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국적으로 ‘자녀 안심하고 학교 보내기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운동의 취지는 자
녀들이 안심하고 학교에 다닐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자는 것이다. 취지는 좋으나 표어로 사
용한 말이 문제다. 표어를 아무리 해석하려고 해도 도대체 이해가 안 간다. 취지에 따라서
풀어 보자면, ‘자녀를 안심하고 학교에 보내기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 말의 근
저에는 ‘안심하고 자녀를 학교에 보낼 수 없다’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을 표어 그대로 해석하자면, ‘마음 놓고 자녀를 학교에 보내자는 운동’이
된다. ‘학교 폭력’이나 주변 유해 환경을 정비하자는 운동이 아니라 학부모들에게 ‘불안
해 하지 마라’고 학부모들을 안심시키는 운동이 되어 버린 것이다. 원래의 의도와 표어의
내용이 전혀 맞지 않다. 본래의 취지와 위의 표어를 최대한 살려 다시 쓰자면, ‘자녀 안심
하고 학교 다닐 수 있게 하기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무슨 뜻인지만 통하면 되지 그게 무슨 상관이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우리
사회가 왜 이리 의사소통이 안 되는지에 대해서 아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처음에 표어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심(無心)’의 소치에서 나온 결
과라고 본다. 우리는 잘못된 일을 놓고. ‘무심히, 무심코’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무심’이란 또 다른 형태의 악(惡)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결과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전 국민이 운동에 참여하자고 호소하는 표어가 이렇게 의미 전달도
제대로 안 되는 것이라면 ‘무심’이 악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비슷한 말을 구별해서 쓰지 않은 것도 ‘무지’때문이라기 보다는 ‘무심’때문인 경우가
많은데, ‘스승의 높은 뜻을 쫓아’나, ‘다가올 지식 사회에 대비하여 지능 개발을 서둘러
야 한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유학을 가야 한다’와 같은 것들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쫓다’는 ‘억지로 몰다’의 뜻이기 때문에 ‘따르다’의 의미인 ‘좇다’로 써야 하며,
‘개발’은 ‘새로운 것을 찾아 내어 발달케 한다’는 의미이므로 ‘교육을 통해 지능을 깨
우쳐 준다’는 의미인 ‘계발’로 고쳐야 한다. ‘목표’도 ‘이루고자 하는 대상’이라는
의미로 쓰이므로, 이 경우에는 의지나 행동이 수반되는 개념인 ‘목적’이 더 정확하다.

이런 차이는 조금만 관심을 갖고 사전을 유심히 찾아 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국어 사용에
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바로 이 ‘유심(有心)’이다. ‘유심함’은 사람을 차분하고 치
밀하게 해 주어 남에게 끼칠 수 있는 피해를 줄여 줄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사람으로까지
만들어 준다. 기실 ‘유심히’라는 말과 문장에서 호응하는 것은 모두 ‘새로운 각성’과
관련되는 말이니, 어찌 인간을 진지한 사람으로 끌어 올려 주지 않겠는가? 자기가 쓰고 있
는 말이나 남의 말을 유심히 살펴보면, 우리가 얼마나 부정확한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부정확한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부정확한 의사소통이 오해와 갈등을
낳는 요인이 된다는 증거는 여러번 제시했거니와 대화 중에 ‘무심코, 무심히’라는 토를
자주 달기 보다는 ‘유심히’라는 말을 많이 써서 우리말에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갖어 주
기 바란다. 같은 말을 계속하다 보면 실제 그 말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
실인데, 누구나 자기에게 무심한 사람보다는 유심한 사람과 더 가까이 지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매, 그러다 보면 마침내는 우리 모두 누구에게나 유심한 사람이 되어 세상 살이가 더
간절해질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이찬규 <문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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