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눈을 돌려 오늘날처럼 국제질서가 급박하게 진행되었던 시대를 반추
해보면 몽고의 세력확산에 가속도가 붙었던 13세기초에 이목이 집중된다. 정
복자 칭기즈칸의 지도아래 중앙아시아 일대와 유럽 동부를 제패한 몽고는 1
3세기초 과녘을 동쪽으로 돌려 만주와 한반도를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다.한
편, 고려는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북방민족에 대한 대비는 커녕 정예를 사병
화(私兵化)하고 민중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는 등 일탈의 길을 계속 걷고 있
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고려는 몽고의 세력확산에 밀려 고려 국경을 넘어
온 거란족을 몽고군과 함께 토벌함으로써 몽고와 끈질긴 인연의 서막을 장식
하게 된다.

거란족의 공동 토벌을 계기로 고려와 국교를 맺은 몽고는 고려 왕정에서 행패
를 부리고 엄청난 물자를 요구하면서 양국관계를 악화일변도로 몰아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225년 몽고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에서 살해됨으로써
양국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고야 만다. 당시 고려 정복의 야심을 품고 있던
몽고는 물 만난 고기처럼 이를 놓치지 않고 침략적 구실로 이용함으로써 1231년
제1차 침략을 감행한다.

`초적'이라 불리는 농민군 그리고 노비, 부곡민, 소민으로 이루어진 천민군의
노력은 몽고군을 수세로 몰아갔고, 급기야 1232년 몽고측이 내세운 막대한 물자
요구를 고려측이 받아들임으로써 강화를 맺게 된다. 그러나 강화 이후에도
몽고는 공공연히 고려 내정에 간섭하였으며 막대한 양의 물자를 요구하자 최우정권
은 항전을 결의하고 강화도 천도를 단행하게 된다.

강화도 천도와 관련해, 당시 고려의 역량으로는 개경사수가 거의 불가능했
으며 몽고 기병은 해전에 약하다는 사실을 근거로 강화도 천도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최우정권은 천도를 단행하면서 민중
들로 하여금 산이나 섬으로 옮겨 살도록 지시했을 뿐 각지에서 항전을 전개하고
있는 민중들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이를 조적으로 이끌어 내려는 모습들은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뿐만아니라 몽고군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정예부대인
토방을 자신의 호위병으로 두었고 이름뿐인 중앙군으로 하여금 세계 최강의
몽고군과 싸우게 했다는 사실은 강화도 천도가 적극적인 항전이라기 보다
최우정권의 안전을 1차적 목적으로 하는 소극적인 항전에 불과하다는 비난에
더욱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여몽항쟁은 1232년 2차 침략, 1235년 3차 침략, 1247년 4차 침략, 1253년
5차 침략, 1254년 6차 침략까지 계속된다. 6차까지 가는 치열한 전투속에서
양측의 강화교섭이 진행되던 중 1258년 무관 김인준, 문관 유경 등 문무관료들이
왕권회복을 명목으로 3월정변을 일으킨다. 3월정변 이후 교섭은 본격화되어
1259년 고려 태자(후의 원종)의 몽고방문을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된다. 요구
조건은 고려에게 일정한 굴복을 강요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군사적 정복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시인하고 고려의 주권을 인정하겠다는 의사의 표시로 볼
수 있다.

3월정변으로 60여년에 걸친 최씨정권은 막을 내렸으나 여전히 실권은 무신
김인준의 손에 놓여 있어 무신정권 아래서의 왕권회복이란 형식적일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권력구도속에서 권력다툼은 필연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몽고화의 이후 `개경환도'를 둘러싼 `무신정권'과 `국왕, 문신관료'에 의한
권력다툼이 그것이다.

개경환도를 주장하는 `국왕,문신관료'와 강화도 고수를 주장하는 `무신관료'
간의 첨예한 입장 대립은 1269년 몽고를 찾아간 원종이 무신집권층 제거와
개경환도를 위한 몽고군 파견을 요청하면서부터 서서히 판가름이 나게 된다.
1270년 몽고군의 호위 속에 귀국한 원종이 무신일파를 제거함으로써 정중부의
쿠데타 이후 실로 1백년만에 왕정복고를 이루었지만, 이는 몽고로 하여금
고려왕실을 앞세워 고려에 대한 실질적 통치를 가능케 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민중봉기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고 이들이 무신정권의
권력기반이던 삼별초의 반란에 힘을 실어 줌으로써 4년간의 삼별초항쟁은
시작된다. 민중들의 폭넓은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결집시키려는
역량의 부족으로 인해 삼별초는 1273년 원과 고려 정부의 연합군에 의해
제주도에서 섬멸당하게 된다.

20만명이 넘게 몽고로 끌려가고 귀중한 문화재가 파손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불러 일으킨 여몽항쟁에서 항쟁의 주체는 바로 몽고 침략자와 지배층의 이중
수탈에 억눌리던 고려민중들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몽고로 하여금 군사정복의
불가능성을 인식케하고 나아가 고려의 주권을 제한적이나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민중의 피로 얼룩진 침략자의 손을 잡음으로써 민중들로부터
그 권위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었던 고려왕정은 이후 서서히 붕괴의 과정을
밟게 된다.

<김수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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