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미국의 비판적 지성은 현실적인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해서 극도로 발언을 아끼고 “문화적 좌익” 뿐이라고 한 철학자(R. Rorty)의 지적은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아 옳은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요한 여론 매체를 통해서 미국의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해서 영향력 있는 발언을 하고 있는 사람들-예를 들면 크리스톨(I. Kristol), 글레이저(N. Glazer), 벨(D. Bell) 등은 거의가 다 ‘신보수주의자’(Neoconservative)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지식 사회의 정체성 문제에 대한 글을 부탁 받은 필자가 미국 지식사회의 오늘날 분위
기를 먼저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 지식사회의 분위기도 미국의 그것과 현재 별
반 차이가 없거나 아니면 미국보다도 더 보수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사실 현재
우리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지식인 그룹은 대개가 미국의 지식사회의 직접, 간접적인 영향권
안에서 성장한 데다가 분단사회가 오랫동안 파생시킨 우리의 특수한 정치문화가 사실상 우
리의 지식사회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지식사회의 이중성

우리지식 사회의 정체성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항상 논의되기 마련인 ‘미국식’ 지식체 생
산구조에 대한 비판은 중요한 지적이지만 이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
봄 학기에 신규채용 된 교수 요원의 박사학위 취득국별로 볼 때, 국내 (48.0%), 미국
(33.7%), 일본(5.6%), 독일(2.7%), 영국(2.5%) 그리고 기타(7.5%)로 나타나고 있어, 우선 미
국 박사 일변도의 경향도 그간 많이 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단순히 국내 박사
냐 해외박사냐에 있지 않다. 국내 박사이기에 정체성에 문제가 없고, 해외 박사이기에 문제
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만 줄곧 칸트철학을 연구, 칸트철학에 대해서는 세
세한 문제까지도 잘 알고 있지만 정작 칸트철학으로 우리사회 문제를 해명하려는 어떠한 시
도도 해본 적이 없는 분을 필자는 경험했고, 구미의 어떠한 이론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면
서도 이 이론이 성장한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 없는 국내의 젊은 학자들을 종종
필자는 만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외국에서 오래 생활했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정체성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학자들도 필자는 만나게 된다.

우리 지식 사회의 정체성 문제의 핵심적인 고리는 현재 보편적인 지식체계로서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는 구미의 지식사회와 우리의 특수한 지식사회의 상호관련성을 어떻게 보
느냐에 있다. 구미 지식사회와 우리의 그것이 대등한 힘과 구조를 지닌 것으로 보기보다는
대개는 구미의 그것이 우월한 것으로 인정되는 현실의 뿌리는 상당히 깊다고 할 수 있다.
외부로 강요된 개국 속에서 구미의 문물에 대한 긍적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문명개
화파’의 전통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 전통을 철저히
고수하려고 했던 ‘보수주의’적인 강한 흐름도 있었고, 전통과 근대를 결합하려고 시도했
던 ‘동도서기’적인 ‘절충주의’도 있었다. 오늘날 ‘지구화’의 격량 속에서 주체적 대
응양식으로서 ‘유교’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려는 움직임이나 ‘단군사상’을 새롭게 평가하
려는 시인 김지하의 시도, 나아가 ‘근대’와 ‘근대 극복’이라는 동시적 관계를 강조하는
여러 흐름도 따지고 보면 개항이래 줄곧 있어왔던 우리지식사회의 정체성 확립 노력의 재현
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후진적인’ 지식사회가 숙명적으로 안고 있는 ‘근대
적’이고 동시에 ‘반(反)근대적인’ 이중적 자세라고 평가하고 있는 카라다니 코진의 일본
지성사회 분석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오늘날의 지식사회의 특성

‘근대적’이면서도 동시에 ‘반(反)근대적’인 양면성을 지닌 지식사회 속에서 구미의 지
식사회가 일구어낸 성과물에 대한 존경과 함께 이에 대한 회의가 교차하면서 생기는 내면적
갈등과 긴장이야말로 정체성 확인 작업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구미의 지식사회와 우리의 지식사회가 ‘동일’하지 않고, ‘차이’가 있다는 이러한 인식
은 동시에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피히테(J.G.Fichte)의 ‘학문론’
(Wissen-schaftslehre)이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칸트적인 ‘물자체’(Ding an sich)를 거부
하고 나를 나로서 정립하는 의식적인 실천을 통해서 타자를 정립하고, 이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주장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나와 타자와의 관계설정은 오늘
날 ‘지구화’나 ‘정보화’로 표현되고 있는 엄청난 시간과 공간 응축상태 속에서 과거와
는 다른 새로운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가상공동체(Virtual Community)안에서는 개인조차도
이제는 여러 가지의 정체성을 가질 수있게 되었고 또 어떤 사상도 그것이 ‘미국적’인 것
인지 아니면 ‘독일적’인 것인지 아니면 ‘일본적’인 것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복합
적인 모습과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지구화’나 ‘정보화’를 통해서 우리 지식사회의 지
평이 넓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이와 동시에 불안해진 지식사회가 오히려 우리에게 이미 친
숙했던 과거의 지식사회 속에서 더욱 안주하려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는데, 위에서 지적한
유교의 적극적 재조명과 함께 이의 현대적 수용을 표방하는 것도 그러한 예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전통과 현대의 결합양태는 일차원적인 세계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
이 극도로 응축된 다차원적인 세계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점은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차이에 대한 무감각 :하나의 예

현재 진행되는 지구화의 대한 여러 가지 반응 양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자가 꼭 추천하는
고전이 있다, 1944년에 발간된 폴야니( K. Polyany)의 ‘대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은 세계1차대전 종결 이후 새로 편성된 시장자유주의에 대한 하나의 대응양
식으로 ‘나치즘’을 분석하고 있는데 이러한 대응양식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윤
리적 내지 종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 책은 분석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의 ‘지구화’라는 이름의 ‘신지유주의’는 과거의 자유주의 보다 더 무서운
속도와 압력으로 민족국가의 틀을 무너뜨리고 있어 이에 대한 대응방식도 과거처럼 ‘민족
사회주의’나 ‘볼셰비즘’이라는 대응양식으로만 나타날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유럽통합이 보여주는 것처럼, 한편에서는 여전히 민족경제 우선의 논리
가 있는 반면에, 국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투기성 자본에 대한 통제나 국경과는 무관한
공해 문제에 대한 공동적 대응을 표방하고 있는 ‘녹색당’도 있고, 과거의 복지사회 이념
에다가 신자유주의 결합하여 ‘제3의 길’을 주장하는 이른바 좌파적 대응 등. 지구화에 대
한 대응양식은 오늘날 실로 복잡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지구화’에 대한 서구적 대응양식 중 이른바 ‘제3의 길’을 주창하고 나선 영국
의 ‘새로운 노동당’(The New Labor)의 이론가인 기든스(A. Giddens)의 이론이 우리 지
식사회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들린다. 최근 김대중 대통령이 ‘르몽드’지와의 회
견에서 ‘생산적 복지’개념을 국정 철학적인 차원까지 끌어 올리겠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개념도 따지고 보면 토니 블레어(T.Blair)의 ‘새로운 노동당’이 이미 내세웠던 ‘복지’
(Welfare) 대신에 사용 하고 있는 ‘일 시키는 복지’(Workfare)의 우리말 번역이라고 느껴
진다.

구미의 지식사회와 우리의 지식사회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의식하는 것이 우리의 지식사
회의 정체성 확인 작업의 시작이라고 앞에서 지적한 적이 있다. 복지사회의 기본 틀보다 변
변치 못한 우리의 조건에서 ‘생산적 복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까지 종종 그래왔듯이
바로 이 ‘차이’에 대한 무감각이 빚어낸 또 하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일 시키는 복
지’가 노동자에게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구사하는 정책이라고까지 비난받고 있는 영국적
현실을 감안할 때, ‘생산적 복지’는 결국 노동자에게 채찍만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냐 하
는 불안감은 최근 격양되고 있는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에서도 이미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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