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를 정의 내리는 방식은 다양하다. ‘다수문화에 대항하는 강렬한 자기 생성의 문화집단’이라는 적극적인 형태의 소수자들을 비롯해, ‘저항집단의 공격이나 욕설에 시달려 찌그러진’ 소심한 소수자까지 마음 먹은 대로 정의 내리기 나름.

하지만 대개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 즉 마이너리티란 여전히 사회적 약자나 소외자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주류의 ‘구별짓기’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소외의 영역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수란 ‘소신있는 항변’이라기 보다 서러움 그 자체다. 

일반 사회의 축소판이랄 수 있는 대학 사회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대학 내부의 소수로 눈을 돌리면 다양한 집단이 눈에 들어온다. 편입생, 장애인 학생, 외국인 학생 그리고 동성연애자 같은 성(姓)적 소수자들을 비롯해 학교 안에서 누구보다 자주 마주치게 되는 비정규직 근로자까지.

강단에 서지만 전임교수와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대우의 차이가 나는 시간 강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간과할 수 없는 소수

이들 각각은 대학 구성원 전체의 비율로 봤을 때 적은 수치일지 모르지만, 실제 인원수만 놓고 봤을 때는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다수’이기도 하다. 특히 편입생의 경우, 2004년 발표된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총인원이 꾸준한 증가추세를 보이며 5만명을 훨씬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 구성원으로서 그들의 역할과 몫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편입을 통해 전에 다니던 대학보다 더 명성있는 ‘타이틀’을 얻었다고 해서 그들이 온전히 그 대학 구성원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휴게실 없어 피씨방으로 향하는 강사들

새로운 공간에 편입된 이들은 기존 재학생들과의 소통·유대 부분에서 어려움을 호소한다. 대부분 새내기를 대상으로 신입부원을 모집하는 동아리의 관례를 보더라도 편입생들의 공동체 단위에 대한 선택의 폭이 훨씬 좁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기존 재학생들이 의식적으로 그들과 경계선을 긋는 것은 아니겠지만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경계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한편 제도적 측면에서 해결점을 찾아야 하는 문제도 있다. 시간 강사들과 관련된 열악한 처우가 그것. ‘한국 비정규직 교수 노동조합’의 임성윤 성균관대 강사는 강사와 교수를 곧 서양 중세 때의 영주와 농노로 비교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본분은 같지만 대우나 인식의 측면은 앞서 사용했던 극단적인 비유처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생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강사료 문제를 제하더라도, 교수와 강사를 뚜렷이 구분지어 태도를 달리하는 일부 학생들로 기운이 빠지기는 마찬가지다.

연구공간이 부족해 공강 시간이면 피씨방에 가 있는다는 한 시간강사의 말도 그들의 고된 생활을 짐작케 한다.

다수의 사람들과 조금 다른 성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아니꼬운 시선은 대학문화만의 특징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주목받는다. 대학 안, 그것도 일류대일수록 동성애자들의 활동은 시선을 끄는데, 그것은 사회가 정해놓은 대학생 계층의 기대치와 정면으로 배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들을 손가락질하든 이해하든 그들의 정체성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소모적인 흠집 내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앞서 이야기되었던 사람들을 비롯해 다양한 학내 구성원들이 뜻하지 않게 기존의 법과 제도, 혹은 인식 안에서 소외당하고 있다.

우리사회 관용, 대학에서부터 시작해야

누군가는 동성애자들을 인정할 수 없고, 또 누구는 편입생이 아니꼬우며, 학점을 제외하면 시간강사의 일이야 말로 자신과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듯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

그래서 더불어 사는 삶을 만드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다름 아닌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시도는 더욱 그렇다. 이것은 프랑스로 망명했던 홍세화씨가 소개했던 ‘똘레랑스’의 정신이기도 하다.

다수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작은 부분까지 인정하는 것. 그리고 소수 대 다수, 주류 대 비주류의 구분점을 경계로 편먹지 않는 것. 이것은 다양성의 세계를 살고 있는 오늘날 가장 필요한 미덕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 시도는 얼굴은 잘 모르지만 오늘, 같은 강의를 듣는 한 외국인 학생에게 한 마디 말을 건네는 당신의 사소한 행동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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