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공화국 정권은 광주항쟁 무력 진압과 언론사 통폐합이라는 강경 노선 채택으로 말미암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라는 도전에 직면한다. 하지만 하늘은 이 정권을 돕기로 했는지 국민의 민주화 열망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제24회 하계올림픽 서울 개최 결정, 프로야구 출범, 소련 전투기에 의한 KAL기 피격사건, 버마 아웅산 폭발사건 발발이 그것이다. 선량한 다수의 국민은 ’88올림픽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야구장에서 고향 연고지 팀을 응원하며, 대통령 수행 장관들을 포함해 17명을 암살한 북한의 테러 행위와 소련의 만행에 분노하며 5공화국의 전횡을 묵과하는 분위기에 편승한다. 때마침 경제는 3저의 호황시대로 돌입한다. 1985년 가을 이후 달러 가치·금리·원유가 세가지가 함께 떨어지면서 국가경쟁력이 급상승, 전두환 대통령은 국가경영에 자신감을 갖게 된다. 그는 서울지하철 2·3·4호선, 88올림픽 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의 개통식에서 테이프를 끊고, 충주다목적댐과 고리원전 5·6호의 준공식에서도 손을 흔든다. 하지만 개발논리로 정경유착의 비리를 감추는 수법은 이미 통하지 않게 된 시대임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1986년 5월의 인천사태에 이어 10월에는 건대농성사건이 일어난다.

건대 학생 데모 사건에 연루된 아들 소식이 궁금한 朴氏는 집으로 전화를 또 한다.//(…)// 非情의 사랑이여 나의 세포/ 은하수여 체온계는 36도 4부에/ 턱걸이를 하다 쪼그라들고 있다.
-오규원, 「NO MERCY」 부분

군사정권의 불법성과 폭압성을 성토하며 시작된 두 사건은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무마되지만 다음해 1월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까지는 은폐하지 못한다.

그대/ 내 가슴 속 푸르딩딩한 피멍 위에 떠 밤새도록 울부짖는 악몽의 푸른 별이여!
-송제홍, 「박종철」 전문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군이 고문을 당하다 사망한 사건에 대해 경찰의 발표는 “경찰관이 ‘탁’하고 책상을 쳤더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그 전해 7월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은폐와 더불어 5공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대통령은 4월 13일, 개헌논의 유보와 현행헌법으로 정부를 이양하겠다고 발표한다.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데모 대열은 드넓은 서울 거리를 가득 메운다. 마침내 화이트칼라들까지 직장에서 빠져나와 데모 대열에 함류한 6·10항쟁.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의 함성에 놀란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직선제 개헌과 대통령선거법 개정을 약속한다. 이 6·29선언은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선 대다수 국민의 저항에 직면한 두 군인정치가의 항복선언이었다. 6·29선언 덕에 권력을 이양받은 노태우씨는 서울올림픽 개막을 선언한다. 금메달 12개로 종합 4위. 국력이 신장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올림픽만 치르면 선진국 대열에 서게 될 것이라고 연일 선전한 정부에 대해 올림픽이 끝난 뒤에 비아냥거린 시인이 있었다.

외인들이 저마다의 대륙으로 제 바퀴 하나씩 굴려 귀국한 후// 서울의탄탄한대로로/ 12인의사내탈주하다/ 탈주하다12인의사내/ 또다른감옥가정집에/ 자진하여투옥당하다
-정남식, 「88 다섯 개의 동그라미 굴러간 후」 부분

올림픽이 끝나고 엿새 뒤인 10월 8일, 미결수 12명이 서울 영등 포교도소에서 지방의 교도소로 이감되던 도중 호송버스를 탈취하여 서울 북가좌동의 민가에 침입, 인질극을 벌인 사건을 다룸으로써 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달라진 것이 고작 이런 것이냐고 시인은 비웃었다.

국민이 그토록 갈망하던 문민정부는 엉뚱한 사람들의 의기투합에 의해 출범하게 된다. 1990년 1월,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김종필 총재와 함께 3당 합당을 발표하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김영삼씨는 선거운동에 매진한다. 마침내 1992년 12월 19일 새벽 5시 반, 김영삼 후보는 대통령 당선 확정 보도를 듣고 조깅에 나선다. 30년 만에 군사정권이 문민정부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얻은 많은 것을 재임기간 내내 잃어버릴 것은 모른 채 대통령이 되었다는 기쁨에 겨워 뜀박질을 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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