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살고 싶다

위정은


  8월 평균기온을 알려주는 붉은 막대는 올해 들어 확연히 높아졌다. 지난 29년 간 겪어보지 못한 더위였다. 야근을 마치고 막차에 올랐을 때 내 몸은 파김치가 되어있었다. 자정이 가까워 지하철은 한산했다. 다리를 힘껏 벌린 남자가 다리를 압박해왔다. 나는 핸드백을 껴안고 졸기 시작했다. 툭툭, 구두 앞부분이 발로 차였다. 50대 중반의 여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에구. 다리야. 여자는 어깨와 허리를 두드리며 나를 내려다봤다. 슬쩍 옆을 봤다. 옆 자리 아저씨는 허벅지를 훤히 드러낸 젊은 여자로 바뀌어 있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쉴 새 없이 문자를 보내는 손가락이 경쾌했다. 중년 여자는 지하철이 멈추자 이리저리 흔들대며, 아이고고, 를 연발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앉으세요. 여자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지하철 손잡이에 기대 꾸벅꾸벅 조는 동안 몇 번이나 다리가 풀렸다.

  원룸 건물이 빽빽이 들어찬 오르막을 오르는 동안 하얀색 남방이 흠뻑 젖었다. 여름밤은 식을 줄 몰랐다. 방문을 열자 여백 없는 열기가 전신을 휘감았다. 나는 일인용 침대에 누워 검은 빛을 잃은 밤하늘을 지켜봤다. 거대한 자기장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 기분이었다. 찬물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욕조가 뿌옇게 나타났다. 옷을 훌훌 벗어던졌다. 발을 담그려는데, 어렴풋이 말소리가 들려왔다. 응. 잘 다녀왔지. 낯선 여자 목소리였다. 창문을 타고 들려오는 소리였다. 침대는 창문이 있는 벽면에 닿아 있었다.  너무 더워 문을 닫을 수는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진짜야? 이번에는 두부 같은 공기를 쌩하니 베어내는 선명한 목소리였다. 귓속에서 엥엥 거리는 모기 소리만큼 신경에 거슬렸다. 하지만 얼음 욕조가 휘발되기 전에 따라잡아야 했다.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했다. 미간이 당기면서 몸이 희미해지는 느낌이 밀려들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꿈을 향해 바싹 머리를 들이미는데, 머리채가 낚아 채였다. 아, 하하하하하하. 열 평짜리 원룸에 쏟아지는 웃음소리는 경박하고 무례했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다닥다닥 붙은 원룸 건물 중 한 곳을 집어낼 수는 없었다. 창틀에 기댄 팔뚝에 시커먼 먼지가 붙었다. 화장실은 침대로부터 여섯 걸음 떨어져 있다. 샤워기 앞에서 땀과 먼지와 열기를 씻어낼 생각을 하니 부르르 몸이 떨렸다. 하지만 나는 풀썩 침대에 누었다. 

  3층 사는 아가씨 맞지? 어제 출근길에 마주친 남자는 나를 불러 세웠다. 그는 더 마른 내 머리카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혹시 새벽마다 샤워해? 다짜고짜 반말이었다. 야근을 마치고 집에 오면 1시가 넘었다. 하지만 새벽마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닌데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도대체가 말이야, 잠들만 하면 물소리를 튀겨 대니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아가씨 집, 아니었어? 나는 어색하게 짓고 있던 미소를 거뒀다. 저 아닌데요. 남자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한걸음 물러섰다. 여하간 사람들이 개념이 없다니까. 안 그래요? 그는 들고 있던 빗자루로 바닥을 내리치더니 다리를 절룩이며 건물 안으로 걸어갔다. 나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걸음을 옮겼다.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재깍재깍 다가왔다. 천장 벽지는 고향집 것과 닮아있었다. 꽃송이와 잎사귀가 악마 얼굴이나 동물 모양처럼 보였다. 그 작은방에 누워, 속으로만 흥얼댔던 노래가 떠올랐다. 내게 그런 핑계 대지 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 봐. 1993년 당시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강타한 노래였다. 가수는 작달막한 키에 까무잡잡한 얼굴이 볼품없었다. 하지만 콧소리가 강한 독특한 음색은 듣는 사람의 입술을 달싹이게 만들었다.

  하이고, 고 놈, 꼬라지는 희안한 기 노래는 기똥차네. 등 뒤에서 마루를 닦던 어머니가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왔다. 가수가 통 큰 바지를 끌며 무대를 어슬렁거리는 동안 어머니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어머니는 노래의 한 구절만 기억했다. 밥상을 차릴 때도, 빨래를 널 때도 그 부분만 불러댔다. 입장 바꿔 생각을 해 봐. 입장 바꿔 생각을 해 봐. 내가 다음 가사를 일러줘도 그 때 뿐이었다. 엄마. 고모는 언제 가노? 가긴 어델 간다카노. 할매 안계시문 여가 고모집이제. 카면 나는 우야는데. 어머니는 내 방문을 힐끗 쳐다보더니 입술 앞에 손가락을 댔다. 가스나가 몬때꾸로. 고모캉 들으면 을매나 서운하겠노. 들으라고 하는 소리제. 내가 입 속으로 웅얼거리자, 어머니는 못들은 척 마당만 쓸었다. 퍼뜩 드가가 공부나 하그라. 누군 공부하기 싫어서 카나. 방에서는 희미하게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대개 고모는 아랫목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오후 반나절을 보냈다. 모르는 건지, 모른 척 하는 건지 내가 아무리 눈치를 줘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숙아, 이 노래 진짜 좋아, 한 번 들어 봐, 손바닥을 팔락거렸다. 흥이 날 때는 감정을 한껏 실어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는 어머니 앞에 손바닥을 폈다. 머리삔 사게 500원만 도. 시끄럽다. 밥그릇 늘어가 허리가 휘지는데 니까정 성화고. 잇속으로 말을 내뱉던 어머니는 운동화나 똑바로 신으라며 핀잔을 줬다. 운동화는 새끼발가락이 꽉 끼었다. 접혀진 뒷부분을 펴고 앞 축을 쾅쾅 굴러대자 어머니가 주먹을 쳐들었다. 이기, 또 이 칸다. 후다닥 대문을 나서면 운동화 옆면의 요술공주가 병든 비단잉어 비늘처럼 너덜거렸다. 요술공주와 나는 입 맞춰 노래를 불렀다. 내게, 그런, 핑계 대지 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 봐. 니가, 지금,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


  음정이 빠진 노래를 웅얼대는데, 요란하게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내가 사는 건물이 분명했다. 곧이어 창문 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소리였다. 하지만 아래층 다섯 집 중 한 곳을 찍어내긴 힘들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많이 탔네. 굵직한 남자 목소리였다. 그쪽 햇볕이 워낙 좋잖니. 여자의 대답 뒤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맡의 스탠드를 켰다. 지난 생일에 원화가 선물한 <여자의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는 한 해 동안 침대에서 화장실로, 화장실에서 방바닥으로 굴러다녔다. 매번 처음부터 읽은 탓에 책의 절반 이상이 빳빳했다. 지난 번 접어둔 책모서리를 펴고 첫 장을 펼쳐들었다. 곧 글자들이 흔들리다 여백과 글자의 구분이 없어질 것이다. 나는 손에 쥔 책이 스르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는 창문 밖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말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래서 지혜는 어떡하겠대? 나도 얼굴만 잠깐 봤는데 뭘. 선글라스를 써도 멍이 안 가려지더라. 연신 책을 훑어댔지만 신경은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됐다. 남자들은 왜 그러니, 정말. 남자라고 다 그런 거 아니다. 니 여자친구한테 손만 대봐. 너 다신 안볼 줄 알아. 너나 맞지 마세요.

  나는 상습적으로 남자친구에게 맞는다는 여자를 떠올려봤다. 왜 맞았을까. 맞을 만한 짓을 한 걸까, 맞을 짓이라는 게 또 뭔가, 그렇게 맞으면서 왜 헤어지지 않을까, 맞는 동안은 무슨 생각이 들까,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졸음을 밀어냈다. 어깨가 딱 벌어진 사내는 여자의 얼굴을 사정없이 내려쳤었다. 여자의 눈두덩이는 맞기 전부터 시퍼렇게 채색돼 있었다. 이러지 마이소, 말로 하지 와 때립니꺼. 어머니가 등짝을 두드려대도 사내의 주먹질은 계속 됐다. 나한테 왜 이래. 울먹이는 여자의 말에 사내는 머리채를 휘감았다. 이러지 말아요. 여자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숙아.  퍼득 뛰가가 아부지 모셔와라, 퍼득. 피를 뽑던 아버지가 뛰어왔을 때 사내는 쓰러진 여자의 몸을 밟고 있었다. 여자는 얼굴을 가린 채 비명만 질러댔다. 여자는 내 고모였다. 열두 살 여름이었다. 혼자 소주 두 병을 비운 밤이면 고모는 온 몸을 들썩였다. 저리가. 제발, 잘못했어요. 나는 고모에게서 최대한 떨어져 숨을 죽였다. 들썩거림이 잦아들 때 즈음 나는 귀를 막았다. 아악, 아아악. 지옥에 떨어질 때나 지를 법한 비명이었다. 안방의 부모님은 무슨 일이냐며 방문을 열지 않았다. 어슴푸레한 방 안은 고모의 거친 숨결로 가득 찼다. 고모, 괜찮나, 물어보면 부끄러울까봐 나는 일부러 고른 숨소리를 냈다. 고모는 머리맡의 냉수를 단숨에 비워내고 자리에 누웠다. 가끔 고모는 내 얼굴을 빤히 보는 듯 했다. 눈을 떠 고모를 마주본 적은  없었다.


  목청 좋은 여자는 체력도 좋았다. 날씨만 멋진 게 아니야. 남자들도 끝내 줘. 그 끝내주는 남자들이 밥 먹자, 술 한 잔 사겠다 줄을 서더라, 그래서 귀찮았다, 그런 얘기였다. 나는 소리 나게 책을 덮었다. 방바닥으로 책을 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아래층 누군가가 쿵, 하는 소리에 눈을 뜰지 몰랐다. 그가 밤새 잠이라고 설치게 된다면, 안될 일이었다. 나는 선반 위에 조용히 책을 올려놨다. 말소리는 계속 됐다. 저들에게도 뇌가 있을까, 생각하며 스탠드 불을 껐다. 나는 베개 밑에 머리를 쑤셔 박고 시끄러, 시끄럽다고, 미치겠네, 잠 좀 자자, 를 반복했다. 갑자기 말소리가 끊어졌다. 눈이 번쩍 떠졌다. 내 말을 들은 걸까. 아니었다.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내가 외국 남자랑 뭔 짓이라도 했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 니가 지금 그런 식으로 말을 했잖아. 아니면 됐지 왜 성질을 내냐. 외국 남자랑 자는 게 대수냐? 요즘 그런 여자들 많다더라. 말은 쉽다. 난 그렇게 막나가는 여자 아니라고. 알았어, 그만 하자. 응?

  당신 정도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몸을 뒤척일수록 방 안의 산소는 줄어들었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봐요. 세 시가 넘었다고요. 잠 좀 잡시다. 네?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육 개월 만에 만난 사람들이 내 말 한 마디에 입을 다물 것 같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할 말이 많을 것도 같았다. 그래, 오늘만 저러는 거겠지. 매일 그러는 것도 아니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베개를 발밑으로 던지는데, 여자의 웃음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라진 얼음 욕조를 찾고 싶었다.


  드르르륵. 선반 위의 핸드폰이 울렸다. 눈을 감은 채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 진동은 끈질겼다. 나는 이를 앙다물고 폴더를 열었다. 원화의 메시지였다. 술기운은 문자의 모음과 자음을 갉아먹은 모양이었다. 시 분 디 니 방 도차.

  집을 들고 도망갈 수 있다면, 방을 이불에 돌돌 말아 원화가 도착하기 전에 빠져나가고 싶었다. 잠든 척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녀는 현관문 손잡이를 흔들고 대문을 두드리며 정숙아, 정숙아, 소리를 질러댈 것이다. 복도에 울려 퍼지는 내 이름은 이웃들의 얕은 수면을 파고들 게 분명했다. 세 시 삼십오 분. 기상시간까지는 세 시간도 남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현관문 잠금쇠를 푸는데 부아가 치밀었다. 하여튼 자기 밖에 몰라요. 내가 출근해야 하는 거 뻔히 알면서 말야. 원화 앞에서는 속으로 삼키는 말들이었다. 번화가에서 원화 집까지는 택시비가 만만찮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술 좋아하는 원화를 속없이 챙겨주던 친구들은 지난 해, 약속이나 한 듯이 결혼을 해버렸다. 하룻밤만 참으면 되잖아. 매일 밤 이러는 것도 아닌데. 나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잠시 졸았다. 고개가 심하게 꺾여 눈을 떴는데,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원화인 듯 했다.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정숙아, 나 왔, 나는 황급히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쉿. 조용히 하고 들어와. 원화의 등 뒤에서 현관문이 시끄럽게 닫혔다. 아차, 했지만 소용없었다. 휘청거리며 방으로 들어서는 원화의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방이 왜 이렇게 덥니. 원화는 선풍기를 자기 쪽으로 돌리더니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목덜미를 긁어대던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안되겠다. 나 샤워할래.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원화는 욕실로 들어갔다. 이어 세찬 물소리가 바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제 마주친 남자가 시뻘건 눈으로 물방울 개수를 세고 있을 것만 같았다. 수다는 끊이지 않고 흘러들어왔다. 거리낌 없는 여자의 웃음소리에 체온이 높아졌다. 나는 선풍기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고모는 매사 거침이 없었다. 여름이면 얇은 티셔츠 아래로 새빨간 브래지어가 비쳤는데 신경 쓰지 않았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옷이 그게 뭐냐, 한 마디를 하면 반찬이 맛이 없다, 방이 좁아 답답하다, 오빠는 자가용 대신 봉고를 고집하는 이유가 뭐냐, 열 마디를 했다. 아버지는 자주 헛기침을 했다. 어머니는 휴지가 너무 빨리 닳는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리도 눈치가 없을까, 나는 혀를 끌끌 찼다.

  어머니와 고모와 나는 모두 양띠였다. 아버지에게 고모 닮았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던 나는 아버지의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뜯어봐도 비슷한 구석은 없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이라 착각했나보다 했다. 실제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고향집을 떠나와 고모와 같이 산 시간이 길지 않다고 했다. 커다란 가죽가방을 들고 내 방에 입성한 고모는 촌스러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서울말을 썼다. 어머니는 고모가 서울로 시집을 갔었다면서 슬쩍 말꼬리를 흐렸다. 우리 잘 지내보자. 머리를 쓰다듬는 고모의 손이 어색해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혼자 쓰기에도 방은 좁았다. 내 책장과 옷걸이는 마루 한 귀퉁이로 밀려났다.

  정숙아, 이거 입어 봐. 열두 번 째 생일날 고모는 속옷을 내밀었다. 진홍색 바탕에 꽃무늬가 수놓아진 팬티였다. 내가 팬티를 손에 쥔 채 가만히 앉아있자 고모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친구들 중 그런 속옷을 입는 애는 아무도 없었다. 놀림 당할 게 분명했다. 어머니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른이 주시마는 고맙십니다, 카고 받아야지. 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인사를 했다. 예쁘지? 한 번 입어 봐. 고모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내가 힐끗 눈치를 보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모는, 아한테 뭐하러 이런 비싼 걸 사줍니꺼. 앞으론 이러지 마이소. 아니에요, 언니. 하나 밖에 없는 조칸데 내가 챙겨줘야죠. 새 팬티를 입은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엉덩이와 음부를 감싸고 있는 꽃잎 탓인지 온몸이 간질거렸다. 고모가 안정적으로 코를 골자 나는 연분홍 순면 팬티를 꺼내 입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내 속옷 상자는 화려한 속옷들로 채워져 갔다. 

  

  오렌지색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은 원화가 비틀대며 냉장고로 다가갔다. 니 맥주 냉장고에 넣어 놨어. 역시 정숙이 너 뿐이야. 맥주캔 따는 소리는 경쾌했다. 나도 모르게 침이 고였다. 맥주가 원화의 목구멍을 넘어가는 동안 선풍기와 시계바늘, 이웃집 여자와 그녀의 친구가 동시에 침묵했다. 나는 일부러 헛기침을 했다. 너도 한 잔 할래? 아냐. 됐어. 원화는 한 번 더 권하더니 새우깡 봉지를 열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과자를 집어 먹었다. 새우깡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목구멍에 짠 내가 걸렸다. 나는 원화의 몸에 맺힌 물방울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물통을 꺼내려 일어서는데, 원화가 바닥을 굴러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제 사둔 생수는 바닥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어, 다 마셨네. 물 더 없니? 물통을 비운 원화는 바닥에 벌렁 누웠다. 잠잠하던 웃음소리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원화와 여자 중 누가 더 불청객인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어머니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헛생각 말고 잠이나 자라고 말할 것이다.

  저 여자는 웃는 게 왜 저러냐? 원화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침대를 흘깃 쳐다봤다. 내가 침대에서 자도 돼? 응. 그녀가 내 쪽을 보며 옆으로 눕자 두툼한 뱃살이 아래로 쏠렸다. 브래지어 사이로 젖가슴이 흘러나왔다. 지난 번 만났을 때보다 살집이 늘어난 듯 했다. 근데 정숙아, 너 요새 무슨 일 있니? 왜. 원화가 애처롭다는 눈빛을 보였다. 기미가 왕창 늘었네. 나 다니는 스킨 캐어 샵 소개 시켜줄까? 나는 말없이 옷장에서 얇은 이불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불 꺼도 되지. 응. 원화가 입을 다물자, 그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너도 지하철에서 다리 벌리고 앉니? 내가 무슨 아저씬 줄 아냐. 지하철에서 다리 쩍 벌리고 앉는 인간들 제일 짜증나. 며칠 전에 내가 아저씨 둘 사이에 앉았는데, 양쪽에서 눌러대는 통에 결국 일어났잖아. 근데 웃긴 게 뭔 줄 아니. 뭔데? 덩치 큰 아저씨가 그 자리에 앉으니까 둘 다 다리를 오므리는 거야. 하하하, 재밌네.

  누운 채로 맥주를 홀짝이던 원화가 벌떡 일어났다. 아, 진짜 시끄럽네. 원화는 침대 위를 무릎으로 기어 창문으로 다가갔다. 달려가 대문을 발로 차버릴 거라던 그녀 역시 소음의 출처를 찾지 못했다. 다시 자리에 누운 원화가 다정하게 나를 불렀다. 정숙아. 왜. 바닥 불편하지 않아? 괜찮아. 근데 정숙아. 또 왜? 나 선풍기 좀. 조금 있으면 동이 터올 것이다. 그 전에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다. 선풍기를 끌어다 침대 쪽으로 고정시켰다. 이마, 목덜미, 겨드랑이, 허벅지 사이에 땀이 맺혔다. 나는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정숙아. 원화가 다시 나를 불렀다.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자 이번에는 내 어깨를 쿡쿡 찔러댔다. 야. 자는 거야? 응. 대답하는 거 보니까 아직 안자네.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원화는 몸을 들썩이자 침대 스프링이 끼익 거렸다. 신경이 곤두섰다. 야아. 내 말 좀 들어 보라니까아. 자려는 사람을 들쑤시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원화가 알리 없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전날 밤, 잔뜩 웅크리고 잠을 청하는데 고모가 어깨를 찔렀다. 숙아, 자니?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너 말이야, 진짜 서울 갈 거니? 내 서울 가면 고모도 좋다 아이가. 방도 혼자 쓰고. 불쑥 대꾸를 하고선 혀를 깨물었다. 얘는, 내가 언제 혼자 방 쓰고 싶다고 했니? 그럼 뭔데. 너 서울에 올라가면, 나도 거기 가서 살면 안 될까? 내가 너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다 해줄게. 응? 잠이 확 달아났다. 내가 벌떡 일어나자 고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숙아. 왜 그래.

  고모가 내 팔을 붙잡자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됐다. 나는 고모의 손을 뿌리쳤다.  내는, 고모라 카면 진절머리가 난다. 아나? 수, 수, 숙아. 고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서울 간다케도 고모랑은 절대 안 산다. 칠 년이나 괴롭혔시믄 됐지 누구 인생 조질 일 있나. 벌컥, 방문이 열렸다. 문 앞에 어머니가 서 있었다. 이기, 제 정신이가. 당장 나온나. 어머니는 나를 끌어내더니 어깨며 등허리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대학이고 뭐고 다 때리 치아라. 인간도 덜된 기 공부 해가 뭐하노. 내 인생인데 엄마가 왜 카는대. 솔직히 엄마도 고모라 카면 엉성시럽다 아이가. 갑자기 어머니가 우뚝 멈춰 섰다. 고모, 고모예, 왜 이랍니꺼. 방문 사이로 벽에 머리를 찍어대는 고모의 모습이 보였다. 숙이 아부지, 당장 나와 보이소. 고모가, 고모가. 다급한 목소리에 아버지가 뛰어나왔다. 고모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오빠, 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아버지는 말없이 고모의 머리를 가슴에 안았다. 눈알 가득 눈물이 맺혀 목울대가 저려왔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피 맛이 났다.

  대학시험은 어려웠다. 터벅터벅 운동장을 가로지르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쟈 봐라. 시험 완전 조짓는 갑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나에게 위로와 동조가 쏟아졌다. 어머니는 원서 살 돈을 주지 않았다. 나는 저금통을 깨서 원서를 썼다. 어델 가든동 그 노무 성질머리 안 죽이면 평생 고생 할끼다. 알겠나. 경기도 소도시로 떠나는 고속버스 앞에서 어머니는 석 달 만에 내 손을 마주잡았다. 성의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체한 것처럼 갈비뼈 사이가 아려왔다.


  나는 몸을 일으켜 원화를 올려다봤다. 나 어떡하면 좋으니. 원화는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새로 등록한 헬스클럽의 강사가 문제였다. 오늘 그 사람이랑 술 마셨어. 왜 그 남자랑 가지 않고 내 방으로 왔냐고 묻고 싶었다. 그랬어? 여럿이서 마신 거였는데. 말을 하다 말고 원화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클클클,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그 소리가 커지지 않을까 눈을 치켜떴다. 목소리 좀 낮추라고 말하면 원화가 기분 상해할 것 같았다. 조금 만 더 지켜봐야지, 눈치를 살폈다. 그 사람이 내 어깨에 손을 얹더라고. 그랬어?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계속 두르고 있었는데, 나쁘지 않더라. 좀 떨리기도 하고. 그 사람도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거겠지, 그지? 나는 남자의 행동이 호감이 아닌 습관 같았다. 회식 자리에서 손잡고 어깨 잡고 다음날이면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로 지나가는 남자들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나는 말을 아꼈다. 원화는 얼굴을 붉히며 어깨를 흔들어댔다. 어쩜 좋아. 사실 지난 번 헤어진 남자친구한테서 연락이 왔었거든. 너 기억나지? 명식이 말야.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바늘은 네 시를 넘어서 있었다. 속으로 하품을 삼켰더니 눈물이 나왔다. 원화가 고개를 돌린 동안 슬쩍 눈매를 훔쳤다. 헬스클럽 강사의 근육이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뒷말은 서서히 흐려져 들리지 않았다. 눈이 감겼다. 눈을 떠야지, 하는데도 떠지지 않았다.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서늘한 냉기가 코끝에 걸리는 듯 했다. 

  야, 김정숙. 내 이름이 앙칼지게 발음됨과 동시에 등으로 두터운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눈이 번쩍 떠졌다. 어, 어?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쇼핑하고, 운동하고, 요리학원만 다니는데 얼마나 무료할 것인가, 모처럼 왔으니 잘 참고 보내야지, 깊게 숨을 들이켰다. 화가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면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면 차오른 화가 배꼽으로 내려가 똥구멍에서 옴찔거렸다. 나는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숙아. 남으 입장 생각해주마 세상 천지 나쁠 일이 없데이. 어머니의 말이 옳았다. 친구에게도, 회사에서도 나를 죽이면 만사가 편했다. 정숙아, 늦어서 미안해. 길이 막혀 약속 시간에 한 시간을 늦은 친구에게 악다구니를 쓸 필요는 없었다. 괜찮아, 한 마디면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한 달을 공들인 광고 기획안이 최 대리에게 넘어갔을 때 억장이 무너졌지만, 인상을 구기지 않았다. 대신 화장실 변기 위에서 숨죽여 울었다. 광고주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면 나보다는 최 대리가 적격이라 생각하자 눈물이 멈췄다. 약간 붉어진 눈을 감추고, 최 대리님, 더 필요한 자료 있으면 말씀하세요, 하자, 최대리가 환한 웃음을 보였다. 팀장도 정숙 씨 밖에 없다며 어깨를 다독여줬다.

   박 대리가 벗어둔 신발에서 썩은 내가 올라올 때도 그랬다. 점심 때 먹은 밥을 토할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구두 속에 발을 구겨 넣고 있으면 답답할 것이다. 있는 힘껏 코를 문지르고, 코 주위에 핸드크림을 발라두면 구역질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구두를 벗지 않았다. 회식 자리에서 고기를 구울 때도, 화장실에서 새치기를 당했을 때도 괜찮다며 미소를 보였다. 등짝을 맞지도, 싫은 소리도 듣지 않았다. 명치끝이 단단하게 맺힐 때면 까스활명수를 두 병 씩 마셨다. 그럴 때면 하이고 우리 딸, 다 키았네, 대견해하는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봐라, 니 하나 참으면 세상이 편타 아니가. 안다, 내도 인자 다 컸다. 쯧쯧, 이 봐라. 니는 안즉 멀었다. 어른이 말씀하시거덩 예, 케야지 토 달기는. 예. 어머니. 알겠습니다.

 

  니 생각에는 어때? 원화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 그 사람 진짜 잘 생겼거든. 성격도 화끈하고. 완전 내 타입이야. 그런데 조건은 명식이가 훨씬 좋아. 직장도 반듯하고. 하지만 걔는 생긴 게 별로야. 꼴에 다른 여자한테 눈이나 돌리고 말이지. 나는 원화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눈두덩이에 쌍거풀 수술자국이 선명했다. 원화는 몸에 딱 붙는 옷을 즐겨 입는데, 그 때마다 두툼한 뱃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런 옷 입으면 불편하지 않느냐고 돌려서 물으면, 불편할 게 뭐 있어, 했다. 남들이 쳐다보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는 원화의 뱃살을 몰래 쳐다보다 고개를 숙였다. 원화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여자의 웃음소리가 침묵을 파고들었다. 대책 없는 여자라며 원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남의 험담에 동조하기는 싫었다. 나는 원화의 눈길을 어영부영 피해버렸다. 눈을 부칠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모래시계의 한줌 남은 모래를 지켜보는 기분으로 원화를 바라봤다. 술기운이 가셨는지 넓적한 얼굴에는 붉은 기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내가 퇴근할 때까지 침대를 차지하고 누워있을지 몰랐다. 아니, 그러기엔 방이 너무 더웠다. 나는 멍하니 벽시계를 바라봤다. 원화의 시선이 느껴졌다. 너 무슨 생각해?  아무 생각도 안 해. 나는 출근준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다섯 시 반에 샤워를 하고, 화장을 하고, 여섯시 반에는 나서야지,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을 하나 먹고 지하철역에 가면.

  너 진짜 못됐다. 원화가 두 팔을 엇갈려 끼더니 한 마디를 쏘아붙였다. 내가 대꾸를 하지 않자, 언성은 조금 더 높아졌다. 난 너한테 감추는 거 없이 다 말하잖아. 그런데 넌 맨날 입을 꽉 다물구선. 감정이 복받치는지 원화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별 거 아니라고 했잖아. 여간해서는 남의 말을 자르지 않는 내가 원화의 말에 끼어들었다. 원화가 바닥으로 내려와 앉았다. 그게 지금 말이 되니? 내가 너한테 말하고 있었잖아! 날선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덩달아 여자의 웃음소리까지 들려왔다. 이번에는 두 명이 같이 웃어댔다. 미간이 확 당겼다. 현기증이 일었다. 원화야. 나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원화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팔을 잡았다. 원화야. 단호한 목소리에 놀랐는지 그녀는 살짝 말을 더듬었다. 왜, 왜 이래. 목소리 좀 낮춰. 너무 시끄럽잖니. 멍해 있던 그녀가 콧방귀를 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부탁인데 할 말 있으면 조용하게 해. 다른 사람들은 잘 시간이라고. 이것 봐. 또 잘난 척이네. 김정숙, 너 진짜 그렇게 살지 마. 뒷목이 뻐근해졌다. 목을 주무르자 손바닥이 끈적거렸다. 온몸이 서서히 뜨거워졌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삼각 김밥의 종류를 떠올렸다. 오늘 먹을 김밥을 고르는 동안 원화의 화가 가라앉길 기대했다. 너무 조용했다. 원화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는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 진짜, 나쁘다. 단어마다 몸이 들썩거렸다. 내가 뭘 잘못한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을 꼭 깨물었다. 방은 너무 더웠다. 내쉰 숨을 고스란히 들이마시는 기분이었다. 샤워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동이 트지 않았다. 원화에게 휴지를 건넸다. 울지 마. 이제 그만 자자. 원화는 휴지를 내팽개쳤다. 자자는 말이 나와? 그렇게 속으로 삼키고 살면 로또라도 당첨된대? 나는 가만히 원화를 바라봤다. 너도 말 좀 해. 응?

  나는 로또 당첨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조용히, 평화롭게 살고 싶은데 왜 다들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알 수 없었다. 뒷목을 주물렀지만 단단하게 뭉친 근육은 풀어지지 않았다. 목을 돌려도, 어깨를 돌려도 소용없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가 벗어둔 옷들을 집어 들었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옷가지가 원화의 얼굴에 닿았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입고 나가. 시계소리도, 선풍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원화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옷을 입기 시작했다. 당황했는지 셔츠 단추를 잠그는 손가락이 떨리는 게 보였다. 너 진짜 이러는 거 아니야. 원화는 흐윽, 흐윽, 울음소리를 냈다. 나도 울고 싶어졌다. 밤새 한 숨 못 잤고, 이제 곧 출근을 해야 한다. 현관문 앞에 선 원화가 돌아서더니 울먹이며 말했다. 앞으로 전화도 하지 마.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려는 원화의 팔을 붙잡았다. 말해 봐. 내가 뭘, 뭘 그렇게 잘못했니.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정말 모르겠냐는 표정이었다. 원화가 입을 열려는 순간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졌다. 됐어. 빨리 나가. 꺼지라고. 당장. 현관문이 닫혔다. 계단을 내려가는 원화의 발자국 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하늘이 묽은 청색으로 밝아졌다. 말소리는 아득하게 웅웅거릴 뿐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틀에 몸을 기댔다. 눈물이 흘러 입술에 닿았다. 목울대가 뻐근해졌다. 헛기침을 하려고 했는데 신음 비슷한 게 흘러나왔다. 흐음. 흐음. 흐어엉. 울대가 터질 것처럼 조였다. 목을 가다듬을 생각이었는데 들이킨 공기 때문에 목구멍이 트였다. 나는 목구멍을 열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뭔 청승이고. 누가 보면 니 에미 초상난 줄 알겠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더 크게 악을 썼다. 이불을 휘젓고, 선반 위의 액자를 내동댕이쳤다. 유리가 깨졌다. 핸드폰을, 리모콘을, 책을, 베개를, 손에 잡히는 대로 던졌다.

  무슨 소리 안 들리니? 로즈마리 화분을 던지려는 순간, 그들이 반응을 보였다. 나는 화분을 내려놓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가슴이 들썩거렸다. 누가 싸우나? 뭐 깨지는 소리 같았지. 그들의 목소리 사이를 내가 파고들었다. 이봐요. 목이 잠겨 목소리가 낮게 후들거렸다. 조, 조용히 좀 해주실래요. 소리가 너무 작았다. 이 상황에서, 해 주실래요, 라니, 머쓱해졌다. 얼굴을 타고 흐르던 눈물 줄기가 희미해졌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몇 시니? 벌써 다섯 시가 넘었네. 난 가봐야겠다. 말소리는 사라지고 세차게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방바닥에는 책, 베개, 핸드폰, 액자, 리모콘이 고작이었다. 뺨에 말라붙은 눈물을 쓰다듬자 헛웃음이 났다. 여섯 시. 출근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 됐다. 나는 샤워기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눈물과 땀과 먼지가 물줄기를 타고 수채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벌겋게 부어오른 눈덩이 위로 계속 찬물을 퍼부었다. 새벽 공기는 데워지기 전이었다. 매일 가던 편의점을 그냥 지나쳤다. 지하철 안은 시원했다. 밤새 지친 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옆 자리에 앉은 남학생의 이어폰으로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삐져나왔다. 나는 망설이다 학생의 어깨를 툭툭 쳤다. 살짝 쳐서 그런지 반응이 없었다. 조금 더 힘을 줘서 어깨를 흔들었다. 저기, 미안한데. 학생이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이어폰을 뺐다. 소리 조금만 낮춰줄래. 내가 어제 잠을 못자서. 의아하게 쳐다보던 녀석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볼륨을 낮췄다. 찢어지는 남자보컬의 목소리와 드럼과 베이스 소리가 녀석의 귓속으로 얌전히 빨려 들어갔다.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환승해야 할 역이 가까워졌지만 눈은 떠지지 않았다. 아주 먼 곳으로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감은 채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모서리가 부서진 게 느껴졌다. 손 안에 땀이 찼다. 나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간지러워서 웃음이 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쳐다보든 말든 나는 허리를 꺾어대며 깔깔거렸다. 더위가 한 걸음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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