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제1891호에 들어갈 인터뷰를 위해 중앙대 야구부에서 뛰는 투수를 만났다. 투수는 공을 쉽게 던지지 못했다. 잡아서 돌려세워야 하는가. 아니면 일단 보내고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가. 투수는 타자의 타율 기록과 떨리는 눈동자를 되새김질한다. 타자를 오래도록 지켜본다. 마지막 공을 던지고 난 투수의 눈은 그래서 자주 붉게 물들어 있다.

  나는 신문 기사를 쉽게 쓰지 못한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 어째서 문제가 되는지, 인터뷰할 학자가 어떤 사람인지 오래도록 고민할 수밖에 없다. 책이나 논문을 주로 읽는다. 친구에게도 묻는다. 지난한 고민으로 때가 탄 내 글은 항상 늦는다. 왜 내 글은 매번 늦을까 아쉬울 때도 있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대상에 대해 알지 못하고는 판단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고민하고 이해한 끝에 쓴 글만 책임질 수 있다. 그래서 모니터를 보는 내 눈은 자주 빨갛게 물들어 있다.

  5년 전 지도자를 결정하는 시민의 눈은 티 없이 맑았다. 언론은 후보자가 입은 옷 색깔에 관심을 보였다. 누가 더 준비되었고 누가 토론회를 피하는지는 다루지 않았다. 시민 역시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당시 고등학생 기자로서 출구조사를 하며 나는 그 고민 없이 맑은 눈이 저주스러웠다.

  스스로 고민하지 않고 국가의 명운을 타자화한 대가를 우리는 오늘 치르고 있다. 죄 없는 아이들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저편으로 끌려갔다. 재벌의 뇌물에 눈 감아야만 경제가 살아나고 타당한 분노와 슬픔을 내려놓아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말았다. 이것은 법치가 아니고 자본주의도 아니다. 누구도 책임지지 못할 무고민의 대가일 뿐이다.

  직접 투수가 돼 고민하지 않고서는 영원히 공을 던지지 못한다. 카메라 렌즈를 통과하는 순간, 투수의 눈에 비친 타자의 모습은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복층의 망막을 거친 타자는 이미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서있다. 타자를 모르고 던지는 공은 언제나 타자가 치기 쉬운 ‘배팅 볼’로 전락한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극복해야 할 한계이기도 하다. 시민은 수많은 언론의 투과를 거친 이미지화된 후보를 만난다. 후보의 정책과 철학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던지는 표는 언제나 배신당하는 ‘배팅 볼’일 수밖에 없다.

  이제 3월이다. 선거는 5월이다. 두 달 동안 대선 후보는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그 두 달 동안 중대신문은 ‘대학생, 대선후보에게 묻다’라는 연재 기사를 써 낸다. 우리가 열심히 지켜보겠다. 빨간 눈이 되도록 오래 보겠다. 마감이 아무리 늦어져도 후보자의 이미지 뒤에 숨은 철학을 보여주기 위해 기꺼이 밤을 새겠다. 5월 9일 투표소에서 표를 던져야 하는 당신을 위해 중대신문은 있는 그대로의 후보를 보여주고야 말겠다. 그러니 당신도 관심을 보여 달라. 광장을 밝힌 촛불만큼 눈을 빨갛게 물들이며 대한민국이 맞이해야 할 지도자에 대해 중대신문과 함께 고민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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