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가 동아시아를 강타하고, 침몰한 ‘동아시아 모델’의 폐허 위로 앵글로
색슨식 신자유주의 모델이 국가와 시장을 압도해 들어 온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이제 세계
는 러시아 금융위기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전조를 목도하고 있다. 러시아발 위기는 이 지역
에 가장 많은 투자를 했던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지역의 주가를 엄청나게 떨어뜨렸고, 계속된
파장은 미국의 앞마당이라는 중남미 지역에 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만약 이대로 중남미
시장이 쓰러진다면 그것은 미국경제의 침체 혹은 몰락을 의미하며, 이는 곧 세계 경제의 파멸
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계경제의 상황은 어떤 연유에서 발생한 것인가? 문제의 해결책
은 있는 것이며, 혹여 해결책이 발견된다면, 그 주체는 누가 될 것인가? ‘국제연대’의 필요성
은 바로 이 순간 제기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경제’는 이미 개별국가의 수준을 뛰어넘어 존재했다. ‘국제무
역’은 20세기가 도래하기 이전부터 존재했었다. 그러나 국민국가의 수준을 뛰어넘어 존재
하는 경제적 주체의 존재, 경제적 관계의 형성은 70년대 이후 들어 급격히 발전한다. 엄밀히
말한다면, 이 시기 이후의 세계경제는 개별국가들 사이에서 보다는 개별국가를 초월하여 형
성된다. 2차 세계 대전이후 IMF와 IBRD를 만들고,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여 세계경제를 주
도하던 미국의 패권은 60년대 말을 거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세계 전체 금의
60%를 넘게 소유하던 미국이 달러를 금과 바꿔주겠다고 했던 애초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상황이 발생했었기 때문이다. 금에 의해 가치를 인정받았던 달러, 그리고 달러에 고정되
어 있던 각국 통화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세계경제체제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태에서 경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 금보유고를 늘려야 했던 일본 및 유럽국가들의 노력으로 인해 아이러
니칼 하게도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을 제외한 여타 지역에서 금을 늘려나간다는
것은 곧 미국내 금이 줄어든다는 것이고 이는 달러가 금을 기초로 자신의 가치를 유지하기
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뿐만 아니라 고정환율제를 유지하기 위한 각국 정
부 당국의 노력은 미국의 입장과 부딪히는 것이었고, 이는 결국 유럽과 일본 경제가 성장하
면서 점점 미국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미국은 71년에 급기야 금태환정지선언을 하
기에 이른다. 이는 전후 압도적 패권을 유지하던 미국의 힘이 결정적으로 약화되고, 세계경
제가 다극화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는 증거였다.
변동환율제의 채택과 다극화의 양상으로 특징지어지는 세계경제는 곧 엄청난 수준의 ‘세계
화’를 촉발시켰다. 이는 우선 금융부문의 급격한 세계화를 촉진시켰다. 80년대 들어 때마침
발전하게된 컴퓨터 통신기술을 근거로 하여, 끊임없이 변동하는 외환시장에서의 환율의 변
화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아울러 각국 자본시장을 자유롭게 넘나들어 엄청난 수익을 거둬들
일 가능성이 존재하게 되면서 금융자본은 급격하게 팽창하게 된다.
이러한 자본은 언제나 ‘세계적 성격’을 띠게 되었고, 대부분은 해당국의 경제발전과는 전
혀 상관없이 단지 높은 이자율과 이윤을 쫓아 이곳저곳을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투기
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등장은 아울러 세계 기업의 성격을 바꿔놓았
다. 그것은 미국, 유럽, 일본 등지의 몇 개 거대 도시에 세계적 수준의 통제와 경영이 가능
한 핵심본부만을 둔 채, 생산 시설을 세계각국에 두고,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며, 아울
러 각국 우량기업·산업의 주식을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는, ‘금융적 성격을 띤 초국적 생
산자본’의 등장인 것이다.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금융자본들은 기본적으로 일국적 수준의 경제관리를 힘들게 했
다. 만약 자국 시장을 개방하지 않고 있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온갖 압력을 통해 시장을 개
방하게 만듦으로써 국가를 무력화시켰다. 외환사태로 인해 위기에 처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IMF의 강요로 인해 80년대 이미 남아메리카 각국에서 그 실패를 경험했던
신자유주의적 ‘개혁’ 정책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여전히 동
유럽 경제를 어렵게 하는 것 역시 IMF가 강요한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IMF가 자신의 ‘고유한’ 정책프로그램을 동아시아 지역에 강요하는 것은 무엇때문
인가? 그것은 아직 이들 시장이 초국적 금융자본이 보기에 충분히 개방되어 있지 않기 때문
이었다. IMF가 한국에 요구한 구제금융프로그램의 핵심은 시장의 개방이었던 것이다. 만약
시장개방을 하지 않는다면, 한국경제는 세계적 경제권력들로 인해 파괴당하거나 혹은 배제
당할 것이고, ‘수출주도적 산업화’를 구가해오던 한국경제의 입장에서 보기에 이는 엄청
난 타격이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산업자본들은 지역별로 배타적 독점권을 형성하고는, 그 내부에서 가장 싼 값에
물건을 생산할 수 있는 입지를 골라 산업시설을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녔다. 우리가 익히 들
어 알고 있는 NAFTA, EU, APEC등은 모두 자본의 이런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만든 국제
기구들이다. 노동자들이 만약 임금투쟁을 벌인다면, 과거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
었지만, 지금은 자본측에서 공장을 옮겨버리면 그만이다. 영국에서 시작되어 미국으로 전파
되고 지금은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채택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자본의 움직임
을 최대한 지원할 것을 요구하는 ‘정책수단’이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쟁취했었던 수
많은 성과들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각종 사회복지정책들은 경쟁력 강화, 긴축재정이라는 명
목하에 폐기되었고, 노동자의 일자리는 대폭 줄어들거나 혹은 불안해졌으며, 노동조합은 약
화되었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전횡, 산업자본의 국경을 넘어선 횡포와 더불어, 자본의 세계화를 조장하
는 요소는 바로 국제기구들의 존재다. IMF의 악명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바, 사실
현재에 와서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OECD에서 주창하고 올해 10월 타결예정으로 있는
MAI(다자간 투자협정)이다. MAI는 국가에 대한 기업의 우위를 전적으로 보장해주는 협정
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MAI가 체결되면, 세계 모든 나라들은 자신의 국경을 초국적 자본에
게 활짝 열어줘야 한다. 제3세계 기업과 정부의 경쟁력이 선진국에 비해 현저하게 취약하다
는 것이 주지의 사실인 상황에서, 모든 나라가 자신의 국경을 열어줘야 한다는 것은 곧 초
국적 금융독점자본에게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의미이다. MAI 조항에 따르면, 개별국가는
기업이 활동하는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강구해야 하며, 만약 기업활동에 불이익을 주는 개
별국가는 기업이 제소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 역은 가능하지 않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고통받는 당사자인 세계의 노동자 민중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오로지 ‘개별국가’안에서만 표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본주의가 형성되고 국민국가가 만
들어진 이래, ‘정치’의 기본단위는 물론 ‘국민국가’였다. 그러나 경제가 이렇듯 완전히
세계화 되고, 한 나라의 정치경제가 다른 한나라-특히 몇몇 패권국가-와 초국적 금융자본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정치의 공간’을 개별국가로 한정한다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며, 동시에 과학적인 태도도 아니다.


자본과 국가의 횡포에 맞서, 민중의 이익을 되찾기 위해서는 과거와 달리, 고려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은 되풀이되지만, 일국을 넘어선 ‘지배권력’이 현존하
고 있다는 사실이며, 일국내에서의 투쟁은 대단히 한계적일 것이라는 점이다. 한나라에서 진
행되는 투쟁만으로는 초국적 자본을 결정적으로 폐퇴시킬 수도 없고, 패권국가의 세계전략
을 결정적으로 지체시킬 수도 없으며, 아울러 국제기구의 압박을 견뎌낼 수도 없다. 국제연
대는 따라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개별국가의 투쟁 역시 세계적 관점을 가지고 행할 때
더욱 위력적일 것이며, 세계민중들의 지지와 지원이 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퍼져나간 ‘신자유주의’로 인해 세계민중들이
서서히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업문제는 그 대표적 예이다. 각국 민
중들의 이해관계가 같다는 것은 곧 ‘국제연대’ 다시 말해서 세계적 수준에서의 공동투쟁
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본의 세계화는 ‘민중투쟁의 세계화’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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