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를 유랑하며 
예술을 꽃피운 나그네 
바우덕이와 함께 
신명나게 한판 놀아보세 

 

바우덕이 사당에 설치된 바우덕이 동상. 그는 조선 후기 최고의 예인으로 평가 받는다. (사진출처 문화체육관광부 문화포털)
바우덕이 사당에 설치된 바우덕이 동상. 그는 조선 후기 최고의 예인으로 평가 받는다.
(사진출처 문화체육관광부 문화포털)

 

조선 후기 천재적인 예인이 바람처럼 등장했다. 안성 사당패와 남사당패를 통틀어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바우덕이’다. 미천한 출신에 거리를 떠돌며 놀이판을 벌이는 예인이었으나 그의 재능은 폭풍처럼 조선을 휩쓸었다. 19세기를 살았던 바우덕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곁에서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현재 안성시의 마스코트로 굳건히 자리 잡았으며 바우덕이를 내세운 성대한 축제도 펼쳐지기 때문이다. 지난 8월 안성시는 남사당패와 바우덕이를 기리기 위해 ‘바우덕이’ 영화 제작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조선 시대 대중예술에 굵은 획을 그은 바우덕이. 전문가들과 함께 그의 삶을 조명해봤다.

  출중한 명성에 비해 미미한 기록

  바우덕이는 조선 후기 안성 지역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그의 본명은 김암덕(金岩德)이다. 그는 바위 암(岩)에 해당하는 ‘바우’에 덕이를 붙여 ‘바우덕이’로 불렸다. 소고를 잘 다뤘으며 명창으로 여겨질 만큼 특출난 노래 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빛나는 명성에 비해 그를 기록한 자료는 충분치 않다. 문화재청 정형호 무형문화재위원은 낮은 신분층의 연희 및 놀이문화 기록은 상류층과 달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고 밝혔다. “일반 민중은 지식인계층과 달리 자신들의 놀이문화를 기록할 능력이 없었죠. 따라서 사당패를 포함한 민중의 놀이문화는 전설이나 구전 형태로 남아있어요.” 안성맞춤박물관 홍원의 학예사는 당시 집권층이 사당패 같은 유랑예인집단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당시 양반층은 사당패가 각 지역의 부정적인 소식을 퍼뜨리고 매춘을 일삼았다고 봤어요. 나아가 『조선왕조실록』에는 사당패가 적으면 도적짓을 하고 많으면 역모짓을 벌일 거라고도 표현하고 있죠.” 이렇듯 유랑예인을 바라보는 양반층과 관료층의 눈길은 차가웠다.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양반층은 유랑예인을 천대하며 그들의 기록을 소상히 남기지 않았다. 바우덕이와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 구술로 전해지게 된 이유다.

  노래도 부르고 인파도 부르고

  남사당패는 안성시 청룡사(靑龍寺)를 근거지로 활동했던 사당패의 명맥을 이어온 예인집단이었다. 그중에서도 바우덕이는 남사당패 역사를 통틀어서도 중심인물로 손꼽힌다. 그가 활동을 끝맺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추앙받았다는 뜻이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 안성청룡 바우덕이 /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지방 속요에서도 그의 삶과 명성이 나타난다. 이화인문과학원 김경미 원장은 바우덕이가 비범한 몸짓과 재주로 대중들을 매료했다고 말한다. “소고만 들어도, 치마만 들어도 구경꾼이 돈을 던졌다는 가사에서 바우덕이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음을 알 수 있어요. 이름 없이 거리를 떠도는 사당패 사이에서 이름을 떨칠 정도로 재능 있는 예인이었죠.” 또한 ‘바우덕이가 뜨면 구름처럼 인파가 몰린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그는 탁월한 외모와 기예를 갖췄다고 추정된다. 심지어 신문에 등장하기도 했다. 1909년에 발행된 황성신문 기사에 바우덕이를 언급한 대목을 찾을 수 있다. 한 기생의 출중한 노래 실력을 설명하는 기사에서 ‘안성청룡 바우덕이가 와도 머리를 숨기고 쥐구멍을 찾는다는’ 서술이 드러난다. 바우덕이가 일종의 비교 대상이 됐다는 점으로 미뤄보아 그가 조선 최고 명창이었음이 증명된다.

  얼쑤! 바우덕이 인정받다

  바야흐로 1865년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돌입한 시기였다. 그러나 재정 상황은 녹록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은 재원을 마련하고자 원납전과 당백전 등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또한 경복궁 중건은 대규모 인력이 투입되는 공사였다. 따라서 수많은 농민이 부역꾼으로 동원됐다. 이 과정에서 바우덕이는 흥선대원군에게 노래와 기예 실력을 인정받아 정3품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받았다. 어떻게 바우덕이는 경복궁 중건 현장에 오게 됐을까.

  경복궁 중건 현장에는 부역꾼뿐만 아니라 각지에서 온 예인집단이 함께했다. 정형호 위원은 흥선대원군이 동원된 부역꾼들을 위로하려 전문적인 예인집단을 끌어모았다고 설명한다. “부역꾼들을 위로하기 위해 전문적인 예인패들이 공사 현장 주변에서 판을 벌였어요. 일과를 끝내고 지역별로 동원된 농악패와 부역꾼들이 경쟁적으로 악기를 치며 놀이를 하는 농악 경연대회가 벌어졌죠.”

  바우덕이 역시 그곳에 있던 예인 중 한명이었다. 홍원의 학예사는 경복궁 중건 작업에서 바우덕이가 뛰어난 ‘선소리’를 자랑했다고 설명한다. “인부들이 집터를 다지며 노동요를 부를 때 바우덕이는 앞서 노래를 부르는 선소리를 담당했어요. 그와 다른 구역에서 일하는 부역꾼들도 그의 노래를 듣고 싶어서 빈 지게를 들고 주변을 맴돌았다고 하죠.”

  특출난 실력을 보여준 바우덕이는 흥선대원군의 눈에 띄었다. 흥선대원군은 그의 재주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정3품의 벼슬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내렸다. 옥관자는 높은 관직자들에게 하사되는 장신구였다. 그러나 실제 벼슬자리를 받은 것은 아니다.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노래 실력을 인정한다는 상징이었다. 김경미 원장은 흥선대원군의 인정으로 바우덕이가 예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얻었다고 말한다. “옥관자는 천민 출신 유랑예인에게 내려진 공식적인 평가이자 인정이었어요. 여성 예인을 음란하다며 천시하던 당대의 관습을 보면 파격적인 대우였죠.” 또한 김경미 원장은 조선 후기 예인들이 점차 나은 대우를 받게 된 사회적 분위기를 덧붙여 설명했다. “조선 후기 예인들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그 위치도 상대적으로 높아졌어요. 천민이라는 신분 자체가 변한 건 아니지만 관직을 하사받는 등 전문 예인으로 우대받을 수 있었죠.”

  바우덕이의 삶, 진실 혹은 거짓

  천재는 단명한다고 했던가. 민중의 사랑을 독차지한 바우덕이는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바우덕이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안성시 청룡리 주민들의 증언에 기반하고 있어 모호한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 일각에선 바우덕이가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활동 시기를 둘러싼 구술이 엇갈린다는 점에서 그의 생존시기를 보증할 수 없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정형호 위원은 바우덕이에 관한 전설이 허구에서 비롯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바우덕이 전설의 핵심 화소로는 바우덕이·남사당패·경복궁 중건·흥선대원군·옥관자·뛰어난 기예 등이 있어요. 이 화소 자체는 사실에 기반하죠. 다양한 전설로 전승되는 이유는 구술로 전달되며 여러 이야기가 추가됐기 때문입니다.”

  바우덕이는 전설로 내려오는 인물이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전설은 구전을 거쳐 여러 곁가지가 추가되면서 전해졌다. 현재는 황성신문과 동아일보 등 객관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바우덕이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 유랑예인집단의 대명사인 남사당패와 그 이름을 방방곡곡에 퍼트린 바우덕이. 오늘날에도 그의 예술정신은 ‘안성맞춤남사당바우덕이축제’로도 계승되고 있다. 이렇듯 바우덕이와 남사당패의 예술혼은 지금까지도 우리 곁에 남아 신명 나게 춤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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