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일부는 부유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가난하다.”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그리고 탈식민주의 이론의 가장 정교한 이론적 분석을 제시하는 로버트 영의 『백색신화』(경성대출판부)도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 ‘세계의 일부’가 주로 유럽과 북미대륙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세 대륙이다.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그렇게 둘로 분할돼 있다. 마치 자본주의 사회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두 계급으로 분할돼 있는 것처럼 세계자본주의체제 또한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구도는 ‘구대륙이냐 신대륙이냐’ 곧 ‘유럽이냐 미국이냐’가 아니라 ‘유럽이냐 3대륙이냐’다. 그리고 이를 가르는 이념이 ‘식민주의 대 탈식민주의’다. 


식민주의와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책들이 점차 쌓이고 있다. 유럽의 식민지 경영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식민주의는 노골적이지만 과학과 학문이라는 외양을 갖춘 유럽 중심주의는 은밀하다. ‘지리적 확산론과 유럽중심적 역사’를 부제로 내세운 역사학자 제임스 블라우트의 『식민주의자의 세계모델』(성균관대출판부)은 그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다(이러한 비판으로 국내에 먼저 소개된 책은 사미르 아민의 『유럽중심주의』(세종출판사)이며, 강철규 교수의 『역사와 이데올로기』(용의숲)도 서양 역사학의 유럽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저자는 유럽중심주의가 은밀하게 작동하는 영역으로 지리학과 역사학을 지목한다. 예컨대, 이제까지 인류사의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세계의 특정한 한 부분, 곧 유럽과 ‘확장된 유럽’에서 발생했다는 세계사 인식이 대표적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자면 유럽이 역사의 창조자이며 나머지 세계는 굼뜨거나 정체돼 있다. 다시 말해 세계는 지리적으로 영원한 중심부(유럽)와 주변부(제3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거의 신념처럼 굳어진 ‘유럽중심적 확산론’이며 블라우트는 이 신념을 비판하고자 한다.


얼핏 단순한 작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복잡하며 어려운 시도다. ‘유럽적 보편주의’(이매뉴얼 월러스틴)라는 우리 인식의 근간을 건드리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결론에 이르러서 블라우트가 제시하는 비판 과제는 데카르트에서 칸트에 이르는 철학적 이원론, 모든 것이 하나의 시공간에서 시작되고 그것이 확산되었다는 소위 빅뱅이론, 아프리카에서 에이즈가 발생하여 유럽으로 확산되었다는 역확산론, 산업혁명 이후 경제발전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산업화 확산론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과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유럽중심주의 해체도 요원하다는 것이 블라우트의 진단이다. 막스 베버를 비롯한 8명의 유럽중심주의 역사가를 비판한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푸른숲)를 『식민주의자의 세계 모델』에 연이어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리라. 


블라우트가 ‘유럽의 기적이라는 신화’라고 부른 것을 로버트 영은 간단하게 ‘백색신화’라고 이름 붙인다. 그 또한 유럽중심주의를 비판 대상으로 삼는데, 이 경우에도 사안은 좀 미묘하며 복잡하다. 그의 공격대상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크스주의 전체를 도마에 올려놓는 것은 아니다. 그의 비판은 유럽적인 시각의 한계에 갇혀 있는 ‘유럽 마르크스주의’를 향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전복성에도 불구하고 유럽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유럽중심주의의 한계를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유럽의 한계 내에서만 움직이는 좌파의 역사적 시각을 유럽 외부의 세계에서 시작된 시각과 대결시킨다.”


유럽 마르크스주의가 그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대문자 역사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유지하기 때문이다. 로버트 영은 이러한 역사주의가 제국주의와 공모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며, 이 공모관계는 타자를 주체에 환원하는 ‘동일자 철학’에서도 확인된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적에 따르면, 이 역사주의와 제국주의 사이의 연관성에 관한 가장 근본적 차원에서의 인식론적 비판은 결코 일어난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러한 비판 자체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백색신화’뿐만 아니라 ‘서양’이란 개념 자체의 해체를 뜻할 것이기 때문이다. 탈식민주의는 우리에게 세계와 세계사를 다시 사고하도록 요구한다.


이현우/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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