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형 작가(회화학과 73학번)의 개인전 <황재형: 회천回天>을 맞아 중대신문이 그를 다시 만났다. 여전히 민중들의 삶과 애환을 그대로 그려내는 손길에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실제의 세계와 작품 속 작가 황재형이 드러나있었다. 전시는 8월 2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전시실에서 이뤄진다. 이번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은 황재형 작가의 작품과 그가 전하는 메시지로 막을 내리려 한다.  글·사진 최수경 기자

좌측 황재형 作, '아버지의 자리 2011~2013 캔버스에 유채. 우측 황재형 作, '황지330' 1981 캔버스에 유채.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좌측 황재형 作, '아버지의 자리 2011~2013 캔버스에 유채. 우측 황재형 作, '황지330' 1981 캔버스에 유채.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4년 중대신문은 황재형 작가(회화학과 73학번)를 만났다. 작가는 중앙대 학부 시절 공업단지에서 일하며 노동의 가치를 깨달았으며, 공단에서 해고되는 사람들이 강원도 탄광촌에 가서 광부가 될 수밖에 없던 현실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 속의 또 다른 제3세계, 막장 인생의 귀착지인 강원도의 탄광으로 향했다. 광부 생활을 하며 그 모습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내기 위해서였다. 2021년, 황재형 작가의 개인전 <황재형: 회천回天>을 기념해 중앙대 재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려온 작품 속에서 그를 만났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회천: 회복을 꿈꾸는 메시지 

  황재형 작가가 말하는 회천(回天)은 하늘을 되돌린다, 하늘을 휘둘러본다는 뜻이다. “진정한 본심의 구현이 하늘의 뜻과 다르다면 절대적인 부분을 되돌리거나 회복해야 한다는 뜻이죠.” 

  물질 만능주의는 삶의 궁극적 가치를 물질적 만족에 두었다. 만족을 위해 숨이 턱까지 차도록 뛰고 충혈된 눈으로 열심히 살아가도 무엇을 위한 일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을 작가는 ‘막장’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삶에서도 회복을 꿈꾸는 메시지를 이번 전시의 제목 ‘회천(回天)’으로 전달한다. 

  탄광촌의 민낯을 낱낱이 

  전시장 입구의 짙은 회색빛 벽에는 은은한 존재감을 뽐내는 작품이 있다. 갱도 매몰사고로 사망한 광부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황지330>이다. 이는 중앙대 재학 시절 그린 작품 중 작가가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광부의 허름한 작업복 상의에 ‘330’이라는 일련번호는 명확하게 보이지만 인적사항이 드러난 명패는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탄광에 소속됐다가 유효기간이 지나면 폐기되는 얼굴 없는 노동자의 처지를 느낄 수 있다. 

  <황지330>처럼 익명으로 살아가는 광부의 삶을 증언하는 작품이 또 있다. 바로 <산업 전사>이다. 작품 속 광부의 얼굴은 지워졌는데, 작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지배 사상의 경박한 기준과 감내하는 자의 은유입니다. 경제 성장의 환상과 개인적인 욕망으로 지워진 얼굴이죠. 하지만 그 얼굴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를 가진 모든 이들의 얼굴입니다.” 

  그가 그려낸 탄광촌의 모습에서 광부와 선탄부의 생활상을, 그 땀방울의 무게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대자연으로 시선을 옮기다 

  탄광촌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던 작가는 대자연으로 눈을 돌린다. 캔버스를 두드리는 황재형 작가의 붓 터치는 투박하고 거칠었다. 색은 겹겹이, 층층이 칠해졌다. “그리는 행위에는 시간적, 공간적 계기가 중첩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죠. 시간의 멈춤이 아니라 지속을 품고 있어요. 회화의 공간은 두텁게 칠해진 질료의 파생음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산은 사람을 닮고 사람은 산을 닮는다고 했던가요.” 작가는 사람과 풍경에 큰 차이를 두지 않았다. 특히 설경 사이로 황톳빛 산 능선과 계곡이 드러난 <어머니>에서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데, “지극한 평화의 서사를 흐르게 하는 힘으로써 근원적인 생기, 빼앗길 수 없는 정기를 ‘어머니’라 말하고 싶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사라진 풍경에도 인간은 존재할 수 있다. 산 아래에는 탄광촌 노동자들이 몸담았던 터전이 있고, 산 능선은 그들의 피부에 깊게 팬 세월의 흔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황재형 作, '어머니' 2005 캔버스에 흙과 혼합재료.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황재형 作, '어머니' 2005 캔버스에 흙과 혼합재료.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불편한 잠을 청하는 이에게 위안을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 푹 파인 이마 주름, 꾹 다문 입술. <아버지의 자리> 속 인물은 가장의 무게를 그대로 짊어진 아버지의 모습을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작품은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전시장 속 따뜻함을 띤 밝은 공간에 걸려 있었다. “삶은 어둠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빛보다 어둠이 인간 존재의 본질일 수 있어요. 어떠한 절망이나 회의 속에서도 다시 꽃피우길 바라는 닫힌 어둠, 그 너머에 빛이 있기 때문이죠.” 밝은 공간에 아버지의 모습이 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작가는 흑연, 판자 등의 재료를 사용하며 탄광촌 실제의 모습을 구현하려고 했는데, 눈길을 사로잡은 재료는 머리카락이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개개인의 삶이 기록된 과학적인 필름이라고 설명한다. 

  작품 <In My Heaven>에서는 흩어져 있기도, 뭉쳐 있기도 한 머리카락이 돋보인다. “기능을 상실한 머리카락은 끊어지고 헝클어진 가운데 새로운 가상의 세계를 형성합니다. 맥락이 사라질수록 기운은 살아나죠. 엉켜있는 머리카락 덩이는 생명의 고통에 대한 회한이 풀어지지 못한 채 쉰 소리를 냅니다.” 어떤 이유에서 이 머리카락들이 ‘천국’을 의미하게 됐을까. 작가는 머리카락으로 표현한 ‘존재의 위대함’은 진리를 품고 있는 실재의 세계를 구성하는 천국이라 말했다. 

황재형 作, 'In My Heaven' 2018 캔버스에 머리카락.사진 최수경 기자
황재형 作, 'In My Heaven' 2018 캔버스에 머리카락.
사진 최수경 기자

  끝이 보이지 않는 우울과 까닭 모를 슬픔이 오랜 세월 짓누른다 해도 

  황재형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이야기하며 그가 지향하는 예술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예술가의 소명은 과거와 현재의 어둠을 헤쳐 파악하고 이해함으로써 현재의 상실을 보듬는 역할을 하는 일입니다. 설령 끝이 보이지 않는 우울과 까닭 모를 슬픔이 오랜 세월 짓누른다 해도 말이죠.” 황재형 작가의 그림에는 그가 보듬고자 한 인간의 모습이 담겼다. 인간이 존재하는 그림에는 인간의 삶이 투영돼있고, 인간이 삭제된 풍경 속에도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인간의 내적 세계가 보인다. 황재형이 그림을 그렸고, 그림이 황재형을 말하고 있었다.

 

중앙대 학생들을 위한 황재형 작가의 말
 

사진제공 황재형
사진제공 황재형

 

 

 

 

 

 

 

 

 

 

 

 

 

  얻은 이, 혹은 얻지 못한 이들의 고통스러운 잠자리를 위하여

  “돈, 지위, 명예 등 얻고 누리고 싶은 것들을 원하는 만큼 이미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과연 그들의 달콤한 잠자리를 위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 그들이 돈이나 지위, 명예를 얻는 동안 오직 글과 그림으로 지켜온 우리의 힘겨운 삶을, 그 삶에 대한 우리의 확신과 사랑을 그들의 잠자리를 위한 달콤한 자장가로 바칠 수는 없겠죠. 

  얻는 것이 적더라도 세상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느라 몇 배로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이 있죠. 그들이 희망과 용기가 꺾이지 않고 내일을 힘차게 다시 기약할 수 있도록 지친 잠자리를 위한 작은 위안을 마련하기 위해 예술에 매달리겠다는 젊은 다짐은, 지금도 저에게는 큰 울림입니다. 

  얻은 게 없기에 우리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로의 삶을, 그 삶에 관한 꿈과 사랑으로 예술을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그 고된 삶의 고행을 되풀이해오고 있죠. 

  얻은 자들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외면하려 들지 말고, 움츠러들지 말고, 자책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더욱 촌스럽고 우직하게 순수한 직관이든, 소통을 위한 사실이든 얻은 자들의 잠자리를 위해서라도 진정한 예술을 시작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이미 얻어버린 사람들, 더욱이 부정하게 얻기를 꿈꾸는 자들을 위해서는 달콤한 잠자리를 마련하는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써서는 안 됩니다. 

  잠자리에서나마 그들이 얻었거나 얻으려 하는 무언가가 삶과 세상을 위해서 무슨 뜻을 가질 수 있는지 스스로 묻게 해야 합니다. 끝없는 자문과 회의 속에 무섭고 고통스러운 불안의 밤을 지새우게 할 그림이 필요하죠. 그들의 정신이 일상성과 안일성에 파묻혀 잠들지 못하게 할, 그들의 삶의 문을 고집스럽게 닫지 못하게 할 그림을 그려야죠. 하고 싶다고 해서 이뤄지지는 않지만 내포된 것은 기필코 발화되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그림은 어쩌면 이 시대를 아프게 살아가고자 애쓰는 사람들에게 한밤에 떨어지는 싸락눈과 
같은 아름답고도 귀한 감동이 아니겠습니까. 

  주위에는 아직도 그렇게 우리의 밤을 함께 지키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압니다. 그래서 저의 눌변이 이러한 믿음을 전함으로써 고통스러운 밤을 위한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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