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동유럽 민주화의 구심점’이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임종 직전에 인류평화나 문명 간의 화해 같은 마지막 유언이 아니라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시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였던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에 했다는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뒤부터 나는 이따금 죽음에 대한 묵상을 하곤 한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고, 죽음을 터부시하는 현대사회에서 이는 부정(不淨)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특히 근대에 들어 의학기술이 승승장구하면서 죽음은 더욱 주변부로 쫓겨났고, 그 결과 환자의 죽음은 의술의 패배로 받아들여지는 사고가 팽배해 있다. 과학이 하루가 다르게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은 죽음이라는 생명 현상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다가오는 죽음을 준비하기보다는 중환자실에서 고독하게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죽음만큼 확실한 사실이 또 있을까? 인간이 태어나는 것만큼 죽는다는 사실도 엄연한 현실이다. 개인의 죽음이 있었기에 인류 공동체는 지금까지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할 수 있지 않았는가? 죽음의 역사를 연구한 필립 아리에스는 근대 의학이 등장하기 전에 살았던 중세인들은 죽음을 혼연한 태도로 맞았고, 이렇게 해서 나름대로의 대응책, 즉 ‘죽음의 기술(ars mori-endi)’을 터득하게 되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30살 정도에 불과한 시대였으니 당시 사람은 머지않아 죽음이 다가올 것을 알았고 자연스럽게 죽음은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중세에는 죽음을 맞이하는 의식이 결혼식만큼이나 공개적이었고 남녀노소가 모여 임종을 함께 했다고 한다. 이는 삶의 문제(how to live) 못지않게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how to die)인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였으리라.

이러한 과거의 죽음관은 잊혀 갔으며, 현대인은 더 이상 죽음을 기억하려들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인식의 부활. 이것은 삶에 대한 올바른 성찰의 첫 걸음이 될 수도 있다. 언젠가는 인생이 끝날 것이고, 그래서 삶은 유한하다. 첨단 의료기술은 생명의 연장수단이지 죽음의 해결책이 될 수 없으리라. 선한 일만을 행하더라도 다하지 못하고 끝나고 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그러나 근대화의 세례를 받고 어른이 된 우리들은 아직도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배금주의와 성장제일주의라는 잘못된 가치를 가르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나만은 잘 살아보리라는 풍조가 우리 사회에 만연하게 되지 않았는가. 그동안 죽음을 통해 삶을 돌아보는 죽음과 삶의 변증법을 망각하였는지 되돌아 볼 때이다. 유한한 시간을 나누면서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몸과 마음의 상처를 주면서 살기에는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고귀하고 가치가 있다. 죽음의 역사에 대한 묵상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삶의 교훈을 준다. “Me-mento mori(너의 죽음을 기억하라).”
역사학과
차용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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