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자가 되고 싶어요?” 얼마 전 참석한 대학신문 컨퍼런스에서 일간지 기자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요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의문을 적나라하게 들켰기 때문일까. 평소였다면 ‘정의’, ‘사명감’ 운운하며 능청스럽게 받아넘겼을 상투적인 그 질문에 쉽사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 음…. 그러게요.” 왜 난 기자가 되고 싶었을까? 왜 기자를 하고 있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은 중대신문 기자로 살아온 지난 2년을 돌아보게 했다. 그동안 써왔던 기사들을 검색해봤다. 훑어 내리던 중, 수습기간을 마치고 막 정기자가 됐을 무렵 썼던 칼럼을 발견했다. ‘쿨한 사람이 좋다’는 제목으로 시작한 칼럼에는 ‘바쁘게 살고 싶어 시작한 기자 생활’이라는 문구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던 입가에 자조 섞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말 그대로 더할 나위 없이 바빴다. 하루에 4시간은커녕 3시간도 못 자기 일쑤였고 전날 아침 편집국에 출근해 다음날 새벽 어스름에야 퇴근하기를 밥 먹듯 했다. 일은 하고 또 해도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온몸에 가득한 노곤함을 안고 돌아오는 퇴근길에 혼자서 남은 임기를 카운트하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매주 누적되어가는 피로에 모든 걸 내팽개치고 싶었다. 매일매일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건·사고 앞에서 냉철함은 무뎌졌으며 시야는 갈수록 흐려졌다. 하나의 신문이 완성될 때마다 진짜 핵심을 짚지 못했다는 자책과 만족스럽지 못한 신문을 내보내고 말았다는 자괴감에 얼마나 많은 밤잠을 설쳤던지. 세상은 못 바꾸더라도 학교는 바꿔보겠다던 거창한 포부는 날이 갈수록 빛바래 갔다.
 
  어디 그뿐인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마감에 시달리며 간신히 한주의 결과물을 토해낸 뒤에는 바로 책임이란 놈이 다가와 엄정히 나를 문책했다. 독자들의 엄격한 평가는 혹독하게 목을 조여왔으며 책임지는 기사에 한 치의 실수라도 있는 날에는 어김없이 강력한 비판이 잇따랐다. 그 와중에 중대신문이 대학본부로부터 편집권을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다는 가당찮은 의혹에도 시달려야만 했다.  
 
  힘든 나날들 속에서 쿨한 사람이지도 못했다. 열심히 하라는 채찍질에는 시국이 이렇게 수상한 시절에 혼자 대학보도부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 쉬운 줄 아느냐고 속으로 항변했고 미처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 발견되면 업무가 과중하게 누적된 탓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신문사를 떠나고 싶다는 진담 반 농담 반의 말은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신문사가 미운 수없이 많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신문사를 떠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스스로 완전히 만족할만한 신문을 만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공정한 기사를 통해 세상을 이만큼이나마 바꾸고자 했던 포부는 아직 반도 펼치지 못한 채 가슴속에 남아있다. 
 
  짧은 회고 끝에 왜 기자가 되고 싶었는지에 대한 답을 찾았다. 앞으로 아무리 일이 고되고 바빠진다고 해도 다시는 잊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다시 그 기자를 만나게 된다면 말하련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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