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기아 해태 뉴코아 등의 부도로
시작된 경제 위기는 곧 주식가의 급락을 낳았고 이제는 금융 대란으로 이어
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의 원조를 요청함으로써 우리는 이제 국가 부도의
상황을 맞고 있다. 권력을 쥐려는 싸움에 정신이 없는 정치권은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하자는 상투적인 말을 빼고는 별 신경을 안쓰는 것 같다. 더군다
나 이런 와중에 나온 안기부의 간첩사건 발표는 현재 한국이 경제 정치 사회
적으로 국난에 처해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도 남을 것 같다.

이럴 때면 으례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애국심을 발휘하자는 것이다. 지난 토
요일에 있었던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는 자신의 정치에 대한 책임을 고백하
는 내용도 있었지만 온 국민이 힘을 합쳐 이 위기를 극복해나갈 때 우리의 미
래는 열려있다는 말이 있었다. 또 누구의 책임을 묻기전에 온국민의 뼈를 깎는
노력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내용도 있었다. 요는 우리 모두가 개인의 이익
을 버리고 국가 전체의 발전을 염두에 두어야 이 난국이 타개될 수 있다는 말
이다.

우리가 겪는 위기에 대해 애국심을 발휘해서 해결 될 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애국심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애국의 구체적인 대상은 무엇
이고 누구인가? 국가와 민족을 이야기하고 애국을 말할 때 그 애국의 대상은
보편적이지 않다. 나라를 사랑하는 모임을 주도했던 대통령 아들의 애국은
국가나 민족이라기 보다는 대통령이 되어야만 했던 자기의 아버지였을 것이
다. 떳떳한 국가 경영의 자질과 자격을 놓고 좌충우돌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가 애국의 대상일 것이다. 저축을 증대하여 경제의 밑
바침이 되게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저축된 돈이 기업으로 흘러가
부동산에도 투자하고 사세도 확장할 때 그들의 애국의 대상은 대출을 받아서
쓰는 기업이 될 것이다. 고비용 저효율이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기업인들은 조기 퇴직과 대량 실직 그리고 취직 안돼 헤매다니
는 수많은 대학 졸업생들의 모습을 보고 애국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것이
다.

이런 것이 애국이라면 애국은 별 매력이 없는 것 같다. 우리 모두가 책임
을 져야하고 우리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 매야 국난이 극복된다는 말은 사실
상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말아야하고 따라서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
니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위기는 분명히 경제적 위기이며
이러한 경제 상태로 몰고간 자들의 책임을 우리는 물어야한다. 더이상 우리
의 희생으로써 재벌체제가 유지되게 하지는 말아야한다. 망해야할 기업과 망
해야할 은행은 망하게 해야한다. 우리의 애국과 그들의 애국이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애국에 의해서는 이루
어질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 밝히는 것--이런 작업이 난국의 시기에 난무하
는 온갖 말장난을 이겨내는 길일 것이다.

고부응<문과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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