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어 집권에서 세계 3대 사회학자로 거론되는 기든스(A. Giddens) 방한까지, 학계는 물론
정치권에서까지 ‘제3의 길’, 즉 새로운 이데올로기 열풍이 불고 있다. 게다가 오는 23일에
는 미국 뉴욕에서 블레어 영국 총리, 클린턴 미국 대통령 등이 ‘제3의 길’의 가능성 및
미래를 주제로 심포지움을 열 예정이어서, 이 열풍은 전세계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유럽좌파, 새로운 희망인가

이 문제는 유럽의 좌파는 물론 전세계 좌파운동진영에게 ‘좌파정치의 새로운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엄연한 반대 입장을 공표하고 있는 영국 노동당, 독일 사민당 등이 정권을 잡은 상황에서
세계 정치는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것인가.

우선 유럽의 정권을 잡은 이들은 좌파도 신좌파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할 필요가 있
다. 이들에 대한 성격 규명은 주도권 세력(신자유주의)이나 좌파진영에 매우 유효하다.

이를테면 유럽의 신중도좌파가 정권을 잡았다는 것에 대해, 주도권 세력은 아직 좌파가 정
권을 잡을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선전할 필요가 있고, 좌파진영 역시 좌파적 노선을 곡해하
지 않는다는 기조에서 이 제3의 길이란 것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이 점은 기든스나 블레어 역시 “(이것은)단순히 좌파와 우파 사이의 협상이 아니며 중도파
와 중도좌파의 본질적 가치를 추구한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이 사실은 유럽의 좌파 활
동가들이 “이제 유럽에 더 이상의 좌파는 없다”며 고개를 젓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유럽을 점거하고 있는 이들 신중도좌파의 ‘제3의 길’이란 것은 새로운 이데올로
기는 커녕, 이전 유럽을 한번 휩쓸었던 체제타협적 사민주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그 밥
의 그 나물’에 그치는 것은 아닐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제3의 길’이란 사민주의와의 변
별성을 갖지 못한다.

우선 기든스가 ‘제3의 길’을 새로운 이데올로기임과 동시에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라
고 설파하는 논리를 점검해보자. 불행스럽게도 블레어나 슈뢰더가 신자유주의를 혁파할 가
능성은 그리 밝지 않다. 우선 유럽이라는 배타적인 대륙권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주범이라는
점이다.

계급타협체제에 불과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주류세력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생산성 향상과 국제경쟁력 강화 및
생산입지의 확보 등을 통한 경제성장(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핵심)을 계급타협체제와 사
회적 동반자 관계 형성을 위한 불가피한 전제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제3의 길을 비롯한 유럽의 좌파정권 물결이라는 것은 신자유주의를 극복하지 못한채
종래의 서구 자본주의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 체제에 그칠 공산이 크다. 가령 기든스와 그
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블레어가 종종 “경제정책에 관한 우리의 접근방식은 자유방임주
의도, 국가간섭주의도 아니다”라고 강조점을 두는 것도 이들의 정책노선이 신자유주의로부
터 자유로울 수 없을 반증하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도 유럽연합을 주도(서독시절부터)했던 전례가 일종의 국가주의로 남아 있는 것
이 사민당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연합이야말로 자기 세력의 경제성장을 주목
적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프로젝트이며, 새로 독일의 정권을 획득한 슈뢰더 역시
이러한 ‘유럽연합’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독일 특유의 국가주의 곧 신자유주의에 쉽게 발
을 끊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

이들의 계급론 역시 기존 좌파계급론에 비해 부실한 감이 없지 않다. 이들은 “부르주아와
노동계급의 구분은 더 이상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며 “새롭게 등장하는 중간계급”에
주목한다. 이 점은 기든스가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하며 시민사
회를 부각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좌파정치가 부르주아 계급을 지목했던 대신, 블레어나 슈뢰더가 신중도좌파의 주요 적으로
‘범죄’를 지목한 것도 이와 관련이 깊은 부분이다. 근대의 ‘감옥제도나 병원제도 등에서
언급되어지는 사용방식으로서의 제도’를 비판하며 성찰적 근대화를 강조한 기든스마저도,
블레어에게 이 부분만큼은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는지 매우 아이러니컬한 측면이 엿보인다.
실례로 프랑스 월드컵 축구를 전후해 블레어는 느닷없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데,
요주의 범죄자로 훌리건(hooligan)을 지목한다. 범죄자라는 말보다 희생양이라는 말이 더욱
어울린다.

이들은 월드컵 귀국 직후 정리해고라는 쓴잔을 마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훌리건의 유래 또
한 80년대초 영국 보수당 정권 하에서 사회복지 축소와 빈부격차 심화에 반발한 실업자와
빈민층이 축구장에서 울분을 폭발시킬 수밖에 없었던 계급적 희생이라는 점에서, 이들에 대
한 ‘감시와 처벌’은 근대성에 대한 대안적 정책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즉 지구 전체가 신자유주의, 신중도노선 등 소유제 생산양식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계급갈
등을 무마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설사 계급갈등을 완화시키더라도 그것은
계급타협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제3의 길’의 주장이 맞아 떨어져 계급구성이 새로운 어
떤 것으로 바뀌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근대의 범주에서 맴돌고 있으며, 문화정치적인 면에서
마이너리티(훌리건 뿐만 아니라 그외의 어떤 것이라도), 즉 ‘피착취계급’을 잔존시킬 수밖
에 없을 것이다.

녹색당과의 연정에 기대

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제3의 길’, ‘제3의 이데올로기’, ‘뉴 뉴 레프트’등 다양한
호칭에서 드러나듯 아직 명확하게 개념이 정리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즘 ‘좌
파’라고 부르고 있는 이들이 사실 명백한 의미에서의 ‘좌파’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계급타협 체제의 ‘역사적’,‘이데올로기’ 영향이 유럽 주류좌파(‘신중
도좌파’)들의 ‘체제 개량주의적’ 사고에 뿌리깊게 남아 있는 한 이들이 제안하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대안으로서의 소용가치가 없다는 의미이다.

유럽 주류좌파의 체제 종속적인 운동경향은 새로운 좌파정치의 전망을 밝히는 데 먹구름만
드리우고 있다. 생산 및 소비 전영역에 걸쳐 확대되고 있는 자본의 공세에 저항하기 위한
대안으로 사회·역사적 블록의 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유럽 주류좌파
세력들은 ‘체제변혁적’ 대항담론이나 저항행동을 유도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
적으로 유럽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대변해왔던 사회민주당 계열은 이미 ‘신자유주의 지배
연합’에 편입됐을 뿐이다.

다만 유럽이 전세계 좌파 정치세력에게 위안을 주는 점은 독일 ‘녹색당’의 사민당 연정
집권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최근 독일에서는 동성간의 혼인이 합법화되
는등 반자본적 차이의 정치학이 실현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이들이 신중도좌파의 연정을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 갈지는 변수지만,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유럽의 신자유주의’를
생태주의적 세계관으로 치유할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비록 조금의 위안이긴 하지만, 이
는 포스트포디즘 체제하 저항정치의 ‘다양성’ 속에서 ‘어떤 매개로 연대할 것인가’라는
좌파세력의 화두에 의미 있는 작업으로 기대된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