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 당연히 존재하는 것들은 서로 무게가 다른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존재감이 크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의 존재감을 인식하게 될 때는 그것의 역할이 오작동하고 있거나, 부자연스러움이 발생하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중앙대학교 구성원에는 교수, 학생, 교직원이 있다. 그런데 재단을 이 구성원 속에 넣자면 뭔가 부자연스럽다. 재단은 무엇일까? 재단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결합된 재산의 집단”이고, “어떤 공익적, 사회적 목적을 위해 출연(出捐)된 재산(이른바 목적재산)이 그 목적을 위해 통일성을 갖고 관리, 운영되는 경우다. 이는 실질적으로 개인적인 소유를 이탈한 재산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주물(無主物)인 재산이 아니고, 그 관리를 위한 형식적인 주체(主體)를 필요로 한다.”(두산백과사전) 즉, 재단이란 사유물이 아니면서 학교를 위해 존재하는 재산이다. 이 재산에는 관리자가 있다. 재단을 관리하는 법인이 학교 재산의 쓰임에 투명성과 목적성을 분명히 하고, 학교 발전이라는 목표를 향해 운영하는 것일 터이다.

  학생시절, 이미 재단교체의 경험이 있다. 정치에 몸담던 임철순 전전이사장에서 김희수 전이사장으로 바뀌고, 교정에는 반짝이는 새 스쿨버스들이 도열했고, 다음 88학번의 높은 학력고사 커트라인에 탄성을 냈었다. 그러나 처음처럼 얼마나 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 또 한 번의 재단교체를 경험했다. 그간 학교의 답답한 상황은 누가 지적하지 않아도 우리 구성원 모두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교육환경이나, 연구여건이나, 행정 시스템이나 좀처럼 개선되지 않은 상태를 유지했다. 총체적 전환이 있기 전에 힘들다는 무력감에 지친 구성원들에게 새 재단은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87년처럼 학교 외양과 입시에서 첫 끗발이 나고 있다.
나는 요즘 재단의 존재감을 두 가지 방식으로 체감하고 있다. 하나는 모든 안건에 대해, 결정에 앞서 거론되는 ‘재단의 의중’이라는 발언이다. 구조조정 같이 대대적인 작업도 아니건만, 제 역할을 잘 하고 있는 모든 중·소규모 단위 안건에마저 개입하는 이 완장 찬 그림자가 재단의 분신인지, 본부의 작품인지, 나약한 자아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두 번째 존재감은 언론을 통해서이다. 법인과 대학구성원 사이에 소위 화학적 교감이 일 년 내에 생길 것이라 기대한 바는 아니나, 최소한 상호 존중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할 단계라고 생각했다. 법인이 대학구성원과 다른 철학을 분명히 밝히고자 하나, 내용과 별도로 그 존재감의 형식은 당혹스럽고 우릴 아프게 했다.


  나의 소임이 연구와 교육이라면, 연구를 할 때 과학의 즐거움을 배우고, 학생들을 가르쳐 나를 초월하게 하고 나의 스승이 되도록 하고 싶고, 학생들의 설익음에서 창의성과 탐구심을 유도하고, 과학의 지평을 넓히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다. 지금 현실은 이로부터 결코 가까운 것은 아니나,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대학을 위해 내 본분을 다하는 것이라 믿는다. 노동은 노동 나름대로 가치가 있으나, 내 소임이 경영방침에 따라 목표가 정해지고 작업량을 채우는 노동은 아니다.

 

김시연 자연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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