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인간의 눈이요, 귀요, 입이요, 삶의 외침인 표현이다. 언론학 연구의 시발점을 인간, 사회, 문화의 정신적 복합현상에 두고 학자로서, 기자로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하여 언론에 목숨을 건 선생은 언론의 개척자요, 언론계의 태두같은 분이다.”
이상철 교수(정경대 신문방송학과)가 회고하는 곽복산 교수의 모습이다.

곽복산 교수는 1911년 목포에서 출생하여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다
15세때인 1925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의 중학과정 통신교육을 마쳤다. 2년후 동아일보에 입
사하여 지방주재기자로 일하였으나 일제의 억압에서 허덕이는 수많은 동포들을 보며 ‘배워
야만 힘을 가질 수 있다’는 현실을 깨닫고, 배움을 바탕으로 동포들을 위해 헌신하는 길은
역시 언론직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이러한 깨달음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1931
년 일본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 와세다 대학의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지만 신문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곧 중퇴, 당시 유일하게 신문학과가 설치되어 있던 일본 상지대학 신
문학과에 1회로 입학한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상지대학의 신문연구실에서 연구원으로 잠깐 근무하다 1935년 다시 동
아일보에 입사한다. 대학에서 정규의 신문학 교육을 받은 그는 동아일보에 재직하고 있으면
서도 언론인들의 체계적인 교육과 언론직 지망생의 기초적 교육을 위해 뜻을 같이하는 사람
들을 모아 1946년 ‘조선신문학원’을 개원한다. 당시 3백여개에 달하던 신문사에 종사할
기자들의 수가 부족한 상태에서 언론계의 절대적인 요구와 선생의 교육철학이 맞물려 신문
학원은 성공적인 발전을 하게된다.

52년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으로 재임하면서 그는 전시에 흔들리는 국민불안을 진정시키는 한
편 활발한 언론의 개진을 이끌어 국민계도를 위한 신문역할의 인식을 새삼 깊게 한다.
55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학과를 홍익대학교에 개설하여 주임교수로 취임하여 최초의 신문
학 교육의 강의서인 ‘신문학개론’을 출간한다. 그 후 중앙대학교 신문학과 개설과 동시에
주임교수로 취임하였고 59년에는 현재 한국언론학회의 전신인 한국신문학회를 창설, 초대회
장으로 피선된다. 또한 중앙대학교에 신문학 석사과정도 개설, 신문학 교육의 전문적 과정을
열기도 했다.

“이제 돌아 보면 우리나라 신문학교육의 선구적인 역할을 다하여 왔으며 여러 동학들이 선
배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위치에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문방송연구소의 창설과 중대신문 5백호를 기념하며 신문학원 졸업생들에게 보낸 곽복산
교수의 초청장에는 이같은 감회어린 내용의 인사가 쓰여 있다.

정성을 다해 편저한 ‘언론학 개론’의 발간을 하루 앞두고 또 학계, 언론계의 동료, 선후배
이 준비한 회갑연을 불과 닷새 앞두고 선생은 중앙여고에서 강의도중 쓰러져 타계한다.
“언론은 인간의 눈이요, 귀요, 입이요, 삶의 외침인 표현이다”를 몸소 실천으로 보여준 곽
복산 교수.

그가 이 땅에 뿌린 신문학의 씨앗은 현재 활약하는 수많은 언론계 종사자 수만큼이나 한국
언론학의 든든한 뿌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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