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에 대한 나의 불만은 그것은 언제나 언어를 박제로 만든다는 것이다. 언어학에서 우리는 연못의 살아 헤엄치는 개구리가 아니라 여러 가지 도표와 나무 그림이라는 판에 박혀 죽은 표본실 개구리를 보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 한 젊은 언어학자가 그의 첫 저서 <언어의 비밀>을 통해 언어학이라는 ‘원(圓)’의 안과 밖에 ‘점(点)’을 찍고 그 사이에 움직이는 ‘선(線)’을 긋는, 다시 말해 ‘탈주의 선’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이제 흑석 캠퍼스의 연구실에서 흑석동의 연못 시장을 향해 날개를 폈는가?

‘창조적 사고, 혹은 상상력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무엇보다도 눈물나게 재미있다. 이것은 저자인 장교수가 많은 정감있는 그림과 사진, 그리고 깜찍한 유머, 상큼한 에피소드를 사용하여 언어의 다양한 세계를 풀어 보이기(탈영토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자 자신의 억제할 수 없는 생선비늘처럼 번뜩이는 ‘기상(奇想)’ 때문이기도 하다. 독자들이 책을 읽을 때 쉽게 권태에 빠지는 요즘같은 시대에 그들의 흥미와 욕망을 유발시키는 것은 분명 두려움을 살만한 기술이다. 언어에 대해 여러 가지 호기심이 많은 저자는 인간을 ‘호모 큐리오스(Home Curious)’로 규정하고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재미있는 객담, 농담을 즐긴다.

언어의 자의성을 ‘엿장수 맘대로 성’이라고 표현하는 곳에서 볼수 있듯이 저자의 어휘사용은 참신하고 대담하다. 가히 팝 아트적 감수성이거나 소위 신세대 감각이다. 각 부분의 문패를 달고 작명하는 기술도 대단하다. 몇 개만을 소개하면, ‘돼지 가죽이 없으면 돼지가 흐뜨러진다’, ‘고양이 cat가 나무 log에 붙으면 목록 catalog’, ‘샌드sand가 위치 wich를 만날 때’, ‘교수님, 코딱지 묻었어요’, ‘입맞춤과 열맞춤의 미학’ 등이다. 장 교수는 언어학에 관한 전문 용어들을 교묘히 숨긴 채 현 언어학의 여러 영역들에 관한 정보와 지식과 통찰력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한다. 저자는 또한 우리에게 어린아이들처럼 언어를 가지고 재미있게 노는 법을 보여준다. 언어게임의 놀이방으로 우리를 자연스럽게 안내한다.

그러나 저자는 겉보기에는 적어도 언어의 ‘표현’(빠롤)을 만지작거리면서도 이미 언제나 머리와 눈초리는 하늘로 들어 저멀리에 있는 어떤 초월적 기의 또는 거대담론을 향수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혐의를 지니고 있다. 만일 모방의 모범인 시뮬라크럽을 거꾸로 가로질러가 ‘심층’, 본질, 이데아를 향한 충동을 위장하고 있다면 그는 다만 식민지 시대의 시인 이상의 ‘이상스러운 가역반응’을 실험하거나 ‘이상한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한 장교수의 (탈을 쓴) 플라톤주의는 아마도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어학자인 거대 이성주의자 노엄 촘스키의 제자이며 말끝마다 ‘금세기 최고의 언어학자’로 추켜세운 장교수의 당연한 지적 자세일 것이다(그는 최근에 촘스키의 전기를 번역 출간한 바 있다).

이 책의 본문에서 자주 등장하는 ‘신비’란 말이 아무래도 걸린다. 저자의 의도는 사실상 언어의 신비를 벗기는 것, 즉 신비의 해체일 것이다. 신비라는 애매모호하고 추상적인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저자 자신이 언어를 어느 정도 탈신비화시키고 있으면서도 신비라는 말의 무게에 눌려 다시 신비화로 미끄러져 되돌아가는 아이러니가 만들어진다. 신비라는 말은 결국 어쩌면 이데아라는 중력에 이끌리고 이성이라는 백색(신화)에 포섭되는 촉매가 된다. 아니 장교수는 이 가역반응을 은밀히 즐기는 것은 아닌가? 그의 말을 들어보자.

“언어의 신비, 마치 양파껍질 벗기듯 한 꺼풀 두 꺼풀 벗겨가는데 그 묘미가 있다. 역시 여배우와 언어의 비밀을 벗기는 재미는 공통점?”(p. 125). 그러나 양파 속을 향해서 껍질을 벗기는 것인가? 아니면 껍질 벗기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인가? 그러나 끝까지 벗기다 보면 알맹이가 나타날 것이 아닌가? 이 알맹이(속)는 언어의 ‘규칙’이고
‘언어능력(linguistic competence)’이고 철학에서의 진리, 실재, 이데아가 아닌가?
평자는 장교수와는 달리 언어의 신비 속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탈신비화에 관심이 더 많다. 언어의 탈신비성은 언어의 물성(물질성 또는 사물성이건 간에)에 다름 아니다. 언어의 신비는 영혼이나 정신에서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나 육체에서도 나온다. 따라서 언어의 탈신비화는 언어의 추상성을 벗어나는 것이고 언어의 구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형이상학적인 ‘보편언어’, ‘보편문법’을 주장하는 심층모델주의자이며 이성주의자인 노엄 촘스키를 경계한다. 왜냐하면 장교수가 ‘오늘날 찬란한 언어학의 금자탑을 이룩’했다고 주장한 촘스키의 언어학이란 추상 언어학이다. 언어 현상의 엄청난 물(질)성을 사상해버리고 살을 걷어내어 뼈만 추리는 규칙이나 본질·이데아만을 추구한다. 언어나 말의 역사성, 사회성, 정치성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언어는 기호들의 놀이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언어의 계급·권력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운동권 지식인으로서 러시아 유태계인 촘스키 자신의 개인사에 침윤되어 있는 역사성과 그의 언어이론의 비역사성이 한 인간·학자에게 혼재되는 ‘비밀’은 평자인 나에게는 언제나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장교수는 젊다. 30대 후반의 소장 학자이다. 그 나이에 이만한 책을 쓴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그는 첫 번째 저서를 통해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일반 독자들에게 어렵고 무미건조한(?) 언어학을 이렇게 일상생활과 관련해 대화와 토론과 담론의 장으로 만든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저자의 계획대로 이 책은 여러 부류의 독자들에게 ‘창조적 사고, 혹은 상상력’을 발휘할 기회를 줄 것이 틀림없다. 시작은 반이다. 앞으로 장교수의 학문이 추상표현주의자인 노엄 촘스키를 타고 넘어가 21세기형 언어학으로-랑그에서 다시 빠롤로 발전되길 기대하며 매력있는 ‘대중 철학자’ 글쟁이로서도 대성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