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재위 기간은 12년에 불과했다. 게다가 반정군에 의해 폐위된 그의 기록은 실록이 아닌 ‘연산군일기'로 남아 있다. 그러나 영상시대에 그는 가장 널리, 가장 자주 스크린의 제왕으로 등극하는 스타가 되었다. TV시리즈에서도 연산군은 주기적으로 리메이크 되는 소재이며 시청률 또한 따 놓은 당상으로 통한다.

1961년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은 연산군에 관한 최초의 영화로서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어 62년 신상옥 감독은 다시 한 번 신영균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폭군 연산’을 만들었다. 하지만 연산군에 대한 평가는 박종화의 소설 『금삼의 피』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연산군은 다만 네로 황제에 필적할 폭군일 뿐이었다.

1987년 연산군은 임권택 감독이 만들고 유인촌·김진아가 주연을 맡은 ‘연산일기’를 통해 다시 논란의 핵심이 되었다. 강수연·이대근 주연의 ‘연산군’과 동시에 개봉하며 혈전을 방불케 했던 두 영화의 맞대결은 일단 흥행 면에서는 ‘연산군’의 승리로 보였다. 그러나 장녹수와의 성애에 빠진 연산군에 초점을 맞춘 ‘연산군’은 사실상 그저 그런 에로물로 치부됐던데 비해, 임권택의 ‘연산일기’는 연산군에 대한 재해석이 돋보였다.

관객들은 연산군에게서 한국판 ‘햄릿’을 보았던 것이다. ‘연산일기’의 연산 유인촌이 누구인가. 그는 데뷔 이후 햄릿 역할만 네 번이나 도맡았던 배우다. 사실 그만큼 햄릿에 어울리는 배우는 없다. 유인촌이 ‘연산일기’에 캐스팅 된 것도 TV시리즈에서도 연산군 역할을 도맡았던 것도, 그가 ‘한국의 햄릿’이라는 데서 연유한다. 그는 그렇게 햄릿이면서 연산군이었고 두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훌륭한 가교였다.  

유령이 된 아버지와 국왕이 된 삼촌이라는 두 거대한 가부장의 권위에 눌린 햄릿은, 당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한국 사회에 대한 비유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이 문화예술계를 지배하는 동안, 연산군은 마더콤플렉스 환자의 교본이나 다름없었다. 한국 연극계가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 ‘햄릿’은 연산군의 인간적 고뇌를 통해 셰익스피어 극 속의 인물이 아닌 바로 우리 시대 청년의 표상이 되었다.

따라서 장녹수 또한 단순한 요부가 아닌 복합적 인물이 되었다. 다시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한 사내의 욕망을 정확히 꿰뚫고 그 지점을 파고든 것이 장녹수였고, 잃어버린 어머니의 품을 재연하는 것이 곧 이들의 성적 유희였던 것이다.

2005년, 연산군은 새로운 모습으로 천만 관객을 찾아왔다. 역대 흥행 기록을 갈아치운 ‘왕의 남자’는 왕이되 왕이 아니었던 이 지독하게 불운한 한 남자와 그의 시대를 ‘광대’라는 코드로 이해하고 그의 삶을 화려한 이벤트로 치장하는 데 성공했다. 장녹수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어지고, 연산보다 훨씬 앳되게 그려진 것도 이전의 영화들과는 차별적이다.

탈역사적이고 실상 고증과도 무관한 그 수많은 유희와 공연과 이벤트들은 그러나 연산군의 극적인 삶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렇다. 그는 왕이기 이전에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매혹적인 광대였다. 그의 끝나지 않을 사모곡의 비밀은 바로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김원 (데일리 서프라이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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