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랜드


임세화



깊게 패인 발자국 위로 다시 눈이 쌓인다. 남자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 위에 무겁게 발을 올려놓는다. 눈 밟히는 소리가 적요한 골목에 퍼진다. 규칙적이고 신중한 소리의 반복에 남자는 히뜩 뒤를 돌아본다. 남자의 등 뒤에는 그가 새겨놓은 발자국만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남자는 얼굴을 때리는 눈발을 막지 않고 발을 옮긴다. 바람에 할퀸 얼굴과 손등이 붉어져 있다.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서서야 남자는 발갛게 곱은 손을 바지주머니에 넣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이 휘우듬하게 기우는 모습이 펭귄과 닮아 있다.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골목의 한 끝으로 걸어간다. 남자의 움직임을 감지한 센서가 작동하며 가로등이 골목에 불빛을 뿌린다. 노란 그림자로 뒤덮인 골목을 뒤로 한 채 남자는 빌라로 들어간다. 낡고 허름한 빌라의 출입문이 덜커덩거리며 음산한 소리를 낸다.

남자는 뒤뚱거리며 빌라의 계단을 오른다. 키에 비해 높고 가파른 계단 탓에 남자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진다. 3층까지 올라간 남자는 헉헉대며 허리를 숙인다. 숨을 고르며 주머니에서 손을 뺀 남자는 초인종 위로 손을 뻗는다. 남자는 초인종을 깊게 누른다. 새벽녘의 빌라 복도에 요란한 멜로디가 울려 퍼진다. 고개를 들어 초인종 버튼 위에 있는 자신의 손을 본 남자는 흠칫 몸을 떤다. 남자는 채 펴지지 않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낸다.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남자는 문을 열고 들어간다.

집안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남자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묵묵히 서 있다. 남자의 옷자락 밑으로 눈 녹은 물이 뚝뚝 듣고 있다. 현관 바닥은 금세 흥건해진다. 남자는 절벅거리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진다. 흠뻑 젖은 양말이 바닥에 희미한 자국을 만든다. 휘적거리며 걷던 남자는 문득 집안 구석구석을 살핀다. 어둑신한 공기를 휘저으며 사위를 급하게 두리번거린다. 남자의 다리가 심하게 휘청거린다. 갸웃거리던 고개가 조금씩 멈춘다. 한곳을 바라보는 듯한 남자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다. 희미하게 깔려 있는 정적을 깨고 남자의 목소리가 퍼진다.

“엄마……”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온 길이었다. 발인을 끝내기까지 남자는 흐린 시선으로 눈동자를 비우고 있었다. 두 동생들은 남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상주가 아니었다. 키가 백팔십 센티미터에 가까운 동생들은 남자에게 상주자리를 주지 않았다. 남자는 아무 항변도 하지 않은 채 가만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삼베상의가 남자의 가느다란 팔뚝을 아무렇게나 할퀴었다. 남자는 생판 모르는 사람의 장례에 온 것처럼 생뚱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십 년 전 어머니의 사진을 낯설게 바라보며 문득 놀라 몸을 떨었던 것이 지난 삼 일간 남자가 한 일의 전부였다. 제발 집에 돌아가라는 동생들의 언성 높은 말도 남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시신이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본 후에야 남자는 집으로 왔다.

남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집안곳곳 퍼지고 그 메아리마저 사그라진다. 남자는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는다. 동그랗게 뜬 눈이 몇 번 깜박인다. 차갑게 식어 있던 남자는 사위를 두리번대다가 돌연 뜨거운 울음을 운다. 남자의 어깨가 심하게 흔들린다. 꺽꺽거리며 우는 입으로 누렇고 진득한 콧물이 흘러든다. 남자는 숨을 할딱이며 울부짖는다. 현기증에 고개를 까닥거리기도 한다. 한참을 울던 남자의 숨소리가 조금씩 잠잠해진다. 눈물 닦을 생각도 않고 엉엉 울던 남자는 문득 잦아드는 자신의 울음에 놀란다. 그리고 선득한 새벽 공기에 부르르 몸을 떤다. 남자가 앉은 주위에는 물이 흥건하다. 남자는 천천히 일어선다. 한 겹씩 옷을 벗는 남자의 몸짓은 신성한 제의를 보는 듯하다. 깨끗이 가신 울음이 믿기지 않는 듯 남자는 부러 마른기침을 뱉는다. 조금 전까지 서럽게 울었던 자리에서 속옷까지 모두 벗은 남자는 터덜터덜 욕실로 들어간다.

욕실에서는 은은한 사과향이 난다. 백열전구의 노란 불빛 아래 선 남자는 방향제를 바라본다. 연두색 타일과 썩 잘 어울리는 초록색 젤리 타입의 방향제이다. 남자는 사과향을 깊이 들이마시며 욕조에 물을 받는다.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던 남자는 욕조 속으로 들어간다. 오른발을 먼저 내딛던 남자는 흠칫 몸을 떤다. 부어오른 발이 힘없이 흔들린다. 찌릿한 통증을 참으며 남자는 가슴께까지 몸을 담근다. 일 미터 남짓 되는 하얀 욕조는 남자의 키에 딱 맞다. 남자는 쭉 뻗은 두 다리를 손으로 문지른다. 눈길을 오래 걸은 탓인지 감각이 둔하다. 물에서 올라오는 훈김을 삼키며 남자는 목 언저리를 만지작거린다. 남자의 목은 목울대가 없이 밋밋하고 깨끗하다. 남자는 무릎을 굽혀 물속으로 머리를 담근다. 코끝에서 몽그작거리며 공기방울들이 올라온다. 공기방울들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을 때까지 남자는 물속에서 머리를 들지 않는다. 물속에서 얼굴이 붉어진 남자는 머리를 들고 숨을 몰아쉰다. 그리고 컥컥대며 물을 뱉어낸다. 남자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진다.

타월로 몸을 대강 닦아낸 남자는 곧장 부엌으로 향한다. 선득한 공기가 닿자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남자는 냉장고 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냉장고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남자의 나신을 비춘다. 남자는 냉장고에서 나오는 한기에 몸을 떤다. 뒤꿈치를 들고 냉동실까지 살핀 남자는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꺼낸다. 그리고 전자레인지에 우유를 넣어 데운다. 전자레인지에서 나오는 불빛이 남자의 얼굴과 몸에 닿는다. 일순 그것들은 기이하게 일그러지며 그림자를 빚어낸다. 남자의 시선은 전자레인지 속 깊은 곳을 향해 있다. 남자는 전자레인지가 작동을 멈춘 지 한참 뒤에야 우유를 꺼낸다. 전자레인지의 문을 닫지 않아 희미한 빛이 어둠 속에 섞여 있다. 남자는 전자레인지 앞에 서서 고양이처럼 우유를 핥아 먹는다. 혀에 따뜻한 우유가 닿을 때마다 남자는 흠칫 놀란다. 남자가 놀랄 때마다 작달막한 성기가 함께 흔들린다.

어둠이 눈에 익은 남자는 불을 켜지 않고 침대에 앉는다.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끌어내리려 무진 애를 쓰던 남자는 체념한 듯 침대 위로 발을 올린다. 정적만이 가득한 방에서 문득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곡을 하듯이 규칙적인 간격에 남자는 히뜩 시계를 노려본다. 남자는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시계를 뒤집어 건전지를 뺀다. 이제 방에는 어떤 움직임이나 소리도 찾을 수 없다. 남자는 비석처럼 앉아 있다. 남자의 시선은 아직 치우지 않은 어머니의 물건들을 향해 있다. 남자는 어머니의 컴퓨터를 응시한다. 깨끗하게 닦인 사각의 모니터가 눈에 들어오자 남자는 졸린 듯 눈을 비빈다. 남자는 돌연 한없이 나른해지는 몸을 폭신한 이불 속으로 들이민다. 보드라운 면의 감촉이 살갗에 닿는다. 남자는 턱밑까지 이불을 끌어당긴다. 이불에 싸인 남자는 작은 고치 같다.

어슴푸레한 새벽이 지나고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온다. 몸을 뒤척이던 남자는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이마께를 가리며 눈을 뜬다. 이내 이불을 머리까지 올려 쓴 남자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는다. 남자가 내지른 짧은 탄성이 이불 속을 부유하고 있다. 가느다랗게 눈을 뜬 남자는 꿀꺽 침을 삼키고, 크게 심호흡을 한다. 한숨처럼 이어지던 숨소리는 경멸 같은 시선으로 바뀐다. 남자는 자신의 몸을 훑어본다. 중학교에 입학한 이래 조금도 자라지 않은 몸은 밋밋하고 단조롭다. 음악으로 친다면 사분음표로만 가득한 한 가지 음계의 멜로디일 것이다. 남자는 사지를 늘어뜨린 채 아릿한 사과향을 맡는다.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힘없이 일어난 남자는 휘적거리며 거실로 걸어 나간다.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송수화기를 든다. 동생의 목소리는 피곤에 흠뻑 젖어 있다.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동생의 말에 남자는 자백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내 채근하는 동생의 날선 목소리에 남자는 알았다고 다짐을 해둔다. 동생은 타이르듯 조곤조곤 말하며 남자가 뒤미처 답할 틈도 없이 전화를 끊는다. 전화가 끊긴 뒤에도 남자는 한참을 전화기 옆에 앉아 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거실 바닥에는 축축하게 젖은 옷가지가 놓여 있다. 옷가지 주변에는 물 마른 자국이 자욱하다. 남자는 나신인 채로 청소를 시작한다.

어머니의 화장대에는 청동 인형들이 즐비하다. 얼굴의 윤곽이 흐릿해진 청동 인형들은 말을 타거나 땅을 일구거나 동물을 사냥하고 있다. 남자는 어머니가 하듯 마른 수건으로 조심조심 인형들을 닦는다. 수건에 청록색 녹이 묻어난다. 인형들을 모두 닦은 남자는 수건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문지른다. 수건이 지나간 자리에 옅은 줄무늬들이 생겨난다. 콧잔등부터 귀밑까지 이어진 줄무늬는 흡사 추장의 치장 같다. 남자는 얼룩을 지우지 않은 채 청소를 계속한다.

집안에는 어머니의 물건들이 많다. 남자는 어머니의 화분들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인다. 옹기종기 붙은 화분 앞에 서자 남자는 밀림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남자의 키보다 더 큰 화분들은 남자의 머리 위에 잎을 드리우고 있다. 하얗고 말랑한 남자의 맨몸이 단단하고 다부져 보이는 초록색 잎사귀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청동의 얼룩이 남은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남자는 크게 숨을 들이쉰다. 작은 정원을 연상케 하는 화분들은 짙은 흙냄새를 풍기고 있다. 남자는 화분 옆에 놓인 물뿌리개를 집는다. 물뿌리개 안에는 물이 찰랑거린다. 남자는 두 손으로 물뿌리개를 들어 화분에 물을 준다. 흙의 표면에 물이 튀기며 옅은 비린내가 올라온다. 남자는 흙에서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 오래도록 화분에 물을 준다. 짙은 초록의 잎사귀가 조붓이 흔들린다.

청소를 마친 남자는 컴퓨터를 켠다. 컴퓨터가 부팅되며 요란한 기계음을 낸다. 메마르고 규칙적인 소리에 남자는 부르르 몸을 떤다. 눈가에 얕은 눈주름이 잡힌다. 남자의 얼굴은 아이의 것처럼 보얗게 살이 올라 있다. 밋밋하고 동글동글한 몸도 모니터처럼 하얗게 빛을 내고 있다. 남자는 뒤꿈치를 들고 컴퓨터 의자에 앉는다. 부팅이 끝난 컴퓨터의 화면에는 초록색 옷을 입은 피터 팬이 하늘을 날고 있다. 남자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창을 연다. 요란한 바탕색의 포털 사이트가 보인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남자는 어머니의 아이디로 로그인을 한다. 비밀번호는 남자의 생일이다.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가입한 클럽의 이름들이 가지런히 정렬된다. 남자는 모니터를 응시한다. ‘발달장애 극복하기’, ‘난쟁이의 마을’, ‘장애 없는 세상’ 등속의 클럽들이 보인다. 남자는 그중 맨 밑에 정렬된 ‘네버랜드’에 커서를 가져간다.

늪처럼 깊고 끈적한 초록빛이 모니터를 뒤덮는다.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던 남자는 모니터 오른쪽 구석진 곳의 초록빛이 다른 곳과 약간 다른 것을 발견한다. 남자가 그곳으로 마우스를 가져가자 모니터의 화면이 순식간에 바뀐다. 화면 가득 큰 돛단배가 떠오른다. 남자의 상체가 주춤거리며 뒤로 젖혀진다. 그러나 남자는 마우스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돛단배의 이곳저곳에서 남자는 숨어 있던 메뉴들을 발견한다. 남자는 돛을 맨 밧줄을 클릭한다. 장난기 어린 피터 팬의 모습이 나타난다. 초록색 옷을 입은 피터 팬의 팔은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있다. 짤막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허리에는 나무칼이 꽂혀 있다. 다른 메뉴에는 피터 팬의 간단한 소개가 적혀 있다.

남자는 피터 팬이 네버랜드에 가게 된 사연을 읽는다. 피터 팬은 어른이 되는 게 두려워서 유모차에서 뛰어내린다. 영원히 늙지 않고 어른이 되지도 않는다. 피터 팬은 후크와 싸우며 네버랜드에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새순처럼 파릇파릇한 초록빛의 옷이 남자의 보얗게 살이 오른 몸피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남자는 흙냄새와 섞인 옅은 사과향을 맡는다. 남자의 동그란 코가 벌름거린다. 창문으로 석양빛이 흘러들어 온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붉고 투명한 빛이 남자의 얼굴에 쏟아진다. 남자는 눈을 살짝 찡그리며 다시 코를 킁킁거린다. 막 지은 밥 냄새가 남자의 코에 닿는다. 그제야 남자는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을 알아챈다. 남자는 지독한 허기를 느끼며 부엌으로 간다.

부엌은 노을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옅은 주황빛과 남자의 몸이 섞이며 바닥에 짧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남자는 가스레인지에 김치찌개가 든 냄비를 올려놓고 냉장고에서 찬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운다. 김치찌개가 바글바글 끓으며 시큼한 냄새를 퍼뜨린다. 부엌에 깔려 있는 노을빛이 시큼한 김치찌개의 훈김 같다. 남자의 피부는 노을빛에 닿아 옅은 갈색으로 보인다. 남자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가시지 않는다.

찌개를 식탁에 놓자마자 남자는 허겁지겁 숟갈질을 한다. 뜨거운 찌개를 호호 불어가며 입 안 가득 밥을 퍼 넣는다. 남자가 밥을 한 숟갈 입에 넣을 때마다 남자의 볼이 발그레해진다. 잔머리가 많은 이마에서는 진득한 땀이 흐른다. 남자는 냄비에 남은 밥을 모두 넣고 싹싹 비벼 먹는다. 숟가락과 냄비가 부딪는 소리가 부엌의 정적을 흩뜨려 놓는다. 남자는 우물우물 음식을 씹으며 숟갈질을 멈추지 않는다. 남자의 볼이 빵빵해진다. 밥을 다 먹고 찬물을 꺼내 입까지 헹군 남자는 허탈한 표정으로 식탁 의자에 앉아 있다. 노을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어둑신한 저녁 공기가 차오른다. 냉장고 작동하는 소리가 남자의 귀에 닿는다. 남자는 냉장고 문을 연다. 냉장고 안에는 깻잎과 무장아치 등속의 밑반찬이 조금씩 남아 있다. 냉장고 문을 연 채 한참을 서 있던 남자는 마실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챈다.

막 겨울잠에서 깨어난 동물처럼 남자는 느릿느릿 옷을 입는다. 카키색 어린이용 코트는 남자의 몸에 헐거워 보인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은 남자는 신발장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어제 신고 들어온 신발은 아직 축축하다. 남자는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리한다. 남자의 운동화가 두 켤레, 어머니의 단화가 두 켤레이다. 응급차에 실려 갈 때 남자의 어머니는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다. 남자는 검지를 펴서 나란히 놓인 신발들을 가리킨다. 남자의 입에서 신음처럼 으깨진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하나, 둘. 하나, 둘.”

남자는 언제나처럼 신발을 세고 있다. 성장이 멈추었다는 확인을 받고 병원에서 돌아온 얼마 뒤부터 남자는 신발장에 쪼그려 앉아 신발을 세곤 했다. 동생들의 신발이 하나둘씩 사라질 때마다 남자는 웅크리고 앉아 넓어진 신발장을 가만 바라보았다. 오래 전부터 신발장에는 어머니와 남자의 신발이 전부였다. 남자는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듯한 어머니의 신발에 손을 꿰어본다.

남자는 그날 약봉투를 찾고 있었다. 남자는 매일 정해진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호르몬제를 먹었다. 좁고 어두운 입안에 꾸역꾸역 약을 밀어 넣다가 토악질을 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어머니가 약을 넣어 놓곤 하던 화장대 서랍을 남자는 급하게 뒤졌다. 어머니는 외출 중이었다.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남자는 어머니가 들어오기 전에 몰래 약을 찾으려 했다. 그러다가 남자는 낯익은 글씨체가 새겨진 편지를 발견했다. 어머니가 쓴 편지였다.

남자는 서랍 속에 곱게 접은 편지를 넣어 놓았다. 그리고 신발장 앞으로 내처 달려갔다. 어머니의 신발이 놓일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남자는 신발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어머니를 기다렸다. 혹시 돌아오지 않을까 눈가에 고인 물기를 소매로 훔치기도 했다. 남자의 어머니는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남자는 도살당할 처지에 놓인 짐승처럼 물기어린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어머니는 종종 밤이 이슥해서야 돌아왔다. 그때마다 남자는 예의 그 표정으로 벌을 받듯이 신발장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얼마 후 서랍에는 이미 편지가 없었다. 아버지는 아주 어릴 때 사라졌으므로 남자는 아버지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님이 분명한 편지의 주인은 왜 어머니를 안아주지 않는 것일까 곰곰 생각했다. 남자는 어렸으므로 편지의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가 어머니를 안으면 어머니가 자신을 떠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남자는 그렇게 매일 저녁마다 신발을 세고 있었다.

이제는 없어지지 않을 신발인데도 불구하고 남자는 돌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듯 신발을 세고 있다. 젖은 신발에서 쿰쿰한 냄새가 올라온다. 어머니의 신발을 손에 꿰어 든 남자는 뒤를 돌아본다. 남자의 발은 짧고 둥그런 그림자를 밟고 있다. 그것이 자신의 것임을 깨달은 남자는 조심스럽게 그림자로 손을 뻗는다. 그림자는 만져지지 않는다. 남자는 손에 꿴 신발을 바닥에 부려 놓는다. 신발의 굽이 바닥에 닿으며 딱딱한 소리를 낸다.

남자는 젖지 않은 신을 꼼꼼히 신고 집을 나선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남자의 빈곳을 마구 할퀴어댄다. 남자는 코트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주머니에는 열쇠와 지폐 두어 장이 들어 있다. 발인을 마치고 동생들이 찔러 넣어 준 돈이다.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돈을 만지작거린다. 병원에 자주 가지 않고 아껴 쓴다면 매월 지급되는 생활보조금과 어머니가 남겨주신 약간의 돈으로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만 한다고 남자는 낮게 중얼댄다.

남자는 몸을 한껏 웅크린다. 밤새 내리던 눈이 그치고 도로는 빙판이 되어 있다. 남자는 사야 할 것들을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다. 십여 분을 걸어 상가에 도착한 남자는 굳게 내려진 셔터 앞에 선다. 늦은 시간이라 상가는 빈 성냥갑처럼 꼭꼭 닫혀 있다. 셔터 앞에서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다시 발길을 옮긴다. 길에는 인적이 드물다. 고집스럽게 걸음을 옮기던 남자는 환하게 불이 밝혀진 편의점에 들어간다.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졸다 깨어 남자를 바라본다. 편의점 안은 나른한 공기로 가득 차 있다. 남자는 입김으로 손을 녹이며 편의점 안을 돌아본다. 편의점에는 갖은 물건들이 다 있다. 남자는 곧장 냉장진열대로 가서 오렌지주스와 우유를 집는다. 라면과 식빵까지 고른 남자는 그것을 카운터로 가져간다. 남자의 좁다란 품에서 떨어진 물건들이 계산대 위를 구른다. 계산대 위는 손때로 얼룩져 있다. 눈 밑에 검은 그늘이 짙은 학생은 하품을 하며 바코드를 찍는다. 남자는 검지를 들어 찐빵 온장고를 가리키고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인다. 학생은 찐빵 두 개를 꺼내 봉지에 담는다. 계산을 마친 남자는 커다란 비닐봉지 하나와 찐빵 봉지를 건네받는다. 찐빵 봉지에서는 훈김이 오르고 있다. 남자는 찐빵 하나를 꺼내 학생에게 건네고 편의점을 나선다.

남자는 비닐봉지의 손잡이를 손목에 끼고 양손으로 찐빵을 집는다. 입을 벌려 찐빵을 한입 베어 문 남자는 뜨거운 듯 입에서 김을 내뿜는다. 훈김을 호호 내뿜으며 찐빵을 먹는 데 열중하던 남자는 문득 걸음을 멈춘다. 남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가로등이 듬성듬성 놓인 그 길은 남자의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추위에 붉어져 있던 남자의 귀가 달아오른다. 남자는 기억을 더듬듯이 머리를 삐죽거리다가 결국은 걸어온 길로 다시 되돌아간다. 남자의 어깨는 점점 가라앉는다. 걸음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기도 한다. 남자의 눈가에는 점점 물기가 어린다. 가쁜 숨을 쉬던 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끝이 이지러진 달이 구름 위에 얹혀 있다. 코끝이 빨개진 남자는 둥근 돌담이 둘러 있는 벽에 몸을 붙인다.

한참을 벽에 기대 있던 남자는 갸웃 고개를 돌린다. 낯선 문패가 남자의 눈에 들어온다. 남자는 눈을 찡그리며 천천히 다가간다. 낮에도 인적이 드문 곳인 듯 숫눈길이 이어진다. 남자는 문패 옆에 놓인 안내판을 읽는다.

“선사유적지……구석기부터……청동기……수렵……역사……”

남자의 속에 웅크리고 있던 목소리가 작게 새어나온다. 달처럼 끝이 이지러진 단어들이 가로등 불빛과 섞인다. 차곡차곡 쌓인 돌담은 가로등 조명을 받아 경이로운 빛을 낸다. 남자는 돌담 옆에 이물스럽게 서 있는 기와대문으로 다가간다. 잠겨 있는 듯했던 문은 끝이 조금 열려 있다. 남자는 온몸으로 문을 민다. 끼이익 나무 틀리는 소리가 난다. 남자는 좁게 열린 문틈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돌담 안은 온통 하얗고 푸른 빛깔로 가득 차 있다. 남자는 문틈에 우유 등속이 담긴 비닐봉지를 끼워놓는다. 돌담 밖에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과 쌓인 눈에 반사되는 달빛이 유적지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다. 바닥에 쌓인 눈은 군데군데 녹아 겨울에도 푸르른 잔디를 내놓고 있다. 남자는 크게 숨을 들이쉰다. 겨울바람의 비린 냄새가 남자의 콧속을 매섭게 채운다. 남자는 손끝으로 머리를 긁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돌담 안에는 여러 개의 낮은 언덕이 이어져 있다. 언덕 위에는 무언가가 솟아 있다. 남자는 언덕을 오른다. 눈 속으로 발이 푹푹 빠진다. 남자의 신발은 금세 눅눅해진다.

움집이다. 남자는 달빛을 반사하며 우두커니 서 있는 움집을 바라본다. 움집 안은 컴컴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움집 입구는 그리 넓지 않지만 남자가 들어가기에는 알맞은 크기이다. 남자는 움집 안으로 머리를 넣는다. 마른 곰팡이 냄새가 훅 끼친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움집으로 들어간다. 움집 안으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남자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직사각형의 움집 내부는 바닥이 푹 꺼져 있다. 남자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입술을 비집고 옅은 신음이 새어나온다. 남자는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입구보다 바닥이 훨씬 낮은 움집은 남자의 키에 딱 맞는 높이이다. 남자의 코에 오래된 짚가리 냄새가 닿는다. 남자는 쾨쾨한 냄새를 맡으며 크게 심호흡을 한다. 불빛이 닿지 않는 움집 속에는 그림자가 없다. 남자는 문득 몸을 부르르 떤다.

남자는 신새벽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도착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자는 옷을 벗는다. 온몸이 발갛게 부어 있다. 남자는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간다. 남자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남자의 머리와 목덜미에 묻어 있던 모래와 마른 짚가리가 바닥에 떨어진다. 남자는 침대로 다가간다. 이불은 속이 텅 빈 채 동굴처럼 솟아 있다. 남자는 아침에 자신이 빠져나온 이불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남자의 몸에서 흙 비린내와 오래된 짚가리 냄새가 배어나온다. 남자는 코를 킁킁거린다. 몸에서 배어나오는 냄새와 방향제의 사과향이 섞인 오묘한 향이 남자의 코를 덮는다. 고치처럼 굳어 있던 남자는 털썩 사지를 편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동시에 남자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괸다.

가뭇한 어둠에 휩싸인 채 남자는 눈을 뜬다. 남자는 두리번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얼마 동안을 잔 것인지 셈을 하려던 남자는 움직이지 않는 시계를 보고 고개를 젓는다. 거실로 나간 남자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무렇게나 부려놓은 비닐봉지를 찾는다. 비닐봉지는 남자의 신발 옆에 쓰러져 있다. 남자는 비닐봉지 안에서 먹을거리들을 꺼내 냉장고 안에 넣는다. 라면과 식빵까지 모두 냉장고에 넣은 남자는 냉장고 앞에 주저앉는다. 난방을 하지 않은 바닥이 남자의 엉덩이와 허벅지에 닿는다. 선득한 기운에 몸을 떨며 남자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한다. 바닥청소, 목욕, 빨래, 설거지…….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남자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켠다. 창밖에는 어둠이 짙게 차올라 있다. 모니터에 화면이 뜨자마자 남자는 날짜와 시간을 확인한다. 스무 시간쯤 꼬박 잤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본다. 어머니가 병원에 간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나 있다. 남자는 벽에 걸린 달력을 떼어 북북 찢는다.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이 반으로 갈라진다. 달력을 갈기갈기 찢은 남자는 숫자가 보이지 않게 종이를 모두 뒤집어 놓는다. 남자는 컴퓨터 의자에 앉아 인터넷 익스플로러 창을 연다.

칼을 휘두르고 있는 피터 팬의 모습이 남자의 눈에 들어온다. 남자는 마우스 버튼을 딸깍이며 칼 모양의 커서로 피터 팬의 몸을 찔러본다. 검지로 버튼을 꾹꾹 누를 때마다 남자의 입에서 조그마한 탄성이 흘러나온다. 남자가 버튼을 누를 때마다 피터 팬은 몸을 움직이며 남자의 칼을 피한다. 커서를 마구 휘젓던 남자는 허탈한 듯 다른 메뉴들을 살펴본다. 클럽의 메뉴들을 살펴보던 남자는 게시판을 발견한다. 클럽의 게시판에는 게시된 글이 많지 않다. 남자는 게시판에 씌어진 첫 번째 글부터 천천히 읽어나간다. 남자가 글을 읽는 사이에도 모니터 상단의 피터 팬은 지치지 않고 허공을 날고 있다.

하루에 피터 팬을 두 번이나 읽었다는 글부터 잠을 자기 전에 창문을 여는 것을 잊지 말라는 글까지 게시판은 피터 팬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남자는 피터 팬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려 눈을 굴린다. 그러나 피터 팬을 읽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남자는 피터 팬을 읽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에 흠칫 놀란다. 남자는 모니터 상단의 피터 팬을 문득 낯선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이내 시선을 내려 게시판을 훑어본다. 게시판에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글이 씌어지는 듯하다. 남자는 지난 달 마지막으로 씌어진 글을 보며 손가락으로 셈을 해본다. 손가락을 구부린 채 모니터를 응시하던 남자는 보얗게 살이 오른 손가락을 모니터에 가져다댄다. 게시판에는 방금 올라온 듯한 글이 있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커서를 움직여 글을 열어본다. 커서가 꿈틀거리며 글자 사이사이를 움직인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글을 읽던 남자는 고개를 흔든다. 그리고 자판을 꾹꾹 누르며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결국 남자는 새로 씌어진 글 밑에 짧게 글을 쓴다.

“난 진짜 피터 팬인데…… 괜찮은가요.”

남자는 초조한 눈빛으로 모니터를 응시한다. 그러나 새 글은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보일러를 작동시키고 청소와 빨래, 설거지까지 마친 남자는 훈훈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적당히 데워져 따뜻한 공기가 살에 닿자 남자는 간지러움을 느낀다. 욕실로 들어간 남자는 욕조에 물을 채운다. 따뜻한 물에서 훈김이 올라와 사과향의 안개가 욕실 안을 채운다. 부유하는 안개 속에서 남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어머니가 즐겨 부르던 노래이다. 잠시 멈칫거리던 남자는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남자의 음성이 욕실의 안개와 뒤섞이며 메아리를 빚어낸다. 낯선 음성에 흠칫 놀랐지만 남자는 점점 소리를 높여 악을 쓰듯 노래를 부른다.

남자는 물속에 발만 담근 채 욕조에 걸터앉는다. 한참 소리를 지른 탓에 남자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다. 남자는 두 다리를 천천히 움직인다. 찰방거리며 물 튀기는 소리가 난다. 숨이 가쁠 때까지 다리를 흔들던 남자는 문득 움직임을 멈춘다. 급하게 욕실 문을 열고 나간 남자는 어머니의 화장대 위에 놓인 청동인형들을 품에 가득 안고 욕실로 돌아온다. 청동인형의 싸늘하고 단단한 감촉이 남자의 살갗에 닿는다. 청동의 표면에 슬어 있는 녹이 남자의 살갗에 무늬를 만든다. 남자는 흠칫 몸을 떨며 청동인형들을 욕조에 넣는다. 청동인형들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욕조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저항 없이 물속에 가라앉는 청동인형들을 보는 남자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간다.

청동인형들은 물속에서도 말을 타고 땅을 일구고 동물을 사냥하고 있다. 남자는 만족스런 웃음을 짓는다. 동력과 활기가 가득한 청동인형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남자는 청동인형들 사이로 조심스럽게 발을 딛는다. 물에는 온기가 남아 있다. 남자는 청동인형을 깔고 앉지 않으려는 듯 신중하게 몸을 담근다. 남자는 활을 매고 말을 탄 청동인형을 집어 올린다. 청동인형의 표면을 감싸고 있던 녹이 가시며 짙은 청록의 표면이 드러난다. 남자는 검지와 엄지로 청동의 표면을 문지른다. 남자의 손가락에 청록색 물이 묻어난다.

남자는 정성스럽게 청동인형들을 닦는다. 어머니의 바디샴푸를 듬뿍 묻힌 새 타월로 청동의 표면을 구석구석 닦아낸다. 하얀 색 타월에는 청록색 얼룩들이 즐비하다. 남자는 얼룩이 묻지 않은 부분으로 청동인형을 문지른다. 타월은 금세 청록색으로 물든다. 남자는 욕조의 물로 타월을 헹군다. 욕조의 물은 서서히 색이 변한다. 남자는 청록색으로 변한 물로 목욕을 한다. 머리를 감고 입을 헹군다. 남자의 몸에서 희미한 청동향이 배어 나온다.

남자는 청동의 녹이 풀린 물속에서 청동인형처럼 앉아 있다. 물은 차갑게 식어 훈김이 오르지 않는다. 남자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욕실의 정적을 흩뜨린다. 남자는 모니터에서 보았던 피터 팬처럼 짓궂은 미소를 짓는다. 욕조에서 벌떡 일어난 남자는 청동인형들의 모습을 따라한다. 무릎까지 물에 잠긴 채로 땅을 일구고 활을 쏜다. 남자는 욕조 맞은편에 있는 거울을 본다. 작고 통통한 몸을 가진 남자가 거울 속에서 남자를 보고 있다. 무릎까지 물에 잠긴 채로 땅을 일구고 활을 쏘고 있다.

버릇처럼 신발을 세던 남자는 문득 고개를 든다. 남자는 눈을 꾹 감은 채 정신없이 머리를 흔들고,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푹 숙이기를 반복한다. 깨끗이 빨아서 햇볕에 말린 신발에서 세제냄새가 은은히 퍼지고 있다. 남자는 신발의 속을 가만 들여다본다. 뒤꿈치가 닿는 부분까지 그림자가 가득 고여 있다. 남자는 신발을 손에 꿰려고 손을 뻗다가 겹쳐지는 그림자에 놀라 팔을 접는다. 신발장에 쪼그려 앉은 남자는 신발을 신고 끈을 단단히 묶는다. 늘 풀리기만 하던 리본이 견고하게 묶인다. 남자는 뒤뚱이며 일어선다. 남자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다. 현관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한기를 느낀 남자는 크게 심호흡을 한다. 집안의 훈훈한 공기가 남자의 폐를 채운다. 남자는 현관문을 등지고 서서 천천히 집안을 훑어본다. 어머니와 남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제자리에 놓여 있다.

남자는 뒤뚱거리며 계단을 내려온다. 남자의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커다란 배낭이 벽에 부딪는다. 배낭이 이리저리 흔들릴 때마다 남자의 몸도 덩달아 휘청거린다. 발을 헛딛지 않도록 남자는 한발 한발을 신중하게 내딛는다. 좁은 어깨에서 흘러내린 배낭의 바닥이 남자의 종아리에 닿아 있다. 남자는 힘껏 배낭을 올려 메고 빌라의 문을 나선다.

남자는 손바닥에 적힌 메모를 보며 신중하게 버스를 탄다. 남자가 버스에 올라서자마자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는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좌석에 앉은 남자는 무릎 위에 배낭을 올려놓는다. 배낭은 지퍼가 겨우 잠길 정도로 물건이 가득 차 있다. 남자는 배낭을 안기 위해 있는 힘껏 팔을 뻗어 손깍지를 낀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남자의 몸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심하게 흔들린다. 그러나 남자는 배낭을 감싼 팔을 풀지 않는다.

남자는 상기된 얼굴로 버스에서 내린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배낭 앞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낸다. 앞주머니에 있던 껌이 지도와 함께 딸려 나온다. 남자는 찐득하게 녹아 껌 종이에 붙은 껌을 떼어낸다. 원래의 형체가 사라진 껌이 남자의 입 속으로 들어간다. 남자는 입을 오물거리며 지도를 펼친다. 남자가 그린 조악한 약도가 펼쳐진다. 남자는 신중하게 걸음을 옮긴다. 길을 따라 걷던 남자의 귀에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남자는 음악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스피커가 있는 곳에는 버섯 모양의 지붕이 있는 집과 커다란 문이 있다.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문에는 나무막대가 비스듬히 놓여 있다.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나무막대를 치우고 문에 손바닥을 댄다. 먼지가 쌓인 문에 남자의 손바닥 모양이 남는다. 남자는 손에 힘을 주고 문을 민다.

“입장료를 내셔야죠.”

챙이 커다란 모자를 쓴 여자가 버섯 모양의 집에서 나온다. 여자는 빨간 외투를 여미며 남자에게 다가온다. 남자는 무춤한 자세로 서서 여자를 바라본다. 얇은 슬리퍼를 꿰어 신은 여자는 남자를 향해 손바닥을 내민다. 남자는 여자의 모자에 꽂힌 깃털을 보며 문 밖으로 한 걸음 물러선다. 주춤거리던 남자는 여자를 향해 뜨문뜨문 입을 연다.

“저는 단지, 사람을 찾으러, 온 건데, 단지…….”

“입장료는 내셔야죠.”

여자는 팔짱을 끼고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며 여자에게 내민다. 여자는 급하게 돈을 낚아챈다. 남자는 여자를 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꼬깃꼬깃 뭉쳐 있던 돈을 펼쳐 센 여자는 지폐 한 장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는 남자에게 돌려준다. 남자는 주섬주섬 돈을 챙겨 넣는다. 여자는 다시 팔짱을 낀 채 호기롭게 남자를 바라본다.

“왜 깎아줬는지 알죠?”

여자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외투의 깃을 세운다. 남자는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여자는 외투 안에 입은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앞치마에는 색색의 리본이 요란하게 붙어 있다. 손을 휘저으며 무언가를 찾던 여자는 작은 탄성을 내지른다. 여자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뺀 손으로 모자의 커다란 챙을 들고 고개를 숙인다. 쪽지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다. 남자는 망설이다가 쪽지를 줍는다.

“못 찾아도 할 수 없는 거 알죠? 오늘까지예요.”

여자는 ‘오늘까지’라는 말에 힘을 준다. 남자는 멀뚱거리며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어깨를 으쓱 들고는 종종 걸음으로 다시 버섯 지붕의 집에 들어간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소리가 남자의 귀에 이물스럽게 닿는다. 남자는 여자가 들어간 집을 바라보며 쪽지를 만지작거린다. 쪽지는 풍차 모양으로 접혀 있다.

남자는 손바닥으로 힘껏 문을 민다. 문은 열리지 않는다. 남자는 온몸으로 문을 민다. 나무 틀리는 소리가 나고 문틈이 조금 벌어진다. 남자는 좀더 세게 문을 민다. 문에 쌓여 있던 먼지가 남자의 외투와 배낭에 묻는다. 남자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머리칼 사이에 땀이 고인다. 남자는 있는 힘껏 문을 민다. 문이 활짝 열리며 남자의 몸이 나동그라진다. 먼지와 흙으로 범벅이 된 남자는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만족한 웃음을 짓는다.

남자는 배낭을 풀어 품에 안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작동하지 않는 놀이기구들이 남자의 눈에 들어온다. 두리번거리며 숨을 고르던 남자는 배낭을 메고 낑낑거리며 일어선다. 남자의 무릎이 휘청거린다. 놀이기구 사이를 배회하던 남자는 회전목마를 응시한다. 남자는 목마의 옆에 배낭을 내려놓고 목마의 등을 잡는다. 목마의 안장에 달린 발받침이 높아 남자는 여러 번 발을 헛딛는다. 헐떡거리며 발을 동동거리던 남자는 목마의 등에 앉는다. 남자는 활을 쏘는 시늉을 한다. 왼손으로 활을 잡고 오른손으로 활시위를 천천히 당긴다. 남자의 입에서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난다. 남자는 어깨에 멘 통에서 화살을 꺼내 쏜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화살이 바닥에 박힐 때마다 남자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감돈다.

해가 이우는 것을 보고서야 남자는 사냥을 멈춘다. 남자의 얼굴은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다. 남자는 배낭을 메고 놀이기구 사이사이를 돈다. 남자는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재촉한다. 남자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더께 낀 놀이기구와 바람에 날리는 모래뿐이다. 한참동안 놀이공원을 둘러보던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문을 빠져나온다.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같은 노래가 반복해서 흘러나오고 있다. 남자는 버섯 모양의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린다. 여자는 나오지 않는다. 남자는 집의 둘레를 한 바퀴 돈다. 하나의 문 이외에는 창문도, 굴뚝도 없다. 남자는 문고리를 찾아보지만, 문에는 어떤 것도 붙어 있지 않다. 남자는 배낭을 열고 신발 두 켤레를 꺼내 문 앞에 놓는다. 어머니의 신발이다. 신발 두 켤레를 꺼내자 남자의 배낭은 홀쭉해진다. 남자는 배낭을 추슬러 메고 걸음을 옮긴다. 해를 등지고 걷는 남자의 발에 짙은 그림자가 밟힌다.

버스에서 내린 남자는 멍하니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발을 딛고 선 곳이 집이 있는 곳이 맞는지 아닌지 남자는 확신할 수 없다. 남자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바라본다. 얼굴 하나하나를 또렷이 응시하기도 하고, 입술을 옴짝거리며 오른손을 휘젓기도 한다. 남자는 사람들을 보며 말을 걸 태세를 풀지 않는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지나가고 달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다. 남자는 버스정류장에 털썩 주저앉는다. 인적은 점점 드물어진다. 턱을 괴고 한숨을 쉬던 남자는 입안에서 이물감을 느낀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혀를 굴려 무언가를 뱉어낸다.

동그랗게 옴츠린 껌이 남자의 손바닥 위에 떨어진다. 단물이 모두 빠진 껌에서는 고무 냄새와 침 마르는 냄새가 섞여 난다. 남자는 손가락 끝으로 껌을 주무른다. 껌은 형체를 바꾸며 움직인다. 남자가 누르면 누르는 대로, 늘리면 늘리는 대로 자유롭게 움직인다. 남자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껌을 입안에 넣는다. 딱딱하게 굳은 껌이 남자의 혀에 닫는다. 남자는 바지를 걷고 껌을 만지던 손가락으로 종아리를 꾹꾹 눌러본다. 추위에 부은 남자의 종아리에 손자국이 흐릿하게 남는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여자가 준 쪽지를 꺼낸다. 쪽지의 귀퉁이가 드문드문 해져 있다. 남자는 풍차 모양으로 접힌 쪽지를 편다. 추운 날씨 탓에 손가락이 곱아서 남자는 여러 번 헛손질을 한다. 단단하게 접혀 있던 쪽지의 물림 부분이 풀린다. 남자의 손이 가느다랗게 떨린다. 남자는 신중하게 쪽지를 편다. 정교하게 접혀 있던 쪽지가 펼쳐진다. 남자의 입에서 메마른 탄성이 새어나온다. 쪽지 위에는 어떤 글씨나 그림도 없다. 남자는 양손으로 종이의 귀퉁이를 잡고 찬찬히 살펴본다. 종이 위에는 티끌 하나 놓여 있지 않다. 남자는 손바닥만한 종이에 얼굴을 가져다댄다. 종잇장이 바람에 서걱대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남자는 턱 밑에 종이를 놓고 천천히 입을 벌린다. 잇자국이 선명히 박힌 껌이 종이 위로 떨어진다. 종이 위에 놓인 껌에서 흐릿하게 훈김이 피어오른다. 종이는 껌을 중심으로 서서히 축축해진다.

남자는 종이에 쌓인 껌을 주물럭거리며 두리번거린다. 눈가에 잡힌 눈주름이 조금씩 떨린다. 남자는 크게 숨을 내쉰다. 남자의 입에서 허연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남자는 입김으로 손을 녹이며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간다. 남자는 부스의 문을 닫고 바깥을 살핀다. 인적이 드문 밤거리에는 빠른 걸음으로 종종거리며 걷는 사람들이 가끔 지나갈 뿐이다. 남자는 송수화기를 들고 투입구에 동전을 넣는다. 남자는 배낭에서 수첩을 꺼내 보며 번호판을 꾹꾹 누른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번호판을 누를 때마다 손톱 아래의 살이 하얗게 변한다.

동생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남자는 자주 말끝을 흐린다.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던 동생은 남자에게 말을 똑바로 하라고 채근한다. 남자는 동생의 안부를 묻는다. 동생은 긴장이 풀린 듯 숨을 몰아쉬며 껄껄 웃는다. 남자도 동생을 따라 소리 내어 웃는다. 동생은 남자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는다. 남자의 귀에 날카로운 신호음이 박힌다. 남자는 송수화기를 놓고 쓸쓸히 부스를 나간다.

인도에는 눈과 흙이 지저분하게 섞여 있다. 남자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남자의 신발에서 절벅거리는 소리가 난다. 남자는 찌릿한 통증을 느끼며 발을 뗀다. 횡단보도를 건넌 남자는 작은 노점을 발견한다. 노점에는 시들시들해 보이는 귤과 딸기 등속의 과일들이 진열되어 있다. 남자는 사과 한 알을 집는다. 모포를 덮고 난로 가까이에 앉아 있는 상인은 흘끗 남자를 본다. 남자는 슬몃 미소를 짓는다. 상인은 손가락으로 바구니를 가리키며 돈을 넣으라는 손짓을 한다. 사과값이 적힌 골판지가 남자의 눈에 들어온다. 남자는 종이에 싸인 껌을 주물럭거리던 손을 펼친다. 남자는 바구니에 종이와 껌을 넣고 재빨리 달려간다. 남자의 손에는 사과 한 알이 들려 있다. 남자의 귀에 상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더 빠르게 달린다.

가로등 불빛만이 황황한 골목에 들어서서야 남자는 걸음을 멈춘다. 남자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어깨를 들썩거린다. 숨을 몰아쉬던 남자는 심하게 기침을 한다. 남자는 한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고개를 숙인다. 남자의 식도를 타고 신물이 올라온다. 남자는 시큼하고 끈적거리는 침을 뱉어내며 한참동안 숨을 고른다. 바닥에 쌓여 있던 눈이 남자가 뱉은 침과 섞인다. 남자는 골목의 눈이 녹지 않은 것을 보고는 서서히 고개를 든다. 남자의 발자국 이외에는 어떤 흔적도 없는 숫눈길이다. 남자는 깨끗한 눈으로 사과를 문지른다. 사과에서 눈 녹은 물이 흐른다. 남자의 손은 점점 더 심하게 곱는다. 남자는 외투의 단추를 풀고 외투 안에 입은 옷으로 사과의 물기를 닦는다.

남자는 외투 속에 사과를 넣고 길을 걷는다. 드문드문 놓인 가로등의 불빛 사이로 달빛이 파고든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던 남자는 눈길 위에 놓인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표면이 고르지 않은 눈길 위에서 남자의 그림자는 형태를 잡을 수 없이 이지러져 있다. 남자는 팔을 들고 허리를 숙이며 몸을 움직여본다. 남자의 그림자는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뭉뚱그려진 채 움직인다. 그림자에 덮여 어둔 색으로 변한 눈길 위에서 남자는 황망히 걸음을 옮긴다.

어슴새벽이 될 때까지 쉬지 않고 걷던 남자는 기와대문을 발견한다. 남자는 더께가 낀 기와대문에 몸을 기댄다. 남자의 얼굴에 반사된 달빛이 기이하게 빛난다. 남자의 얼굴은 그림자처럼 일그러진다. 남자는 배낭을 벗는다. 배낭이 붙어 있던 등에는 땀이 고여 있다. 남자는 배낭 안에 있는 물건들을 꺼낸다. 남자가 그린 약도와 청동인형들이 차례차례 남자의 손 위에 놓인다. 남자는 약도를 접어 눈 속에 묻는다. 눈 위로 삐져나온 종이 위에서 ‘랜드’와 ‘초대’라는 단어가 휘청거린다.

남자는 기와대문 앞에 배낭을 부려놓고 대문을 연다. 나무 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남자의 코에 진한 흙냄새가 닿는다. 코를 벌름거리던 남자는 크게 재채기를 한다. 달빛만이 황황한 유적지의 적요가 잠시 흔들린다. 남자는 귀를 가만 기울인다. 바람소리와 함께 나뭇잎과 풀잎들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남자는 유적지를 찬찬히 살펴본다. 잔디 위에 듬성듬성 쌓여 있던 눈이 녹고, 잔디가 푸른빛을 내뿜으며 달빛에 반사되고 있다. 무르춤하게 서 있던 남자는 잔디 위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다. 물에 젖은 신발에서 절벅거리는 소리가 난다. 남자는 신발이 내는 소리에 흠칫 놀라 몸을 떤다.

남자는 풀리지 않게 꽉 묶었던 신발 끈을 풀고 신발을 벗는다. 벗어놓은 남자의 신발에서 훈김이 오른다. 남자는 흠뻑 젖은 양말도 마저 벗는다. 남자의 발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남자는 잔디 위에 발을 딛는다. 잔디가 부드럽게 눌리며 남자의 발바닥을 쓸어 올린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다. 간지러움에 희미한 미소를 짓던 남자는 외투 주머니에서 청동인형들을 하나씩 꺼내 잔디 위에 올려놓는다. 청동인형들은 잔디 위에서 말을 타고 땅을 일구고 동물을 사냥한다.

남자는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는다. 외투를 벗고 스웨터를 벗고 바지를 벗는다. 내복과 팬티까지 모두 벗은 남자의 손에는 사과 한 알이 쥐어져 있다. 남자가 발을 딛었던 곳에는 남자가 신중하게 벗어놓은 옷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스웨터의 팔부분과 길이가 같은 바지가 가랑이를 벌린 채 어정쩡한 자세로 누워 있다. 남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남자는 팔을 벌린 채 고개를 든다. 달빛과 섞여 어슴푸레한 빛이 남자의 전신을 비춘다. 털이 없고 동글동글한 남자의 몸은 유화 속의 천사처럼 빛나고 있다. 초록색의 나뭇잎들이 남자의 작달막한 성기와 함께 흔들리며 빛을 낸다. 겨울에도 단단하고 다부진 형태를 유지하는 잎사귀들이 남자의 작고 동그란 몸과 미묘한 조화를 이룬다. 남자는 색이 짙은 잎사귀 하나를 떼어 귀 뒤에 꽂는다.

남자는 고함을 내지른다. 높은 음성이 유적지의 고요를 깬다. 남자는 유적지 이곳저곳을 마구 뛰어다닌다. 말을 타기도 하고 땅을 일구기도 하고 동물을 사냥하기도 하면서 유적지 곳곳을 뛰어다닌다. 남자의 보동보동한 몸에는 나뭇가지와 돌에 긁힌 흔적들이 남는다. 분홍빛이 감돌던 발에는 거뭇한 흙과 마른 잔디가 묻어난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적지를 뛰어다닌다. 야트막한 언덕과 언덕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소리를 지른다. 남자의 경쾌한 목소리가 유적지 곳곳에 퍼진다.

한참을 지치지 않고 돌아다니던 남자는 움집 앞에 선다. 달빛을 받은 움집의 입구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온다. 남자는 움집 앞에 쪼그려 앉는다. 짚가리에서 떨어진 작은 먼지들이 움집 입구를 부유한다. 남자는 크게 숨을 들이쉰다. 오래된 짚가리에서 배어나오는 쿰쿰한 냄새가 남자의 코를 간지럽힌다. 남자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한 입 베어 문다. 단단한 과육이 쪼개지며 경쾌한 소리를 낸다. 남자는 사과에 코를 대고 깊이 숨을 들이쉰다. 아릿한 향이 남자의 콧속으로 들어간다. 사과의 씨까지 모두 씹어 삼킨 남자는 하늘로 고개를 젖히고 소리 내어 웃는다. 남자의 조그마한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남자는 쉬지 않고 웃다가 돌연 고개를 숙인다.

짤막하고 볼품없는 몸이 남자의 눈에 들어온다. 남자의 피부는 발갛게 부어 있다. 남자는 발바닥에 묻은 흙을 손바닥으로 쓸어본다. 손바닥 위에 부스러진 흙이 묻어난다. 남자는 손바닥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다. 남자의 살결에서 흙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온다. 남자는 천천히 손바닥을 핥는다. 남자가 모르는 어느 때의 제의처럼 신성하고 침착하게 몸을 움직인다. 남자의 입안에 까끌한 흙 알갱이들이 구른다. 남자는 땅에 코를 박는다. 깊게 숨을 들이쉬던 남자는 사과향과 섞인 흙냄새를 맡으며 움집 안으로 천천히 들어간다.

남자는 몸을 뒤척이며 살며시 눈을 뜬다. 뻣뻣하게 굳은 손마디를 움직이며 남자는 몸을 긁는다. 밤새 나뭇가지와 바위에 함부로 긁힌 상처들이 온몸에 가득하다. 누운 채로 몸을 뒤척이던 남자는 자신의 몸을 낯설게 바라본다. 작고 하얗던 성기가 단단해져 있다.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것을 바라본다. 혈관들이 맑게 부풀어 오르고 있다. 남자는 작은 피톨들의 부지런한 움직임을 살핀다. 남자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온다. 싱싱하게 솟구쳐 오르는 피톨들을 바라보며 남자는 낯선 느낌에 부르르 몸을 떤다.

움집 밖에서 빛이 흘러 들어온다. 남자는 눈을 찡그리며 빛이 들어오지 않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남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앉는다. 붉고 투명한 빛이 출렁이며 움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그 빛은 다시 움집 입구에서 밖으로 흘러나가고 있다. 남자는 한 손으로 이마께를 가리고 그것을 응시한다. 남자의 몸은 붉은 빛과 섞여 발그레하게 빛난다. 남자는 빛의 발원지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린다. 움집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움집의 입구를 통해 무언가가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움집 입구를 통해 다시 움집 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것을 바라본다. 움집 안에서는 어떠한 그림자도 남지 않는다. 남자의 동그란 어깨가 초록빛으로 짙어진다. 빛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남자의 텅 빈 눈동자가 메아리처럼 흔들린다.

움집 밖으로 태양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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