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가오는 2천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준비하는 현 시점에서 중대신문에서는
'민중의 성장'에 초점을 맞춰 과거 1천년을 되돌아본다.
지난 1천년을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구분해 그 당시 시대상황 설명과
역사를 뒤집어보는 가상 시나리오 형식의 글로 이루어질 '다시 그려보는
민중천년사'를 통해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언제나 민중이고 민중이어야 함을
확인할 것이다. <편집자주>
------------------------------------------------------------

우리 나라의 역사를 살펴 보면, 쌀이나 옷가지 등의 일상 용품을 빼앗는 노
략질부터 시작하여 나라를 통째로 집어 삼키려는 정복 전쟁에 이르기까지 수
없이 많은 외침을 당해 왔다. 그 가운데에서도 고려 시대에 일어난 몽고와의
전쟁은 가장 장기간에 걸친 처절한 싸움이었다.

몽고와의 40여 년간에 걸친 6차의 전쟁은 전 국토를 황폐화시켜 12세기 이래
농업 경영의 발전을 통해 서서히 성장해 가던 농민들을 도탄에 빠뜨렸고 수많은
난민을 만들었다. 특히 거라대(車羅大)가 이끈 6차 침입 때에는 한 해에 2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포로로 잡혀갔고, 죽임을 당한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과연 몽고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던가.

고려가 몽고와 첫 접촉을 한 것은 1차 침입이 있기 20년 전인 1211년으로,
금나라에 파견된 고려의 사신단이 때마침 금나라를 처들어온 몽고군에 몰살당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 사건은 직접적인 충돌이 아니었지만 고려 정부에 위기감을
불어 넣기에는 충분하였다.고려군과 몽고군이 직접 대면한 것은 몽고에게 쫓겨
고려에 들어온 거란의 유족(遺族)을 섬멸하겠다는 구실로 몽고군이 입경(入境)
하였던 1219년이다. 이 때 몽고는 강동성에서 고려군과 함께 거란을 제압한 후,
고려에 유화적인 화의(和議)의 제스처와 함께 조공을 요구하였다. 그 후 1225년에
사신 저고여가 의문의 살해를 당하였고, 몽고는 혐의를 고려에 뒤집어 씌워 급기
야 1231년에 살리타이를 보내 고려 정벌에 나섰다.

지금 잠시 살펴 본 것처럼 고려는 시간적으로 몽고를 대비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는 문헌에는 이상하
리만치 고려측의 위기감이나 대비 태세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사신의 죽음
으로 외교적 긴박감이 더해가는 시점이 되어서도 왜 고려 정부는 불감증이
되었을까. 더 이상 몽고의 위기란 없다고 진정 느껴서일까.

사실 무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농민과 천민들 가운데는 자신들과 똑같은
신분에서 자수성가한 무인들을 매우 환영하였다.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해 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 토지탈점과 과중한
수탈은 도리어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게 만들었고, 무신 정권을 향해 항쟁
하거나 초적(草賊)이 되는 사람만을 늘려 갔다.

당시의 위정자들이 아무리 어리석더라도 대륙에서부는 피바람을 모르지는
않았으리라. 혹 그들은 놀라와진 자신들의 지위를 한껏 누리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몽고의 침략 사실조차 몰랐던 고려가 몽고군을 물리친 것은 기적에
가깝다. 이 때라도 위정자들은 전의를 불태우며 백성들과 함께 결사항전의 태세를
갖추었어야 했다. 물론 고려의 군사력이 어떻든 몽고의 침략 자체를 제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몽고의 군대가 강력한 기마병에 공성술이 뛰어
나다 하더라도 산악이 많은 우리 나라에서는 그들의 장기를 십분 발휘할 수 없었
으리라. 그 점은 고려 백성들이 정부의 별다른 지원없이도 40여 년간을 버틴
것만으로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만약 그랬다면 전 국토의 유린과 아울러 소중한
문화 유산을 보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누가 그랬던가. 군사력은 병력의 다과가 아니라 단결과 자신감이라고.
그런데 고려의 위정자들은 어떠했는가.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하여 강화 천도를
단행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고작한 것은 부처의 원력을 빌어 몽고군을 물리친다고
공력을 들여 대장경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았던가. 백성들이 정부에 대해 가지고
있던 최후의 희망마저 빼앗는 행위를 하고 말았다.

게다가 왕실과 귀족들은 전란 기간에도 해도를 통해 올라오는 물품 덕에 강화
에서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육지에 남아 있던 백성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강화로 간 피난 정부는 육지의
백성들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야겠다는 생각보다 자기네들의 계급적 특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했다. 고작해야 백성들에게는 산성이나 해도로 피신하라는 포고뿐,
그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려는 의지는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그나마 산성이나
섬으로의 이주는 생활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채 강행됨으로써 몽고군의 포위로
물과 식량을 구하지 못해 굶어죽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하지만 고려 백성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 침략군과 용감히 맞서 외적의 침략을 저지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문득 저 옛날에 그리이스와 페르시아 간에 벌어졌던 페르시아 전쟁이 생각난다.
수많은 폴리스로 나뉘어 패권을 다투던 그리이스가 동방의 강자 페르시아의 침략에
직면하자, 싸움을 일시 중지하고 모두가 힘을 합해 결국 살라미스 앞바다에서
대승을 거뒀던 사건 말이다. 이 사건을 어느 학자는 세계 역사의 전환점이라고까지
극구 추켜 세우던데.

상대영<문과대 사학과 강사>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