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문화권 상호 존중하는 정치학 추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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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치학회(IPSA)는 1949년 유네스코의 후원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캐
나다, 인도 정치학자들이 발기해 설립되었다. 첫 세계대회가 1950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23개국 80여명의 학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이후 이번 서울대
회에는 80여 개국 2,500여명의 학자들이 참가할 정도로 엄청난 발전을 해왔
다. 세계정치학회 산하에는 37개 연구위원회와 13개의 연구그룹이 수시로 연
구모임을 갖고 이들이 다음 세계대회의 패널을 구성하게 된다.

지난 8월 21일 5일간의 일정을 끝으로 폐회한 세계정치학회 제 17차 서울대회
는 `정치학의 올림피아드'라는 별칭에 걸맞게 정치학의 제반 분야에서 전세계
각국의 정치학자들이 약 1천 여건의 논문을 발표, 토론하는 성과를 기록했다.
`갈등과 질서'(Conflict and Order)를 주제로 한 이번 학회에서는 개최지인 한
국의 상황을 고려, `한국의 민주화와 세계화', `한반도에서 갈등과 안정의 딜레
마', `한국의 민주화와 세계화', `김정일 체제에 대한 연구' 등 한반도 상황을
주제로 한 패널이 10개 이상 열려 국내외 학자들 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여느 대회와는 다르게 민주체제론의 권위자인 장 르카 세계정치학회장, 테드
로이 차기학회장, 엘리노프 옴스트롬 미국정치학회장, 민주화 이론의 대가인
후안 린츠, 국가론의 대부 클라우스 오페, 정치문화 연구의 대가 가브리엘 알
몬드 등 현존하는 세계적인 학자들이 거의 빠지지 않고 참가하여 대회를 더욱
빛냈다. 독일 훔볼트 대학의 오페 교수는 라운드 테이블 토론을 통해 공산권의
붕괴가 정치학자들에게 많은 이론적 동요를 일으키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이런 변화로 인해 국가 내부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면서 국민간의 형제애가
상실되는 등 여러 `근대적 현상'이 늘어나고 있는 점에 학문적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했다.

그는 특히 저개발국권 뿐 아니라 선진 사회에서도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구조적 비양심성'이 지배하는 분위기로 전환되면서 정치의 기능 자체가 무기
력해지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으며, 국가가 당연히 앞장서 해결해야 할 인륜
적 과제인 국민복지의 증진, 문화적 의사소통의 활성화 등을 포기함으로써 탈
국가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한반도의 통일문제에 있어서 오페
교수는 지금 이상적으로 믿고 있는 제도적으로 완벽한 민족통일보다는 자유롭
게 왕래가 이루어질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민족주의의 지나친 고취로
인한 폐해를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등 한국 국민의 민족정서를 잘 이해하
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이렇듯 한반도 관련 패널이 상당수 마련되었고 비교적 다수의 학자들이 논문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문제나 남북한 관계를 둘러싼 주변 강국들의 이익갈
등에 대한 발표논문들은 기존의 연구분석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많은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주제와 관련해서 일본 메이지 대학의 무샤
코지 킨히테 교수는 주목할만한 주장을 했다. `85-'88년 기간 동안 세계정치학회
장을 연임한 바 있는 그는 "현재 북한은 실제로 동북아 안보의 결정적 위협요인이
라고 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으며, 오히려 북한에 대한 주변국들의 적대의식은
한, 미, 일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설파했다. 이런
구도하에서 "미국이 여전히 개별 국가들의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기 때
문에 현재 세계 평화체제는 확립되지 않은 불안정한 상태"임을 강조하였다. 북한의
정치 경제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킨히
테 교수는 "이미 수년전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을 만났을 때 북한은 개방을
갈망하고 있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항복'을 원하는 미국, 일본, 한국
등 외부세력에 의해 그 가능성 자체가 무산됨에 따라 북한은 원래의 고립상태로 복
귀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한 고위층의 연속적인 망명사태에도 불구하고 김정일
체제는 상당히 안정적인 응집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사실 이번 대회의 주제에도 포함된 `갈등'의 대표적 경우가 바로 한반도이다. 이
갈등은 냉전시기 동안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열강에 의해 조절-통제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은 묘하게도 남북 모두 미국의 통제를 받는 듯한 인상을 지울수가 없
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갈등의 주체인 남한과 북한이 스스로의
힘으로 통일을 이루어 내는 일이다. 또 다른 주제인 `질서'가 그 동안은 강대국 대
립구도에서 비롯된 `강제에 의한 질서'였다면 당사자들의 합의에 의한 통일은 `합
의에 기초한 질서'를 만들어 낸다는 데 큰 의의가 있으며, 이런 사례는 지구촌 갈
등 해소에 가장 적합한 해결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를 통해 부각된 새로운 세계정치학계의 조류는 이제 세계를 서구
(Western)와 비서구(Non-Western)의 이분법으로 더 이상 보지 않는다는 점
이다. 사실 서구의 경우 기독교적 동질성이라는 기초가 있지만 비서구 국가들
의 경우 문화와 종교면에서 너무나 다양하다. 과거에는 `서구'하면 민주주의,
사회계약 등의 개념을 떠올렸고 `비서구'는 독재, 위계질서 등의 개념과 동일
시함에 있어 부담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비서구 국가들 중에서 민주주의의
정착 사례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는 이들 `비서구' 국가들의
전통문화를 새롭게 평가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 이제 서구 일변도의 시각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권끼리 상호 존중하는 방향으로 정치학의 개념을 재정의
해야 하는 과제가 바로 우리 앞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이번 대회를 통해 나타난
이러한 정치학계의 학문적 추세는 지금껏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헌팅
톤 교수의 `문명 충돌론'을 부정하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 인류사회의
미래에 대한 불안한 전망들을 뛰어넘고 `정보사회', `지식사회'의 도래를 적극
적으로 수용하려는 인류의 소망이 이번 세계정치학회 서울대회를 통해 표현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최동주<포스코경영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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