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30일 토요일. 이날은 나의 어린시절부터 정신적 영웅이었던 헬렌 켈러(1880-1968)의 생가를 방문하는 날이었다. 실로 거의 45년 만에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헬렌 켈러의 자서전인 『나의 삶 이야기』를 처음 읽었던 1960년대 초반인 중학생 때부터 그의 생가를 방문하고 싶었다.

내가 잠시 머물렀던 테네시 주 내쉬빌에서 고속도로 I-65를 타고 3시간 정도 남쪽으로 달리면 헬렌 켈러의 생가가 있는 작고 아담한 도시 타스컴비아가 나온다. 나는 그가 태어나고 공부하고 싸우던 작은 저택(지금은 박물관)과 그 주위를 둘러보면서 다시 어릴 적 감동이 다시 솟아오름을 느꼈다.

특히 그 유명한 수도 펌프가 뒷마당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헬렌은 W-A-T-E-R이라는 글자가 수도펌프에서 쏟아져 나오는 액체(물)라는 사물과의 관계를 알게 된다. 사물의 언어와의 신비스러운 관계를 처음으로 인식했던 “언어적 대전환”의 순간이었다.

후일 나의 경우 “언어의 해방적인 힘”에 끌려 문학을 좋아하고 전공까지 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 였을까? 헬렌 켈러는 태어난 지 19개월이 지나  열병에 걸려 순식간에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끔찍한 3중고(三重苦)의 장애자가 되었다.

어린 헬렌은 완전한 암흑 속에 갇혀 버렸다.  깊은 절망, 좌절, 분노에 빠졌고 거칠고 사나운 아이가 되었다. 그러나 7살되던 해 앤 설리번이라는 개인교사가 그에게로 왔다. 사랑과 헌신을 무장한 설리반 선생님과 함께 헬렌은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갔다.

헬렌은 “나는 넘어지고 다시 서고 … 걷고 조금씩 더 높이 올라가 넓은 지평선을 보기 시작한다. 모든 투쟁은 승리가 된다.”고 말한다. 점자(點字)를 배우고 선생님의 말하는 입술을 만지면서 의사소통하는 법도 배웠다.

헬렌은 학교에서 수학, 물리, 역사, 문학 등 전 과목을 열심히 배웠다. 특히 그는 언어적 능력이 탁월함을 보였고 외국어를 익혔다. 드디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맹인이며 벙어리인 헬렌은 미국 동부의 명문인 래드클리프대학에 입학하였고 우등으로 졸업했다.

이 모든 것은 앤 설리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설리번 없는 켈러는 결코 상상할 수 없다. 설리번에게 매료되어 나 자신도 후일 사범대학에 진학하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가난하고 고단한 어린시절을 보낸 나는 좌절과 불만에 빠져있었다.

중학교 시절 나는 학과공부보다는 책을 읽고 몽상에 빠지기를 좋아 했다. 그것은 일종의 현실도피였다. 그러나 헬렌 켈러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읽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아가 더 이상 감상이나 좌절에 쉽게 빠지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고 멋지게 성장할 수 있단 말인가?

헬렌에 비하면 완전히 정상적인 내 자신이 부끄러웠고 비겁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후 나는 좀더 명랑해지고 학교공부도 열심히 하는 정상적인 아이가 되려고 노력했다. 어렵고 힘들고 좌절이 있을 때마다 헬렌은 생각하고 용기와 지혜를 얻었다.

헬렌은 대학 졸업 후 활발한 사회ㆍ정치 활동을 하였다. 자신과 종교와 사회개혁에 관한 책들도 집필하였고 주변부 타자들이었던 장애인 그리고 여성과 흑인들을 위한 사회보장제도의 개선을 위해 미국전역을 돌며 순회강연도 하였다.

당시 미국의 천민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사회주의자가 되기도 하였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인 1968년에 88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전 세계를 돌며 장애인 등 소수자들의 권익옹호에 앞장섰다.

3중고를 가졌으나 자신의 장애를 과감하게 벗어버린 헬렌의 생애는 너무나 치열하고 눈부시다. 생가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쪽하늘아래 걸려있는 붉은 석양처럼 헬렌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은 내 삶의 화로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덩이로 아직도 나의 마음과 몸 속에서 타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

이 글을 쓴 정정호 교수는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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