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과학교육체계는 옛 소련의 것을 그대로 본딴 것이다. 소련은 위성국에 1개 종합대학
만을 두고 나머지는 모두 직업별 단과대학체계로 만들었다.

북한은 최근 김책공업대학과 개성경공업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직전까지 김일성대
학만을 종합대학으로 인정했다. 지금도 순수과학과 주요과학은 이곳에서만 가르친다.

북한의 과학교육 정책은 1946년 김일성대학, 1947년 함흥화학공업대학, 1948년 김책공업대학
과 원산농업대학 등이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북한당국은 이들 대학을 졸업한 인재들이
6.25 전쟁중에도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수풍댐 근처에 토굴을 파고 지하
실험실과 지하대학을 만들어 연구와 교육을 병행시켰던 것이다.

6·25 이전에 월북하지 않고 남한에 있었던 과학자들은 물론 중고등학교 과학선생님까지 북
한으로 데려갔다. 전선에 배치된 군인 중에서도 이공계 출신들은 후방으로 배치했다. 이들
중 선발된 인원들은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1952년 4월 27일 평양에 있는 모란봉 지하극장에 과학기술자들을
총집결시켜 대회를 열고 그들에게 전후복구 및 산업진흥책을 설명한 뒤 각자에게 임무를 부
여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과학원을 조직해 내각 각 부서에 산재해 있던 연구소들의 임무에
대한 지휘체계를 세웠다. 이들 연구소에는 모두 연구원이 부설되어 대학들과 함께 연구와
후학 양성교육을 겸하도록 했다.

그러나 1976년쯤 북한과학계는 된서리를 맞았다. 김정일과 김평일의 권력투쟁 와중에 애꿋
은 과학자들 수천명이 희생된 것이다.

북한의 과학교육정책이 오늘날과 같은 체계를 갖춘 것은 1983년부터다. 김일성은 북한이 사
회주의권에서도 후진국으로 전략했다고 판단, 이에 대한 대책을 과학진흥에서 찾겠다고 결
심했다. 83년 3월 김일성은 과학원 과학자들 앞에서 ‘과학연구사업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
으킬데 대하여’라는 중요한 연설을 했다.

그 내용은 정부관리들의 과학진흥정책이 잘못되
었다고 호되게 질책하고 과학자들에게는 일어, 영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중국어 학
습에 힘써서 외국 학술지를 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후 북한 교육계에도 새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적 대중을 위한 평등교육은 완전히
포기하고 철저한 엘리트 중심의 영재교육에 치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재교육기관인 평양
제1고등중학교가 84년 9월에 개교했고, 강선금속 단과대학을 비롯한 24개의 자연과학계열
단과대학들이 문을 열었다. 5월 4일 공업대학을 위시한 6개의 공장대학과 태천고등공업전문
학교 등 4개의 전문학교가 생겨났다. 86년에는 인민학교과정 영재교육기관인 만경대학생소
년궁전이 착공되어 89년 5월 준공됐다.

그러나 이들 과학교육기관들은 김정일이 지나치게 예술분야에만 탐닉, 과학자들에 대한 대
우를 소홀히하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했었다. 최근 김정일은 군부대방문외에는 대부분 과학
관련 행사장 방문에 시간을 쏟는 등 과학발전에 주력하고 있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