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약=연세춘추]  ‘연세대학교 OOO씨의 과거 친일행적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머지 않아 대학들이 이렇게 사과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최근 고려대 총학생회(11일), 우리대학교 내의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아래 민노당학위(연대), 18일), 서울대 ‘친일잔재청산위원회(아래 청산위, 23일)’, 이화여대 내의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아래 민노당학위(이대), 25일)가 학내친일청산을 외치며 잇따라 기자회견을 열어 화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가까운 시일내에 ▲학내친일인사 명단 공개 ▲이들의 이름을 딴 각종 건물·동상 등의 철거 ▲청산지지 서명운동 등을 추진할 뜻을 밝혔다.

학내친일, 영원한 금기?

시로하라 라쿠슈운. 민노당학위(연대) 위원장 박이정엽군(경제·00)은 초대총장 백낙준 박사를 이렇게 부른다. 박군은 “‘백낙준’이란 이름은 동상 등의 우상화 작업을 통해 연세인에게 민족의 선각자라는 잘못된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며 “일제 말기 친일행적을 일삼은 백낙준을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이러한 조작된 상징화를 부정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최근 불고 있는 학내친일청산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그동안 대학가에서 ‘위대한 선각자’로 추앙받아온 인사들의 이미지 추락을 초래한다. 따라서 학내에서 이 문제는 그동안 금기시돼 왔다. 한 예로 서울대 미대 김민수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원로교수의 친일행적을 언급한 ‘죄’로 재임용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이번 기자회견 후에도 해당 학교들은 공식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심 불편한 심사를 감추지 못했다.

“한 교수님이 ‘일제 시대에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왜 경솔한 행동을 하느냐’고 나무라신 적도 있어요”라고 말하는 서울대 미대 학생회장 최유진양(조소·00). 청산위 대표를 역임하고 있는 최양은 “자유로운 토론이 오가야 할 상아탑에서 친일 문제만큼은 금기시되고 있다”며 “친일파들이 아직도 학내에서 존경받는 것을 보면 역사가 거꾸로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해방 60여년이 지난 지금 대학가에서 때아닌 친일청산바람이 불고 있는 배경에는 바로 ‘한승조 망언’, 독도 파문 등으로 달아오른 격렬한 반일감정이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해방 후 과거사 청산실패와 이에 따른 친일학자들의 건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의 지적이다.

방국장은 “이번 기자회견에서 실명이 거론된 백낙준, 김활란, 장발 등의 친일행적은 이미 역사학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학내에 친일인사가 많았던 이유는 당시 우리나라 대학들이 상당수 일제의 지배에 예속돼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학내에서부터 이러한 일제잔재청산이 선행되지 않으면 사회전체의 과거사 청산도 요원하다”고 방국장은 주장한다.

친일청산운동, 순탄치만은 않아

위의 학내 단체들은 현재 친일인사들의 동상·기념관 등의 철거를 학교측에 요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이들은 강연회 개최, 서명·모금운동 등을 포함한 다채로운 활동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민노당학위(이대) 위원장 장유진양(철학·00)은 “학교측이 쉽게 요구를 수락할 것 같지는 않다”면서도 “김활란 동상과 그의 세례명을 딴 헬렌관의 명칭 변경을 요구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운동의 정점이 될 학내친일인사명단은 이르면 이번달 말, 늦어도 4월 중순까지 발표될 전망이다. 그러나 정작 학생들의 반응은 미온적이다. 실제로 각 기자회견장에는 인산인해를 이룬 언론사 기자들과는 달리 일반 학생들은 모습을 감춰 대조를 이뤘다.

“그런 기자회견이 있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라는 박현구군(경제·04)처럼 이번 운동 자체에 대해 아예 모르는 학생들도 많다. 최양도 “아직 쟁점화가 되지 않아서 학생들의 지지와 관심이 부족하다”고 털어놓는다.

활동상의 미숙한 부분도 적지 않다. 고려대를 제외한 다른 학교들은 총학생회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서로간의 연대에 대한 합의도 이루지 못한 실정이다. 이번 발표가 구체적 사전조사 없이 이뤄졌다는 비판도 있다.

민노당학위(연대)는 기자회견에서 ‘유억겸은 조선총독부 관리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는 잘못된 정보를 말하는 등 학내친일청산을 외치면서도 정작 학내친일인사들에 대해서는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최양도 “장발, 현제명, 장우성 등을 제외한 다른 친일인사들의 명단 파악에는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방국장은 “선조사 후발표의 형식이 돼야 하는데 일의 선후가 바뀌었다”며 학생들의 성급함을 지적했다.

이번 운동 자체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좥프랑스의 대숙청좦의 저자 주섭일씨(69)는 “프랑스가 과거사청산을 철저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식민지배환경·기간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다”면서 “그 시절에 단지 일본에 협력했다는 이유만으로 깎아내리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또한 ‘반핵반김공동본부’ 본부장 서정갑 동문(지난 1964년 행정학과 마침)은 “백낙준 박사 등의 학문적 업적 등은 간과한 채 일순간의 친일 행적만을 가지고 마녀사냥을 한다면 당사자뿐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큰 누가 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역사 바로세우기, 그 의의는?

우리나라 대학들은 그동안 많은 지식인들을 양성해왔다. 그러나 일제시대 친일 행각을 벌인 지식인을 다수 양산해 낸 것도 사실이다. 대독협력자를 철저히 숙청한 프랑스의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은 “지식인은 책임의 화신”이라며 한 나라 도덕과 양심의 상징인 이들의 반민족적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비록 늦었지만 대학의 오랜 치부를 학생들 스스로가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번 운동은 의미가 있다. 물론 논의의 진행 과정에는 신중이 기해져야 할 것이며 이 운동에 대한 가치판단은 결국 학내 구성원의 몫이 돼야 할 것이다. 이번 운동을 계기로 대학이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춘 교육기관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정진환 기자 anelka@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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