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 재학 당시 의대 공부는 참으로 어려웠다. 더불어 나의 20대 시절에는 86년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목적으로 민주화 투쟁이 대학의 캠퍼스를 누비고 사회를 뒤흔들 때라 끓는 피를 가지고 시위에 동참하며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며 살았었다. 하지만 의대 특성상 매 학기 진급과 재시험의 탈출이 더 큰 과제였었다. ‘남산이 영을 넘어’로 시작되는 교가 보다는 다른 교가가 더 많이 불리던 시절이라 많은 학생이 실제 교가를 모르고 졸업하는 시기였다. 대학을 졸업 후 20대 후반을 대학서 조교 생활을 하면서 기초의학(인체생리학)을 전공했다. 내 인생에 가장 즐겁게 공부한 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30대 시절 의과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당시 미화원님들이 파업하실 때는 화장실 청소도 직접 했으며, 집이 아닌 학교에서 대소변을 보는 학생들이 미울 때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이 시절부터 사고의 변화가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내가 의대 교수라는 생각을 하면 의대 학생들만 눈에 들어오고 관심을 가지지만 내가 중앙대 교수라는 생각을 했더니, 중앙대 모든 학생이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신앙에도 눈 뜨던 시기라 중앙대 교훈인 ‘의에 죽고 참에 살자’의 의미가 거짓된 세상을 버리고 참된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라는 의미로 다가오면서 내게 중앙은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이는 곳으로 변해가는 시기라 할 수 있다.

  40대 시절 학과장 직무를 경험해 보았다. 책임감과 배려심을 중심으로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주위 사람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은 너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시기였다. 동시에 중앙대의 발전을 위해 내가 더 노력하고 발전해야 하는 것은 물론 최대한의 인원이 함께 가면 더욱 멀리 갈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며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것과 다양한 구성원들의 화합이 중요하다고 각하게 됐다.

  현재의 50대에 접어들면서 학교 언론과 방송을 돕는 미디어센터장이라는 보직을 시작으로 새로운 일을 맡게 되었다. 학교와 학생들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고백을 수도 없이 하는 나이지만 두려움이 앞섰다. 과연 내가 중앙의 보직자로서 일을 잘할 수 있을까? 학교의 발전에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은 물론 현실적으로 그동안 상당히 소홀히 해왔던 가정과 구성원들에 대해 미안한 감정 또한 상당하였다. 그래도 앞으로 펼쳐질 나의 삶 특히 중앙대에서의 삶이 학교의 발전을 위해 녹아들어 가는 삶이 될 것으로 믿는다. 내 인생의 일정 시기이후 지금까지 쭉 바래왔던 것처럼. 어떤 장소나 어떤 상황에서도 자랑스러운 중앙인으로서 학교의 발전에 기여하는 삶을 이어가고 싶다. 작금의 나에게 중앙이 내 모든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 내 삶의 최우선 순위임을 밝히고 싶다.

이무열 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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