에서 유학한 학자는 프랑스 논문만을 인용합니다.

나는 이런 저서나 논문을 볼 때마다 이상한 느낌을 갖습니다. 그것은 자신도 한국인이면서 한국인 연구자들을 경멸하는 오만함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자신이 연구자로서 수련과정을 거친 그 나라의 지적 자산만이 인용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뽐내는 자세가 동시에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선진 이론을 배우지 못한 저 같은 ‘국내파’ 학자들은 이러한 글을 읽을 때마다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다른 편으로는 이들의 행동에서 저는 ‘하인을 무시하는 마름’의 노예적 퍼스넬리티의 편린을 엿보게 됩니다. 이들은 ‘한 수 아래’인 한국의 연구자들과 토론하기보다는 선진 외국의 학자들의 글과 개념들을 인용하기를 즐기면서, 지적인 독백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학계는 토론보다는 독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남이 무슨 주장을 하더라도, ‘정치적인 고려’ 때문에 비판을 삼가고, 비판을 하더라도 그저 두리뭉실 구렁이 담넘어가듯 지나가버리고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편하게 살자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제대로 천착되고 토론되어야 할 많은 주제들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거론된 이후 후속작업은 거의 없고, 곧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학계의 이러한 모습이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학에서 충분한 지적인 세례를 받은 사람만이 어느 직장, 어떤 일에 종사하더라도, 분명한 주관과 철학을 갖고서 그 일을 잘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지식사회가 제 자리를 잡는 것은 학생인 여러분들의 장래 발전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대학이 학문을 전달하는 곳만이 아니라, 학문을 생산하는 곳이라고 할 때, 이렇듯 학문 연구의 생산 과정이 왜곡되어 있으며 연구성과의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는 오늘의 지식사회의 현실은 학생들로 하여금 대학을 더욱더 취직준비 기관으로 간주하도록 유도할 것입니다.

오늘 한국의 대학에서 아카데미즘이 실종되고, 밥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인 실용적인 지식만이 선호되는 현상은 분명히 IMF 체제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적 흐름의 산물이기는 하나, 앞에서 지적한 바 우리의 학문내적인 문제점이 대학의 위기, 지식사회의 위기를 증폭시키는 내적인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학생들 스스로 대학의 주체, 즉 학문사회의 한 주체로 서기 위한 노력이 전제될 때만 직업적 학자들의 모습도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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