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이 가져다 주는 흥분감은 감출 수 없는 것일까. 밀레니엄 화장품에서 Y2K의 두려움, 조금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밀레니엄 베이비 열풍에 이르기까지 세기말을 빼면 영 얘기가 안될 판이다. 물론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이 세기말 열풍은 학계도 예외가 아니다.

종교,시간 밀레니엄 담론의 서가

1999년, 지구중심의 거대한 십자가 형성이 이루어 지면서 엄청난 재앙이 올 것인가(레상튀리 10권의 72편). 세기말 불안은 올해 초 노스트라다무스 예언 서적을 비롯한 각종 역서들과 함께 서가를 밀고 들어오더니 요즘은 종교로 번지기 시작했다. 노벨상 수상자 포르투칼 문학가 사라마구의 작품인 수도원의 비망록, 예수의 제2복음서가 연이어 출간되고,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진실한 것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라는 영국 철학자 버틀란트 러셀의 화두던지기에서 우에노 노라유키(도쿄대 사회학과)의 ‘종교의 위기’ 까지 종교의 밖에서 종교의 인식을 시도하는 저서도 늘고 있다.
시간에 대한 관심 역시 이러한 밀레니엄 담론의 연장선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발전주의적 현대의 삶에 대한 염증에서 비롯된 게으름에 관한 도서(‘시간’ 칼하인츠 A 저/‘게으름에 대한 찬양’ 폴 라파르그 저/‘시간의 종말’ 장클로드카리 외)가 주목된다.

한편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올 봄 계간지도 세기말 담론들을 쏟아내고 있다. 창작과 비평은 ‘20세기가 21세기를 바라본다’는 기획 아래 아시아 경제문제, 과학기술의 전망과 새 문명 건설이라는 과제 그리고 가족제도와 새로운 공동체에 이르는 지상논쟁을 벌이고 있다. ‘문학과 사회’는 경제와 사상 전반에 걸쳐 20세기를 회고하고 21세기를 전망하는 거대기획을 마련하고 있으며 지난 세기 철학사상의 쟁점과 향후 철학사상계의 지향점 찾기는 ‘철학과 현실’이 시도하고 있다.

우리에게 밀레니엄은 무엇인가

도대체 밀레니엄이 무엇이길래 이 난리인가.
움베르토에코에 따르면 밀레니엄이란 기독교적 ‘성서’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단지 유대교적 시간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서양문명권에서 2천년을 기념하는 해이며, 그들의 달력이 세계적이 되었음을 다시 확인하는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2000년은 20세기의 끝도 21세기의 시작도 아닌 단순한 1에서 2사이의 이행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주체 불능의 화두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새 밀레니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지난달 27일 한국사회연구 협의회(회장:안병영, 연세대 교수)가 개최한 논의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근본을 둔 자리였다. 이 자리는 김지하의 율려사상에 의한 생명 창조 개념을 비롯, 국가와 시민사회의 역할(심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인간교육(정범호, 한림대 교육학과), 한국상황에 대한 경제적 고찰(정창영, 연세대 경제학과)과 같은 밀레니엄에 대한 각분야의 전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밀레니엄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제시라기 보다는 전망하는 분야별 전망에 머물고 있다. 다만 조한혜정 교수(연세대 인류학과)의 성찰적 자세가 움베르토 에코의 시간의식과 괘를 같이하고 있을 뿐이다. 조한혜정 교수는 밀레니엄이라는 화두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서구인들의 경우는 1백년 단위를 넘어 1천년 단위로 성찰하려 하고 있으나 이러한 서구인들의 직선적 시간성과 종말론적 담론은 절충적 시간관념을 가진, 우리에게 심한 위축감을 안겨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다는 것. 따라서 “천년을 사유하기 보다는 1백년을 사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 그나마 가닥을 잡게 해 준다. 시간에 대한 성찰이 우선 이라는, 그래서 나름의 주체를 세워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오히려 설득적인 것은 ‘성찰’에서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지식인의 진지함 때문이다.

계속되는 밀레니엄 논의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당장 내달이면 한국철학사상연구회를 비롯한 각종 학회에서 21세기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세기말적 고민과 밀레니엄논의의 사상적 배경인 유토피아론에 대한 의견들이 다시한번 거론될 것으로 보인다. 계간지들이 거대기획으로 자리잡은 미래논의도 진행될 것이다. 심지어 참여연대 시민 교양 프로그램에서 까지 밀레니엄이라는 화두가 등장할 예정이다.그러나 서가의 논의나 수많은 학술회의는 밀레니엄이라는 화두 자체에 대한 대응 제시가 주를 이룰 뿐 접근 방법자체가 고루하고 성찰적 모습이나 ‘주체’에 대한 고민을 담보해 주지는 못하고 있다.

유행담론을 넘어 미래로

과거에 대한 고민없는 미래는 그 자체로 유의미할 수 있는가에 대한 조심스런 걱정, 미래란 불확실성 속에 던져지는 화두가 혹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갔던 그 수많은 논의들 중의 일부라는 우려, 스치는 바람에 또다시 몸을 추스려야 하는 유행에 민감한 우리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래서 더없이 공허하게 느껴진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세기말적이라 비판받아야 할 것인가. 새 세기의 새싹을 틔우게 할 자극이 될 것인지 밀레니엄 봄바람의 여파는 조금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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