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던가. 강산이 세번 변할만큼 긴 세월동안 변하고 또 변한 중앙대에서 한결같이 자리를 지킨 이가 있다. 1캠 참마루 식당 한켠에서 구두 수선방을 운영하는 이무웅씨(68)다.
1980년, 장사에 실패하면서 생활이 어려워진 그는 때마침 ‘달려라 팔도강산’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구두 수선공 故김영수씨를 보고 절박한 심정에 담당 PD까지 찾아가 그를 소개받았다. 이무웅씨는 “그 분이 나를 칠성피혁까지 데려가서 구두 수선법을 가르쳐주더라”며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나한테 세상 사는 법을 많이 가르쳐줬지. 대학교에서 장사하라고 말해준 것도 그 분이고”라며 구두 수선 인생 30년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가 중앙대에 들어온지도 벌써 28년. 80~90년대까지 구두닦이 아르바이트로 수선방을 거쳐간 학생들만 해도 23명이다. 그는 “변변찮은 아르바이트 자리가 없던 시절이라 학생들이 여기서 구두 닦는 일을 했어. 다들 어려운 학생들이니까 등록금도 조금씩 보태주고, 여기서 밥도 먹여주고 그랬어. 돼지고기 천원어치 사서 물 한바가지 붓고 끓인 찌개를 대여섯 놈들이 국물까지 나눠먹던 그 때가 그리워”라며 그 시절을 회상한다. 지금도 한 달에 한번씩 모임을 갖는다는 그 시절 아르바이트 학생들은 몇 년전 환갑 잔치를 열어줬을만큼 이무웅씨에게는 각별한 인연이다. 이 수선방을 통해 그는 중앙대 학생이던 수양 아들을 둘이나 얻었고, 몇 년전에는 단골 학생의 주례를 서주기도 했다. 두세평 남짓한 작은 수선방에서 아름다운 인연을 이렇게 피우고 있었다.
 

  2001년부터는 열쇠와 도장 파는 일도 시작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그는 2년씩이나 이 기술을 배우러 다녔다. 이무웅씨는 “구두 수선하면서 열쇠랑 도장 파는 일도 같이 하라고 주위에서 귀띔을 해주더라”며 “난 주위 도움을 참 많이 받으면서 살았어. 그래서 큰 돈 벌 생각 안하고 학생들한테 베풀면서 살려고 해”라고 말한다.
 

  소박하고 친절한 그를 찾는 단골 손님도 많다. 이무웅씨는 “여태껏 장사하면서 학생들이 돈 안냈다고 학생증을 받아본 일이 없어. 당장 없으면 나중에 다 가져오는데 뭘. 장사는 원래 신뢰거든”이라며 “오래된 교직원들이나 교수님들도 항상 들러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털어놓고 가시지. 여기가 사랑방이야”하고 웃는다.
 

  그는 “나이 든 사람도 옛날만 고집하지 말고, 시대를 따라야지”라며 “학교가 옛날처럼 꼭 지식인의 산실만 될 필요는 없어. 요즘 학생들처럼 용기있고 자유분방한게 얼마나 좋아.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못하는 세상에 대한 욕구 분출이니까”라고 말한다. 이마에 패인 주름이 무색할만큼 젊은 생각을 갖고 산다.

   물론 30년이라는 세월이 가져온 직업병이 그를 괴롭히기도 한다. “데모하던 시절에는 데모 다음날 최루탄 밟았던 신발들을 다 고쳐주느라 콧물이 줄줄 흐르기도 했고, 지금은 본드 냄새, 고무 냄새를 하루종일 맡다보니까 만성 두통에 시달려”라고 말하면서도 “내 몸 챙기면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여기서 일하고 싶어”라며 새로운 ‘자식’들을 맞을 준비를 하는 이무웅씨. 그는 세월이 흘러도 늘 한결같이 어린 ‘자식’들의 발을 보듬어주는 인자한 수선방 ‘아버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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