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 이은주의 자살을 둘러싸고 지난 며칠간 관련 기사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온갖 매체에서 앞 다투어 특집을 기획하더니, 십여년 전 죽은 가수에서부터 국적 불문의 고인들까지 뜻하지 않게 한데 묶여 브라운관에서 부활하기도 했다.

명실상부 네티즌 여론형성의 기제로 자리잡은 각종 포털 사이트의 뉴스 콘텐츠에 뜬 추측성 기사들을 계속 실시간으로 읽노라니, 마치 친분이 있던 사람이 억울하게 죽은 것처럼 마음이 동하는 것도 사실이다. 기사 밑의 명복을 비는 꼬리말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분위기다.

하지만 그녀의 유서를 둘러싸고 불거져 나온 항간의 추측들이 대부분 허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실시간 기사를 체크하고 연신 의문을 품던 나는 갑자기 무안해졌다. 죽음의 배경을 최대한 극적으로 구성하며 추리소설을 쓰던 언론 기관이나, 덩달아 열띠게 반응하던 우리나 모두 ‘진실’보다 ‘사건’을 원했던 것이다. 한 여배우의 죽음 그 자체보다 잘나가던 배우의 ‘자살’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말이다.

뭔가 영화같이 기이한 사건이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 이은주는 죽어서도 연기자일 수 밖에 없었다. 한 건 잡았다는 태도로 사건과 관련된 어떤 크기의 콩고물도 기사화되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오보에 대한 책임 소지는 특별히 논의되고 있지 않다.

이렇듯 한국 사회에서 연예인이란 죽어서까지 드라마틱한 픽션의 주인공으로 연기해야 하는 책무를 안고 있는 걸까. 그녀가 출연했던 전작 주홍글씨의 낙인만큼이나 깊은 굴레가 씌어있는 셈이다.

고인에 대한 예의니, 연예인 인권이니 하는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이은주의 죽음을 둘러싸고 반응하는 사회 현상들은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연예인을 인식하고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그것.

요즘 사회에서 연예인, 그 중에서도 ‘스타’라는 아이템만큼 잘 나가는 게 없다. 스타 산업의 규모가 거대해지면서 그들의 일상은 굳이 연예정보프로그램의 밀착취재를 통해서가 아니라도 쉽게 우리의 일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방대한 연예관련 가십거리들이 인터넷과 맞물려 어디서든 쉽게 그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우리는 실제 연예인과 ‘나’ 사이 거리가 좁아진 것 같은 착각을 한다. 재벌가로 시집가 화제를 일으켰던 여배우 고현정의 십년만의 컴백을 실제 체감한 것도 떠들썩했던 기자회견 장면에서보다 그녀의 이름 석자가 스팸메일 발신자로 부쩍 눈에 띄던 내방 컴퓨터 앞에서였다.

중요한 건 이러한 거리 좁히기가 일방적인 구조라는 점이다. 나와 다른 세계 사람들의 사생활을 어떻게 하면 더 까발릴까에 혈안이 된 우리. 연예인의 이름마저 새로운 홍보 전략으로 이용되는 지금. 공인이라는 이름 하에 그들에게 채워진 족쇄는 하루가 다르게 더욱 바짝 죄어지고 있다.

얼마 전 있었던 ‘연예인 X파일’ 파문도 그저 현상만 던져진 채 본질적인 의문과 물음에 대한 답은 어느새 슬쩍 가라앉았다. 그저 각종 TV 프로그램의 제목으로 ‘X파일’이란 단어를 많이 볼 수 있게 되었을 뿐. 그마저도 수단이 되어버리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은주의 자살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우려되기는 마찬가지다.  확인한 것처럼 그들의 일상이 화려하기만 한 것은 아니듯 우리의 일상적 태도도 한번 점검해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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