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원하지 않았지만 불행하게도 실업은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가장 중요한 적이 되
고 있다.” 한국의 얘기가 아니다. 스웨덴 사무직노총(TCO)의 잉예르 올손 위원장의 말이
다.

한국사회가 국제통화기금 신탁통치로 대량실업에 신음하기 훨씬 전부터 스웨덴등 북유럽에
는 장기 고실업의 태풍이 불고 있다. 노조 조직률 80%를 자랑하는 스웨덴 노조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 대응이 꼭 파업등 싸움인 것 만은 아니다.

스웨덴의 3대 중앙 노조조직인 노조총연맹(LO·조합원 220만명·생산직 중심), 사무직 노총
(130만명·사무직 중심), 전문직 노총(SACO·40만명, 사무·전문직 중심)등은 국립노동생활
연구소와 함께 광범위한 공동 연구 프로젝트인 ‘살트사’를 수행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
노동의 유연화, 실업증가 등 일련의 급격한 상황 변화의 본질을 파악해 노조진영의 장기적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이 프로젝트의 재원은 세갈래로 충당된다. 첫째 노조, 둘째 노동부의 재정지원을 받는 국립
노동생활연구소, 마지막으로 정부예산으로 운영하는 스웨덴 최대 노동연구지원기금인 스웨
덴노동생활연구위원회이다.

노사의 ‘합의’를 중시해온 스웨덴에서는 노동조건의 변화와 관련해 이런 식으로 노·사·
정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연구가 빈번하다. 노동생활연구위원회는 이런 흐름을 지원하는 가
장 묵직한 돈 주머니이다. 한해 예산 2억8천만여 스웨덴 크로네를 해마다 노동관련 연구
500여 건을 지원하는 데 쏟아붓고 있다.

이 위원회 군넬 페름 사무총장은 “만족스러운 노동생활만이 높은 생산성을 보장한다”며
노동자들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는 일이 경쟁력 제고의 전제조건임을 분명히 했다. ‘노동
시장에서의 여성의 지위’등 여성노동자 관련 연구를 중점 지원하는 것도, 성차별을 제거하
는 게 사회적 자원을 최대한 결집하는 지름길이라는 문제인식에 따른 것이다.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스웨덴에서는 보수주의자로 통한
다. 스웨덴은 미국이나 영국 등 앵글로색슨 사회와는 다르다.” 이 위원회 비르이타 셰파르
드 뉘만 국제관계국장은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면서도 높은 경쟁력이 노동조건의 악화를
담보로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단서를 달았다.

노동생활연구소도 스웨덴 사회가 ‘경쟁력’과 ‘더 인간적인 노동’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
해 마련한 제도의 하나다. 470명의 연구원(이중 122명이 박사, 32명은 교수이다.)이 활동하고
있는 이 연구소는 ‘인간공학’ ‘노동의 심리적 조건’ ‘노동환경 개선 기술’등 노동자
건강 및 작업장 안전은 물론 첨단기술 확산에 따른 노동생활의 질 향상을 위한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우리에겐 아직 낯설지만 ‘사회적 합의’를 중시하는 이른바 ‘스웨덴 모델’은, 지난 38년
살트셰바덴협약 이후 스웨덴에서는 오랜 전통으로 굳어졌다. 지난 90년부터 95년까지 운영
됐던 ‘노동생활기금’은 그 대표적 사례다. 5년여 동안 1백억 스웨덴 크로네가 노동생활과
노동환경의 개선을 위한 2만5천여 건의 연구를 지원하는 데 투입됐다. “사회적 합의란 힘
의 균형과 민주주의가 살아 숨쉬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강력한 노동운
동의 존재 위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정보통신기술과 세계화로 대변되는 세기말 ‘경쟁력
주의’에 맞서는 스웨덴 노조총연맹의 다짐이 인상적이다.

한편 과학기술민주화 실천과 관련해 스웨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참여설계’이다. 참여
설계란 장치나 시스템을 직접 사용하거나 생산하는 사람들이 그것의 설계에 기여해야 한다
는 간단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다. 참여의 수준은 단지 논평할 기회를 가지는 것에서부터
완전히 동등하게 참여하는 것까지를 아우른다.

지난 81년부터 5년동안 스웨덴노동생활센터(현 스웨덴노동생활연구소)등 정부기관과 북유럽
그래픽노조가 공동으로 수행한, ‘유토피아(노동생활의 질의 관점에서 훈련과 기수 및 제품)
프로젝트가 선구적 사례다. 이는 컴퓨터 그래픽 기계의 확산에 따른 ‘VDT 증후군’등 부정적
영향을 제거하기 위한 대안적인 그래픽 기계 개발 시도였다. 그뒤로도 적잖은 시도가 있었지
만 상용화한 사례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제훈 <한겨레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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