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의 대표적인 반체제 저항시인으로 손꼽히는 볼프 비어만은 크게 세 가지 점에서 다른 독일문인들과 차별되는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는 탁월한 시인이기 이전에 독일 분단시대의 상징적 존재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볼프 비어만은 1936년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강직한 공산주의자이자 유태인이었던 아버지는 파시즘에 저항하는 지하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1943년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 가스실에서 살해당했고, 어머니 역시 독일공산당 당원이었다.

적극적인 유태인 코뮤니스트 가정에서 자란 그는 전후 서독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17살 때 자신의 사회주의적 희망을 실현할 꿈을 품고 동독으로 건너가게 된다.

하지만 동독의 현실은 그가 그리던 사회주의 이상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다. 그는 스탈린주의에 의해서 기형화된 동독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고, 당은 공연 및 출판금지와 가택연금이라는 제재조치로 맞섰다.

급기야 동독의 위정자들은 극단적인 강경책으로 눈엣가시 비어만을 제거하기 이른다. 1976년 동독정부는 서둘러 비어만에게 서독 연주여행을 승인해 주었고, 그해 11월 서독 금속노조가 주관한 역사적인 쾰른 콘서트를 마친 직후 그에게 일방적으로 동독 체류권리가 박탈되었음을 통보했다.

청천벽력. 이렇게 비어만은 하루아침에 자신이 선택한 나라로 돌아갈 수 없는 서독 안의 ‘동독-인간’이 되어버렸다. 그의 시민권 박탈 사건을 당시 동서독 예술가들은 강력히 항의하며 구명운동을 펼쳤고, 이를 계기로 비어만은 추방당한 반체제 시인으로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이처럼 서독을 떠나 ‘스스로’ 동독이라는 ‘더 나은 반쪽’을 선택해 이주했으나 다시 서독으로 강제 추방당한 비어만의 삶의 궤적 자체가 동서독 분단체제의 구조적 모순과 아픔을 축약해 보여준다.

<독일적 비참>이란 그의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내 몸뚱이에/잔인한 시험을 했구나/자유의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강요당하여 동쪽에서 서쪽으로”.

둘째, 비어만 자신이 지은 시에 곡을 붙여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가수시인, ‘노래를 만드는 사람(Liedermacher)’이다. 대중적 호소력과 전파력이 강한 노래라는 저항의 무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었던 비어만만큼 세인의 이목을 한 몸에 받는 동시대 시인도 없을 것이다.

 그의 노래에는 정치적 저항과 서정적 미학이 함께 녹아 있다. 도발적일뿐만 아니라 매혹적으로 아름답다. 서사와 음악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절망과 체념을 희망과 용기로 바꾸는 힘이 있다.

따라서 고독한 몽상가라는 전통적인 시인의 이미지는 비어만에게 좀처럼 어울리질 않는다. 그에게 꼭 들어맞는 시인이 있다면 그가 ‘큰형님’으로 모시는 중세 프랑스의 부랑가인(歌人) 프랑스와 비용일 터이다.

 미국의 음유시인 밥 딜런은 물론이고 칠레의 고통 받는 민중들을 대변했던 가수시인 빅토르 하라도 얼른 떠오른다. 아니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 곁엔 70년대 한국 저항문화의 상징이었던 김민기가 있지 않았던가.

셋째, 비어만은 독일문학사상 가장 공격적인 ‘풍자의 자객’이다. 도발적인 그의 노래는 칼로, 비수로, 독 묻은 가시로 변해 표적을 겨눈다. 그가 자신의 기타를 ‘6개의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 ‘6연발 자동소총’이라 부르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동독에서의 유례없는 체제비판은 말할 것도 없고, 서독으로 쫓겨난 후에도 비어만은 기가 꺾이지 않고 반핵·반전 운동, 외국인 박해공박, 폴란드 자유노조사태, 녹색당 참여, 보수 언론과의 싸움, 통일문제 등 국내외 중요한 정치적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때그때 모순과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풍자하는 ‘유쾌하게 무례한’ 참여시인의 면모를 꿋꿋하게 이어왔다.

그에게 비판적 풍자는 부당한 세상에 던지는 돌멩이, 말하자면 문학적 선전포고에 다름 아니다. 비어만의 헌걸찬 출정가 <가수의 등장연설>은 이렇게 끝난다. “맨 이마로 우리 시대를 한방 먹이자!/존경심 없이/누더기셔츠를 풀어 젖히고 노래하자!/외치자!/뻔뻔스럽게/웃자!”

이 글을 쓴 류신씨는 문과대 독어독문학과 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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