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항쟁 이후 원의 본격적 간섭이 시작되면서 나라는 이미 `고려'라는 단일
주권 국가의 위상을 잃어버렸다. 고려의 왕은 몽고의 공주와 결혼해야 했으며
, 가족 관계를 매개로 몽고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몽고풍의 변발과
호복을 제외하더라도 왕의 연호에 `충'자를 붙여 원에게 충성을 맹세해야했다.

한편, 이러한 외부적인 요인과 더불어 내부적으로는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
장한 권문세족들이 대토지를 소유함으로써 공전과 공민을 농장으로 흡수하여
국가재정을 송두리채 흔들어 놓았다.이러한 상황에서 중국내 원세력이 약화되
고 한족이 세운 명이 세력을 떨치는 국제적 변혁기는 원간섭기 이래 축적되어
온 사회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게된 것이다.

바로 여기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개혁자 신돈이다.

신돈이 가장 중점을 두고 실시한 것은 노비와 토지에 관한 개혁이었다. 전민
변정도감의 설치로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를 해방
시키는 등 일련의 조치가 취해졌다. 이는 권문세족의 경제적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으로, 농장에 흡수되었던 공전과 공민을 환원 시킴으로써 민간 경제
는 물론 국가재정을 강화시키는 역할까지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정책이 백성
에게는 환영 받았지만 권문세족들에게는 "중이 나라를 망친다"는 혹독한 비판
을 받게 됐음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신돈은 성균관을 건립하여 유학을 발전시키고 정몽주, 정도전
등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를 학관으로 재직하게 하는 등 새로운 인재양성에 힘쓰
기도 한다. 그가 신흥 사대부의 양성에 힘쓴 이유는 그들이 권문세족에 의해
번번히 사회진출이 좌절되었던 계층 이었으며 사회개혁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기득권층
에 대한 대응세력을 성장시켜 사회전반이 재편되야 개혁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 그의 개혁은 실패한다. 권력의 위기
를 느꼈던 권문세족의 모함에 의해 수원으로 유배당하고 급기야 사형에 처해졌
기 때문이다.

개혁의 오른팔이었던 신돈 없이 더구나 아직 신흥사대부의 권한이 사회전반을
개편할 만큼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한 것은 예고된 사
실이 있었는지 모른다. 한때 왕권강화와 정치개혁을 모색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왕은 사랑하는 노국공주마저 죽자 만년을 방탕한 생활로 보내다 결국 부
원파 세력 권문세력에 의해 살해되기에 이른 것이다.

14세기 개혁의 두 주체는 역사의 그늘에 묻혀 버렸다. 그리고 그 시대에 "비
를 맞으며 밭이랑에서 김을 매니 검고 추악한 몰골 사람의 형상이 아니네"라고
표현되었던 한숨 짓는 민중의 모습과 원이란 외세를 등에 업은 부패한 권문세
족. 그리고 그들을 일소하지 못했기에 영원히 말이 없는 공민왕과 신돈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그럼에도 그들의 개혁이 의미를 갖는 것은 개혁
안 곳곳에 숨어있는 `민중'의 의미 때문일 것이다.

<홍윤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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