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문지상을 통하여 자식이 부모를 때렸다거나, 부모 혹은 형제를 죽였다는 소식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범죄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최근에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을 보면 이유여하를 떠나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형법에서는 존속관련 범죄의 경우 일반적인 형법보다 더 무겁게 가중처벌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중처벌이 법 정신에 맞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누구도 그 가중처벌에 대해서 가혹하다거나 법이 형평성을 잃었다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존속범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큰 비난을 받았던 범죄인 것이다.

조선시대는 전(前) 시대와 달리 법치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법치국가를 표방한 조선시대의 법전에서 존속범죄, 이른바 강상죄(綱常罪)는 어떻게 처벌하고 있었을까?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기본법으로 하여 시대에 따라 법조문에 약간씩 가감하여 법전을 개편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인 형률(刑律)의 경우 중국 명(明)나라의 대명률(大明律)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대명률에는 이른바 10악(十惡)이라 하여 10가지 종류의 범죄행위와 그 처벌에 관한 규정을 적기하고 있는데, 가장 큰 범죄인 국가나 왕실 관련범죄 다음으로 무겁게 처벌하는 것이 악역(惡逆)으로 바로 강상과 관련된 규정이다.

악역으로 규정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부모, 부모, 시조부모, 시부모를 구타하거나 혹은 죽이려고 모의하는 것(謀殺), 둘째 형제자매, 남편, 백숙부모, 고모를 죽인 죄 등이다. 첫째에 규정된 죄중 구타죄는 참형(斬刑)에 처하고, 구타치사는 능지처사(陵遲處死), 과실치사는 장(杖) 1백도(度)에 3천리 유배, 치상(致傷)은 장 1백도에 도(徒) 3년이며, 죽이려고 모의하는 경우와 두 번째 범죄의 경우는 모두 참형이다.

강상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는 벌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참형은 목을 베는 것이며, 능지처사의 경우는 더욱 무거워서, 참형처럼 죄인의 목숨을 단숨에 끊는 것이 아니고 최대의 고통을 준 후 서서히 목숨을 끊는 것이다. 즉 죄인을 살아있는 채로 묶어놓고 모든 살을 하나 하나 저며낸 후 마지막으로 심장을 찔러 죽이는 형벌이다. 중국 명나라의 경우 4천7백도(刀)가 있어, 4천7백번이나 살을 저며낸 후 죽이는 것이니 그 고통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또한 능지처사를 당한 경우는 그 처벌이 본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연좌률(緣坐律)이 적용되었다. 연좌의 범위는 본인의 가족은 물론 조선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그 사람이 살고 있었던 군현까지 적용되었다. 즉 부모를 살해한 자의 처와 자녀는 노비로 삼으며, 살던 집은 헐어서 연못으로 만들고, 살던 군현은 읍호를 강등시켜 향, 소, 부곡으로 삼았으며, 그 고을의 수령은 목민(牧民)을 잘못한 죄로 파직이라는 중죄에 처하였다. 이 외에 장 1백도는 거의 치사에 가까운 형벌이며, 거기다가 3천리 유배는 이른바 불한년(不限年)으로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죄로, 대한제국시대에 종신형으로 바뀌었던 무거운 형벌이었다.

어느 나라나 개인의 복수(復讐)는 법전에서 금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지만, 부모나 조부모, 남편, 형제를 죽인 자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가하여 죽인 자는, 사형인 살인죄에서 감형하여 정배(定配)에 그치고, 경우에 따라서는 처벌은 커녕 복호(復戶:戶役을 면제하는 것)를 하거나 표창하여 정려(旌閭)하는 경우도 있었다.

강상을 중시하는 것은 살인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갑이 역모를 모의하던 중 집안의 종이 이 사실을 형조에 고발하였고, 형조에서는 갑을 심문하였으나 자백을 하지 않자 갑의 부인을 불러 문초하여 갑이 역모를 꾀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에 형조판서는 역모의 전말을 공초(供招)에 적어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이때 임금이 가장 먼저 처벌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역모를 꾀한 갑이 아니라 상전을 고발한 종, 남편의 범죄를 입증한 부인을 사형에 처하고, 형조판서는 종과 부인을 이용하여 주인과 남편의 범죄를 입증하여 강상을 어지렵혔다는 죄목으로 파직을 당하였다. 조선에서 얼마나 강상의 윤리를 중시했는가를 보여주는 예의 한 가지라 할 것이다. 당시의 임금은 인조(仁祖)이며, 형조판서는 최명길로 실재했던 사건이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 이런 무거운 강상죄가 성행하는 이유는 결코 조선시대에 비하여 처벌이 미약해서가 아닐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앞만 바라보고 뛰고 있었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뒤로 미루다보니 다른 나라가 가지지 못했던 존장(尊長)을 공경하였던 우리의 미풍양속은 알게 모르게 사라지고 물질제일주의가 판을 치게된 오늘의 세태가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닌지 모두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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