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이다. 단순히 한 세기뿐만 아니라 일 천년을 마무리하는 때다. 그래서인지 대중매체, 지식사회할 것 없이 온통 밀레니움 담론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새로운 밀레니움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과거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어차피 인위적인 시간 개념으로서의 밀레니움이야 별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이처럼 한국사회의 지난 10여 년을, 그것도 ‘문화현상’을 중심으로 돌아보고자 하는 데에
는, 이 시기가 유난히 남달랐다는 점도 있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시점에서 과거는 중요한 잣
대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리고 유독 10여 년을 설정한 것은 자본과 기술을 등에 업
은 대중매체의 확산과 정보화의 발달로 인해 삶의 총체가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했기 때문이
다. 여기서 ‘10여 년’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은 그 시대적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서인데, 그
러한 불명확함은 87년 시민항쟁과, 소위 ‘문민정부’가 들어서는 92년 전후로 이어지는 모
호한 분기점에서 비롯된다.

근래 과거에 대한 논의에서 대부분은 이렇게 말한다.

80년대가 정치경제학과 이데올로기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문화의 시대’라고. 그래서
‘문화’는 우리 사회의 세기말 풍경을 그려주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그렇다면, 왜 문화인가. 이에 대해 대다수가 텔레비전, 영화, 대중가요 등의 대중문화가 양적
으로 팽창했기 때문이라고 근거를 내세운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이분법 속에서 이제는
고급문화가 아닌 대중문화의 시대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문학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
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틀렸다. 문화는 대중문화에서의 ‘문화’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
고, 그렇다고 해서 고급문화에서 나타나는 교양으로서의 ‘문화’ 역시 일부에 지나지 않는
다. 문화는 ‘이미’ 우리의 삶 자체였으며, 우리가 엮어가는 일상의 ‘꼴’이었기 때문이
다.

우리가 살피게 될 90년대는 그 이전과 확연하게 다르다. 80년대는 두 개의 적대적인 대척점
의 시대였으나, 90년대 초를 지나면서 그러한 양극은 각각 다양하고 다층적으로 분절되었다.
소련의 붕괴와 잇따른 사회주의권의 몰락, 그로 인한 국내 운동세력들의 위축은 87년 이후
조금씩 꽃피기 시작하던 민중문화와 대중문화의 만남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군사’ 정권에서 ‘문민’ 정권으로의 이동은 아무런 변화랄 것도 없었지만, 정권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에는 그 이미지의 측면에서 영향이 상당했다. 따라서 대중들의 관심은 노동,
계급 등의 정치 영역에서 자신의 몸과 직접적인 접촉이 가능한 일상, 주변과 같은 ‘욕망’
의 영역으로 바뀌었다. 다양한 이유로 억눌려 있던 욕망은 순식간에 분출되었고, 소비대중문
화는 더욱 팽창했다. 그러한 대중들의 욕망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지식인에 의해, 대중매
체에 의해, 때론 자본에 의해 권장되고 소비되었다.

90년대 초반, 소비대중문화의 분출은 경제적 풍요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90년도에
국민 1인당 GNP가 6천 달러 정도였다가, 95년도에는 무려 1만 달러에 육박했다. 이처럼 대
중들의 일상생활의 풍요로움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욕망과 기호들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바
로 이곳에,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던 곳에 새로운 ‘세대’가 있었다. 그들은 70년대 이후 출
생으로 오렌지족, 신세대, X세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새로운 사고와 행동양식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고하고 움직이는 신세대들은 90년대 우리 사회의 가장
강력한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신세대는 소비와 모든 대중문화의 중심에서 자신들의 욕
망을 한없이 발산했다.

그렇게, 일면적인 욕망의 소비는 계속되었다. ‘문민’ 정부가 있는 동안은 그랬다. 아니 정
확하게는 IMF 이전까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시대, 양심수는 차가운 감옥에 그대로 있었
고, 여전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가는 사람도 있었고, 철거민에 대한 폭행은 멈출 줄 몰
랐다. 그럼에도 우리의 일상은 ‘욕망’의 이름으로 넘실거렸다.

그릇된 개념으로서의 ‘문화’라는 이름 아래 잘못 태어난 ‘욕망’은 불과 얼마 전에야 한
대를 맞았다. 서너 살 먹은 꼬마들까지 ‘IMF’를 중얼거리기 시작하면서, 문화 혹은 욕망
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사고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정치와 일상이라는 두 층위가 결코 동
떨어진 것이 아니라 동시에 사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즉 정치에 눌려서 수면 아래 가
라앉았던 문화가 새롭게 부상한 것이 아니라 이미 수면 위에 정치와 문화가 함께 뒤섞여 있
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압구정동 오렌지족’부터 출발하여 최근의 ‘O양의 포르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둘러싸고 유혹하고 배반했던 문화적 현상의 표면을 다루면서, 그 심층에 깔려 있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때로는 계급적인 지점들을 헤집어 나갈 생각이다. 물론 여기서의 표면
과 심층은 단순한 대입 관계가 아니라, 서로 넘나들고 때로는 얽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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