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들만의 문화로 살아가는 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먹을 것을 얻고 서로 일을 도우며 생계를 유지했는데요. 딱딱한 법체계나 권위적인 정부 따윈 그들에게 필요 없었죠. 나의 이득보다 이웃을 우선하는 마음과 자아에 대한 확신으로 자유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마을이 관광지가 되고 외부에 개방되면서 그곳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관광객의 잦은 출입과 서구 미디어의 유입으로 마을 사람들은 외부 문명과 자신들을 비교하기 시작한 것이죠. 물질적 풍요로 가득해 보이는 서구 문명을 보며 자신들의 모습에
대의와 개인의 존엄이 충돌할 때 올바른 선택은 무엇일까요. 대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자와 그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자. 어느 한 명이 옳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앙드레 말로는 『인간의 조건』에서 다양한 인물의 내면을 보여줌으로써 여러 인간의 군상을 제시합니다. 1927년 상하이 쿠데타 속 대의를 위해 맡은 바를 다하는 테러리스트 ‘첸’과 개인의 존엄을 중시하는 ‘기요’. 그 외 희생과 연대를 강조하는 ‘카토프’와 격동의 시기를 회피하고자 하는 ‘지조르’까지. 그러나 이 중 아무도 틀린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실존한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 실존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거짓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이상은 확고부동한 진리를 찾고자 하는 데카르트의 질문입니다. 그는 세상 모든 지식을 의심한 뒤 그것에 조금이라도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면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하죠. 참으로 믿어왔던 모든 것이 그의 의심에 반박됐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지식이라 할 수 있는 ‘감각에 기원한 지식’ 역시 마찬가지였는데요. 착시 현상은 감각이 항상 우리에게 진실만을 전하는 것은 아님을 알려주죠.
“완전함으로는 진화를 입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완전한 것은 굳이 역사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진화가 점진적이고 누적적인 단계가 아닌 우연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힘의 작용이라고 주장합니다. 손목뼈가 발달하면서 생겨난, 일종의 임시방편이라고 볼 수 있는 자이언트 판다의 여섯 번째 엄지처럼 말이죠. 이처럼 자연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적응에 능통한 존재입니다. 굴드가 ‘자연은 훌륭한 땜장이’이지 신묘한 장인은 아니라고 말한 이유죠. 대신 굴드는 자연의 불완전함에 초점을 맞춥니다. 현재의 상황
‘나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의 인생은 이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존재에 대한 고민은 지적 동물인 인간의 영원한 숙명이죠. 사유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게 에리히 프롬은 두 가지 삶의 방식을 제기합니다. ‘소유적 실존양식’과 ‘존재적 실존양식’이죠. 전자는 자신의 실존을 소유물에서 확인하고자 하고 후자는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서 실존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물론 두 양식은 양자택일의 관계가 아닙니다. 무언가를 소유하지 않고선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고서는 소유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유재산의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노인. 거대한 청새치를 잡기 위한 그의 여정은 우리의 인생과도 사뭇 닮아있는 듯합니다. 인내와 절망으로 점철된 고통스러운 인생의 단면을 생생히 보여주기 때문일까요. 진정한 고통은 청새치를 잡은 직후 시작됩니다. 노인은 청새치를 사수하기 위해 온몸을 바쳐 싸우는데요. 처절한 사투에도 불구하고 청새치의 살점은 한 줌 모래알처럼 바스러져 드넓은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는 누구나 청새치를 잡길 꿈꾸며 살아갑니다. 각자 마음 한켠에 자신만의 청새치를 상상하며 인생이라는 여정을 헤쳐 나가죠. 그러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시간, 명예, 사랑 등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는 이것들을 돈으로 살 수 없을까요? 신자유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뿌리내린 시장지상주의는 오랫동안 시대의 주요한 믿음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시장의 도덕적 결함을 성찰하는 논의까지 우리는 진전하지 못했죠. 시장이 무엇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해 충분히 토론하지 못했고 그 사이 시장은 생명, 신체 등 삶의 모든 영역에 침투했죠. 이런 우리의 사회를 샌델은 ‘시장경제를 이룬 시대(being a market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에서 숨겨진 진리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다양한 도구가 필요합니다. 단일한 학문만으로는 금방 한계에 봉착하고 말 테죠. 진리는 인간이 임의로 나눠놓은 학문에 국한되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에드워드 윌슨이 말하는 통섭의 의미는 ‘사물에 널리 통하는 원리로 학문의 큰 줄기를 잡는 것’입니다. “균형 잡힌 관점은 분과들을 쪼개서 하나하나 공부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분과들 간의 통섭을 추구할 때만 가능하다.” 통섭에 대한 믿음은 자연과학에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은 물리적 인과 관계에 따른 사건들에 따
인간 유전체 지도가 완성되고, 유전자 가위 기술이 개발되며 유전자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미래가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는 인간이 인간을 원하는 대로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과학기술의 발전은 우리 사회에 유전자 조작의 도덕성을 묻습니다. 특히 인간 수정란의 유전자 편집에 대한 논의는 찬반 양측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죠. 영화 에서 그리는 미래 사회는 생명공학의 발달로 유전자 조작이 당연시된 시대입니다. 조작 없이 태어나 선천적 결함을 지닌 주인공이 꿈을 이루며 인간의 의지가 유전자의 한계를 극복해 낸다는 메세
냉전이 끝나면 경직된 국제사회의 분위기가 완화될 것이라 예상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야 했을 것입니다. 국제 분쟁은 냉전 이전보다 더욱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조밀하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으니까요. 『문명의 충돌』의 저자인 새뮤얼 헌팅턴은 “탈냉전 시대의 다문명 세계에서는 과거 냉전 시대를 지배했던 중추적 대립 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향후 확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분쟁은 일곱 내지 여덟 개 정도로 나눠져 있는 주요 문명 간의 충돌일 것이라고 전망하죠. 한국이 속해있는 동아시아는 문명의 충돌이
긴 시간 동안 인류에게 꿈은 영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인류는 꿈을 일종의 계시로 받아들이며 꿈에서 나타나는 상징물들을 해석하는 데 공을 들였죠. 하지만 프로이트는 꿈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면이 의식·전의식·무의식으로 나뉘어 있다고 주장했는데요. 꿈에서는 억압됐던 무의식이 발현돼 현실에서 표출하지 못한 욕망과 욕구가 분출된다고 보았죠. 그러나 꿈이 무의식만의 전유 공간은 아닙니다. 억압된 내용은 의식에 의해 한 차례 검열되고 통제돼 변형된 상태로 드러나죠. 꿈은 현실에서 경험했던 내용이 전치
“둥근 해가 떴습니다”라는 문장은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을 연상시킵니다. 일명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발생하기 전까지, 종교적 교리에 따른 천동설은 우리에게 ‘진리’였죠. 허나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견한 이후부터는 이전의 생각을 완전히 폐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의 패러다임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죠. ‘패러다임’은 토머스 쿤이 자신의 저작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새롭게 정의한 개념입니다. 그가 설명하길 패러다임의
엔트로피는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손실로,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우주의 에너지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르죠. 제러미 리프킨은 이 개념을 인류사에 접목합니다. 인류 역시 문명을 일구고, 생명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비하며 엔트로피를 생성합니다. 공감과 엔트로피는 변증법적 관계입니다. 사회구조가 복잡해질수록 엔트로피가 증가합니다. 동시에 분투하는 타인의 삶을 더 많이 접할 수 있기에 공감의 기회는 많아지죠. 공감의 확대는 사회적 교류를 이룹니다. 그러나 공감으로 지탱된 사회는 엔트로피 증가라는 대가를 지불하죠.
흔히들 행복을 ‘찾는다’고 말합니다. ‘얻었다’거나 ‘주어졌다’고 표현하지 않는 건 행운 같은 개념과 분명 구별되기 때문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좋음’으로 표현되는 행복을 목표로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기술과 탐구는 물론이고,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추구하는 것 같다. 따라서 좋음(선)이야말로 당연히 모든 것이 추구하는 목표라고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매 순간 행복을 위해 숨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감정은 너무나 어려운 존재입니다. 어떠한 결정을 내림에 있어 감정은 숨기고 억눌러야 하죠. 그러나 감정은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와 우리가 후회할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그중 사랑은 가장 골치 아픈 감정입니다. ‘선생님’은 사랑을 죄악이라 부르며 상황에 따라 모두가 악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요. 그는 ‘아내’를 사랑했기에 본인이 가장 싫어했던 행위인 배신을 하면서도 상처를 받은 ‘K’를 보며 죄책감에 빠지죠. 감정
요하네스 케플러가 일생을 바쳐 발견한 성과 중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지구에 적용되는 물리 법칙이 천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6년 뒤 아이작 뉴턴은 우주의 질서에 대한 큰 결실을 얻었죠. 그 열매는 만유인력이라는 이름으로 뉴턴의 머리 위에 떨어졌습니다. 달이 지구를 돌고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것. 그리고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것. 이들은 모두 하나의 원리를 이르는 표현입니다. 동시에 인간과 우주의 경계를 허무는 방법이기도 했죠. 칼 세이건은 우리 모두가 한 점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거대한 행성, 보잘것없는 미물, 그
“우리는 모두 전쟁만 끝나면, 그 숱한 눈물만 그치면 멋진 삶이 우리를 기다릴 거라고 믿었어요. 아름다운 인생이. 승리만 하면…” 제2차 세계대전 독소전쟁에서 소련은 승리했으나 여성은 패배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요. 전쟁의 역사는 남성의 언어로 쓰이며 여성의 이야기는 지워졌습니다. 전쟁은 여성을 지웁니다. 군인이 된 소녀는 여자로서 누리고 싶었던 “여자 옷”을 버립니다. 길거리의 여성은 강간, 살인과 같은 전쟁의 참혹함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버리죠. 저자 알렉
인생이 헛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어떤 순간도 되돌릴 수 없는 삶이라는 길 위에서 우리는 끝없이 과거를 만지작거리죠. 번복할 수 없는 인생 앞에 선 인간은 나약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니체의 답은 영원회귀로 흘러갑니다.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전제하게 되면 우리는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죠. 한 번 살고 마는 인생과는 무게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동시에 내가 선택한 나의 운명을 사랑하는 운명애(Amor Fati)도 가능해지죠. 망치를 든 철학자는 이렇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능력만 있다면, 노력만 한다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사회의 20대 청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자는 현대 사회를 과잉된 긍정성의 시대라고 설명합니다. 긍정성으로 포장된 “할 수 있다”는 이면에 성과에 대한 강제성과 부정성을 내포하죠. 금지의 부정성이 강조됐던 규율사회와 달리 과잉 긍정된 성과사회에서 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착취자’입니다. 외부에 적대감을 지니지 않은 무한한 긍정성은 방향을 꺾어 자발적 착취로 이어지죠. 개인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