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후 1960년대 초반까지는 서구가 장기호황을 누리면서 과학과 사회진보에 대한 낙관
론이 팽배하던 시기였다. 2차대전중 맨해턴프로젝트의 성공은 전후 서구 과학정책의 모태
가 되었으며, 구체적으로 이는 미국의 과학자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가 제안한 국가
와 과학자공동체간의 일종의 사회계약과 그 결실인 미국립과학재단(NSF)의 모델이 되었다.
이 사회계약에 의하면 국가는 과학에 대해 지원하고 과학은 당연히 기술진보로써 국가에 기
여(보건, 복지, 국방 등)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이렇게 될 수 있으려면 과학에 대한 관리
는 철저히 과학자공동체의 자율적 내부통제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에 의한 과학의 민주적 통제는 과학발전을 질곡시킬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강력히 거부
되었다. 낙관론이 지배하던 시대적 분위기에서 이러한 모델은 국가와 과학자공동체 그리고
일반사회에 의해서 이의없이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과학과 과학정책은 이후 황금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과학에 대한 낙관론은 서구사회에서 급격히 무너져 내
렸다. 그동안 산업화과정에서 누적된 환경오염의 심각성에 대한 우려, 그리고 미국의 베트남
전 참전에 대한 저항운동과 거기서 사용된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반대 등이 한꺼번에 터져나
와 과학기술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이 대중과 지식인, 학생 사이에 팽배해 갔다. 이들에게 과
학은 합리적이기는 커녕 억압적인 국가권력과 자본의 손에 쥐어진 지배수단으로 인식되었
다. 이후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의 정치적 분쟁(핵발전소, 유전공학 등)이 빈번해지면서도 과
학을 학문적으로 정치적 현상의 하나로 간주하는 보다 새롭고 깊은 이해가 생겼다.

70년대 중반에 등장한 ‘과학지식사회학(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약칭 SSK)’은
과학이 인간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힘들로부터 면역되어 있거나 예외적이지는 않다는 것이
다. 전통적 관점에서는 좋은 과학은 진리를 생산하고 따라서 진리생산자들은 정치에서 특별
한 역할을 부여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 이에 반해 SSK에서는 과학지식을 인간적 탐구
행위의 협상적 산물로 취급하는데, 이는 과학자간의 상호작용뿐 아니라 연구후원자와 규제
기구 등 과학자공동체 외부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만일 모든 과학지식이 협
상의 산물이라면 과학지식의 내용은 사회적 행위자들간에 협상의 권위가 어떻게 분포되어
있느냐에 크게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정부는 과학지식을 형성하고 해석하고 이용하는 데
있어서 여러 사회적 행위자들이 다양한 영향력을 갖고 참여하는 핵심적 매개제도가 된다.

과학자사이의 공통된 견해는 과학자들이 다루는 정부정책의 사안에 대하여 시민들은 관심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지식의 결핍이 시민으로 하여금 규제정책(환
경규제, 식·의약품 규제 등)과 같은 과학집약적 분야에 참여할 자격이 없도록 만든다는 것
이다. 아마도 SSK가 이제까지 가장 분명히 이룩한 성과라면 이러한 ‘지식결핍’ 모델을
떨구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적 분쟁에 대한 경험적 사례연구들은 시민들이 자신의
일상생활에 직접적 위협으로 감지한 쟁점들에 대해 어떻게 참여했는지를 분석하였는데, 시
민은 그들이 필요할 경우 종종 상당한 기술적 지식을 찾거나 얻는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의 과학사회학자 브라이언 윈(Brian Wynne)은 체르노빌 사건후 영국 북서부 컴브리아
지방의 목양농이 과학자들의 방사능오염에 대한 충고에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연구하였다.
과학자들의 충고와는 달리 농민들은 방사능물질이 체르노빌이 아니라 인근의 셀라필드 핵발
전소로부터 오래전부터 나온다고 믿었고, 그 지방의 토질과 양의 먹이풀에 대하여 과학자들
이 모르는 사실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렇게 국지적 환경과 상황에 대한 일반인의
지식은 심지어 통상적인 과학적 기준으로도 이른바 ‘전문가’의 지식보다 종종 더 정확할
경우가 있는 것이다.

과학정치학의 창시자중 한명인 돈 프라이스(Don K. Price)는 1960년대에 민주주의가 과학에
는 부적합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왜냐하면 과학은 진리의 발견에 관한 것이고, 이는 과학자
의 가치관이나 대중의 투표에 의해 영향받지는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SSK와 같
은 새로운 과학기술학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과학이 사회정치적으로 구성되며 또 사회정치
를 구성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결코 과학과 무관하지 않으며, 과학을 민주적으로 구성하려면 우리
의 사회정치(특히 과학정책의 결정과정)가 지금보다 훨씬 세련되고 민주화되어야 함을 깨달
을 수 있다. 정부는 과학의 올바른 발전과 과학정책의 정치적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라도 편
협된 전문가주의를 떨쳐버리고 시민참여를 적극적으로 촉진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그것이 사회구성원들의 일상생활을 급속히 바꾸어 놓고
있지만, 정작 과학과 일반시민간의 의사소통은 아직 낙후되어 있다. 여기에서 점점 더 언론
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으나 언론은 주로 ‘과학을 파는’일에 집중해왔고 자신의 관행에
따라 과학을 극화해서 보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과학의 실제보다는 신비화를 조장하는 데
기여해 왔다.

미국의 과학사회학자 넬킨(Dorothy Nelkin)은 언론에 나타난 과학의 이미지를 네가지로 분
류하고 있다. 첫째, 과학자(특히 노벨상 수상자)를 스포츠나 연예계의 수퍼스타와 같이 묘사
하는 것, 둘째, 과학지식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라고 묘사하는 것, 셋째, 치열한 경쟁
때문에 날조행위가 때때로 일어나지만 과학자체는 순수하다고 이상화하는 것, 넷째, 사회생
물학처럼 사회적 논쟁이 분분한 과학이론을 보도하면서 반대자보다 과학자편을 들어 결국
과학의 권위를 드높이는 것 등이다.

그러나 넬킨은 이러한 보도 관행은 “과학의 실제를 회피하고 연구의 사회적 과정을 무시함
으로써, 결과적으로 과학을 난처하게 만들고 과학과 시민간의 거리를 영속화하는 데 기여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는 오늘날처럼 과학이 공공정책과 정치적 쟁점에 긴밀히 연결되어
명실공히 일반문화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시대에 더욱 문제가 있는 태도라는 것이다.

SSK는 과학과 언론의 관계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기해준다. 과학과 언론에 관한 기
존의 전통적 관점은 과학기술적 정보를 보다 많은 대중에게 쉽게 전달해주는 ‘대중화’
(popularization)의 모델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과학을 고정되고 객관적인 지식으
로 간주하고 이를 관심없고 무지한 대중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느냐만이 문제로 부각된다. 이
러한 지식의 일방적 전달이 과학에 대해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이라는 생각은 앞에서 살펴본
과학 정책에서의 ‘지식결핍’ 모델과 동일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SSK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과학언론의 모델에서는 과학자간 의사소통과 이런 ‘대
중화’간의 명확한 구분은 없다고 주장한다. 과학자가 ‘과학지식’과 그것의 ‘대중화’
사이에 구분을 강조하는 것은 그러한 구분이 과학자의 권위를 지키는 데 유용한 수단이 되
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신에 SSK에서는 상호작용적 모델을 주장하는데, 이는 과학과 시
민간의 성공적인 의사소통은 과학적 권위를 거부하고 청중인 시민의 관심과 이해관계를 수
용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언론에서 시민은 수동적인 객체나 소비자로만 간주되어선 안된다. 시민과 언론
과 과학자간의 쌍방향적인 대화와 상호작용을 통해 시민을 과학의 사회적 구성에서 능동적
인 주체로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언론은 과학을 이상화하거나 신비화하기보다는 인간활동으로서의 그 가치와 한계를 알려줌
으로써 오히려 과학과 시민간의 거리를 좁힐 수 있다. 과학의 불완전성을 드러내어 그 권위
를 낮추는 것은 ‘반(反)과학’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전문지식과 시민지식간의 상호보완적
결합을 자극하여 과학의 보다 바람직한 발전을 촉진하는 길이 될 것이다.

김환석<국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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