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미술, 영화등 문화를 연구한다고 할때 세익스피어의 소설같이 주류화
된 분야를 연구한다면 그것을 흔히 메이저리티(Majority) 문화연구라 하며,
삐끼나 창녀등 소외된 분야를 연구한다면 마이너리티(Minority) 혹은 하위문
화(Subculture)연구라고 한다.

항간에 외설성과 작품성을 축으로 비판과 찬탄의 대상이 되었던 `나쁜 영화'
의 경우, 소외된 청소년들 즉 비트(Beat)세대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하
위문화연구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이러한 하위문화연구는 `소수자(minor
ity)'를 겨냥하고 배려하는 입장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따라서 이들
연구의 중요한 과제는 소수자, 즉 타자화되고 억압받는 자들의 사회적 맥락을
파악하는 것에 있다.

가령 쉽게 접할 수 있는 예로 독립영화나 컬트영화를 예로 든다면, 둘다 유
행이라는 자본주의적 문화현상을 거부하는 흐름에서 만들어졌는데도 정작 우리
사회에서 이들 영화가 하나의 유행처럼 번진 것을 보며, 이러한 유행에 문화자
본이 침투했다고 지적하는 것이 문화연구의 중요한 목적이 된다. 소수자들이
자본에 의해 흡수되는 과정이 철저히 버림받는 것이란 사실을 꼬집어 주는 것
이다.

하지만 요즘의 하위문화연구들을 보면 예전의 날카로웠던 반자본적인 칼날이
다소 무뎌진듯 싶다. "문화자본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드
는 예술가라 할지라도 돈만 된다면 얼마든지 뒤를 밀어줄 유연성을 갖기 때
문에, 대다수 비평가들의 소중한 작업이 하나의 지적 유행으로 그칠공산이
크다"는 정윤수씨(문화평론가)의 지적은 문화연구가 퇴색되어간다는 생각에
힘을 더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윤수씨의 이러한 지적을 어째서 우리는 언론재벌
인 경향신문에서 접할 수 있는 걸까. 또,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인디문화가 지
금처럼 자본의 힘을 빌어선 안된다는 조병준씨의 글을 어째서 LG의 `미래의
얼굴'이라는 잡지에서 마주하는 걸까.

현재 문화연구의 문제가 소수자를 배려하는 동시에 다수자의 돈벌이로 악용된
다는 것이라면, 연구자, 비평가들은 민중이 현실의 차별구조 속에서 담론능력
의 부족으로 언급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풀어주는 몫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그
러나 현실에서 문화연구자들 내지 문화비평가들은 철저하게 가치중립을 지향하
기 때문에, 현재 이뤄지는 문화연구들은 대다수가 민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듯
한 느낌이다. 물론 이에 귀다 역할을 한 것은 문화자본의 침투다. 정윤수씨의
`대다수 비평가들의 소중한 작업이 자본에 의해 하나의 지적 유행으로 그칠 공
산이 크다는 지적이 `하나의 지적유행'으로 그치는 현실인 것이다.

요즘 우리의 문화비평가들이 어떻게 하위문화연구를 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면, 서슴없이 자본에 의해 무뎌진 칼날로 허공을 휘두르고 있다고 지
적하고 싶다. 왜 많은 비평가들이 자본의 상품화 전략을 비판하면서 왜 자신
이, 자신의 펜과 글이 상품화된 것을 눈치채지 못할까. 딜레마가 아닐 수 없
다.

<김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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