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짓’도 참 많이 했지만, 울고 화내고 싸우고 웃을 줄 아는, 가장 ‘보통사람들’에 가까운 대통령이 있었다. 그런 그가 퇴임 1년여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정권 차원의 고강도 수사를 받던 중이었다. 슬프다. 대통령치고는 그나마 인간적인 정이 갔던 분이, 가장 정이 가지 않는 정권에 의해 수사를 받다가 돌아가셔서 무척이나 슬프다.

어떤 이들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정권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살해의 범인이 ‘이명박 정권’이라는 규정은 지나치게 일면적이다. 노무현 살해의 주범은 정치 관료-족벌, 언론-대재벌로 구성된 ‘철의 삼각동맹’이다. 검찰이 한 역할은 일부에 불과하다. 수사에 발맞추어 그를 ‘잡범’으로 낙인찍고 검찰의 불확실한 주장들을 계속해서 퍼뜨린 것은 다름 아닌 언론들이었다. “확정되지 않은 사실을 검찰 스스로 공표하고 언론이 확대재생산”(이창현 국민대 교수)했고, 검찰이 사건 수사와 관계 없는 인신공격 성 정보를 흘리기만 하면 그는 하루아침에 잡범이 되기 일쑤였다.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서술한 예고 기사가 생산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첫 소환일, 일부 신문들은 그날 저녁에 업로드한 기사에서 “심야 조사를 받고 새벽에 귀가했”다며 소설을 쓰기에 이른다. “사실이 왜곡되고 있다”는 그의 외침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검찰의 주장은 그렇게 사실로 둔갑했고, 노무현은 정치적인 차원을 넘어 인간적인 모멸감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이 ‘노무현 죽이기’에서 정권과 언론은 한 마디로 죽이 착착 맞았다. 누구 말마따나, 프레스 프렌들리이긴 한 모양이다.

그래도 가장 큰 역할을 한 게 정치꾼들과 검찰이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누가 가장 큰 역할을 했는지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들, 정치 관료-족벌 언론-대재벌은 이미 한 몸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썼던 동맹이라는 용어도 사실상 무색하며, 일종의 복합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그들은 정치경제적 이해관계 뿐 아니라 혈연으로 묶여 있는 하나의 가문이기 때문이다. 삼성, 현대 등 대재벌과 주요 재벌 단체 임원들은 조중동의 사주 가문과 사돈 지간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이 복합체를 신 왕조라 불러도 좋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복합체의 핵심은 무엇보다 언론이다. 언론은 복합체 내의 나머지 둘과 마찬가지로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동시에, 그 둘의 행위를 확대재생산하고 그들의 행위에 동조하도록 국민을 길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족벌 언론의 해체야말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과제이다. 그리고 그 대안은 공영 언론, 혹은 언론 공공성이 될 것이다. 축약해서 말하면, 언론은 권력의 생산 수단이다.

민주주의가 진정 권력의 평등을 지향한다면, 이 권력의 생산 수단은 공공재로써 공유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만 1%가 독점하고 있는 권력이 평범한 우리들에게 이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언론이 지금처럼 특정 개인 혹은 계층의 사적 전유물로 기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가오는 6월에 미디어 악법을 막아내야 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재벌이든 조중동이든 다른 무엇이든, 그들 중 일부에게라도 언론을 넘겨주는 것은 결국 신 왕조 전체에게 권력을 완전히 넘겨주는 것과 같다. 잊지 말자. 그들은 이미 하나의 가문이다.

필자의 주관으로 볼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국 지배 계급에게 한미 FTA를 체결하고, 이라크 파병을 강행하고, 비정규 악법을 양산하며 지배 계급에 봉사하는 정치 활동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출신이나 이미지, 이력 등이 주류 지배 계급과는 달랐다. 우리 사회의 지배 계급은 그 조그만 차이조차 용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는 영원히 그를 지워버렸다. 적어도 언론이 우리 사회의 공공재로써 기능했다면, TV나 신문에서 특별하지 않은 우리들의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더 나왔다면, 이 아까운 목숨들은 지금도 우리 곁에 숨쉬고 있을지 모른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송 준 영

언론공공성을 위한 대학생 연대

정경대 신문방송학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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